EP·435
스승을 여럿 모셨으면 당연히 제자 노릇도 여럿을 해야 한다·
그러니 제자는 마땅히 둘째 스승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청이 생각하기로는 딱히 스승으로 모실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면 스승님 모시는 것도 사부님이 좋은 생각이라 생각하셔서 그렇게 된 거 아니었나? 하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듣고 나니 스승님의 그 비열한 웃음이 보고 싶기는 하더라·
그리하여 여기에 아주아주 신이 난 사람이 한 명·
“짐은 뭘 챙겨야 해?”
“옷· 속옷· 수건· 바늘· 실· 그리고 칼·”
“그거면 돼? 금은은 얼마나 챙겨야 해? 나 용돈 받은 거 있긴 한데· 일단 다 가져가면 될까?”
무슨 해외여행 처음 가는 꼬맹이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진장명에 청이 피식 웃으며 대답해준다·
“어허이 넣어둬· 금은이 왜 필요해?”
“필요 없어?”
“칼 챙기랬잖아· 칼 있는데 왜 금은이 필요해?”
“···?”
“칼·”
“맞아?”
청이 킬킬 웃으며 진장명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장명이는 머리 위치가 너무 낮아서 딱 쓰다듬기 좋은 자리에 있단 말이지·
“니 사숙조가 이래 뵈도 엄청 부자거든? 코흘리개 까까 사먹는 용돈까지 필요하지는 않다·”
“나는 애가 아닌데· 올해 스물이고·”
“스물이면 완전 애기지· 애기·”
“한 살 차이잖아·”
“어허· 그 한 살의 차이를 모르겠어? 나 초절정 꼬맹이는 음 말을 말자· 일이삼? 다 똑같은 하수인데 왜 굳이 숫자까지 붙여가며 구분을 하지? 진짜 모르겠네·”
“씨이·”
“자· 가서 짐 챙기고 푹 자·”
“응·”
대답이야 곧잘 하지만 상태를 봐서 저게 밤에 잠이나 잘 수 있을까 모르겠다·
라고 생각했더니·
당장 다음 날 눈두덩이가 퉁퉁 붓고 또 흰자위에 뻘겋게 핏발이 선 모습이 아닌가·
거기에 제 몸통보다도 큰 보따리를 매고 그래도 무인이랍시고 몸놀림이 가볍기는 하지만·
“옷· 속옷· 수건· 바늘· 실· 뭐가 그리 많아? 무슨 포목점 해? 보부상이야?”
“필요하다는 것만 챙겼는데·”
“아이고· 허우대 멀쩡한 놈이 쪼끄만 노비 부려먹는다는 소리 듣겠네· 어디 봐· 음 이불은 왜 들었어?”
열자마자 일단 이불이 튀어나온다·
“이 사저가 밖에서 자면 추위를 조심해야 한대·”
“밖에서 안 자거든? 그리고 밖에서 자도 이불 덮고 자지는 않고· 음 이건 뭐야·”
“피풍의· 사 사저가 무조건 필요하대·”
피풍의는 의복의 일종으로 청의 고향 말에서는 망토라고 한다·
사실 둘의 차이는 이름 말고는 없다·
어째서 다른 문화권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일치하는 복식이 나타날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이 하는 생각이 동양이건 서양이건 다 거기서 거기라서 등 뒤에 길게 늘어뜨려 싸매는 복장이 멋있다고 그리 여기는 보편적인 감성인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냥 긴 천 혹은 가죽으로 머리 싸매고 앞에 여미는 방식은 원숭이도 만들 수 있을 만큼 제작이 쉬워서 그렇다·
추운 동네는 추위 피하려고 더운 동네는 더위 피하려고 뒤집어쓸 뿐이고·
“있으면 좋기는 한데 이번엔 필요 없어· 장명아 태원에는 놀랍게도 집이라는 것이 있단다·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눈과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놀라운 발명품이지· 아 이렇게 말로만 설명해서는 모르려나?”
“씨이·”
“여벌솜 거기 도착하면 이제 더워· 겨울 옷 마찬가지· 옷감은 왜? 수선? 가서 길쌈이라도 하려고? 냄비? 그릇? 수저는 왜? 아 금창약은 잘 챙겼고· 음? 이건 뭐야 육포? 웬 포가 이렇게 잔뜩?”
“오 사저가 가면서 먹으라고···”
“훌륭하다· 그래· 이런 걸 챙겨야지· 딱 이런 거·”
“···?”
어쨌거나 진장명의 짐보따리가 극단적인 관리를 통해 홀쭉해지고 만다·
거의 피난길 살림살이 수준이었던 온갖 자질구레한 세간을 덜어내고 나니 이제야 좀 제대로 된 강호의 유랑객이다 싶다·
이후에는 후덕한 모습이 영 적응이 안 되는 문주님께 인사를 올리고 사부님께도 제자 다녀오겠다며 척 절을 올려드리고·
그러고서야 출발 태원으로·
—-
흔히들 악적의 무리를 사마외도라 한다·
여기서 사라고 하면 사파 놈들을 마라고 하면 마교 놈들이다·
하지만 세상에 악적이 사파와 마교뿐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머지를 묶어서 길에서 벗어난 놈들 외도라고 했다·
어쨌거나 사파 놈들은 사도를 걷는다고 하고 마교 놈들은 마도를 걷는다고 어쨌건 주장하기는 하니까
그러니 나머지를 길 없는 놈들 외도라고 부르기로 정사마가 합의 없는 합의에 이르렀다고도 하겠다·
이 외도에는 대표적으로 박멸해야 하는 인간 말종들인 혈교가 있다·
그리고 언제나 중원의 그림자에서 암약하는 암상이나 인신매매범들 식육업자들 등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또 도적떼들이 있다·
이에 놀라운 사실!
녹림은 사파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야 아무리 사파 놈들의 주 업무가 강도의 일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해도 그래도 아예 대놓고 재물을 빼앗지는 않는다·
사파는 최소한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었으니 보호 없는 보호비라든가 부흥 없는 부흥기금이라든가 기타 권리 없는 세금 등등을 거친 수단으로 걷어낼 뿐이다·
최소한 나라에서 관무불가침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어 가며 묵인하는 그러니까 공인된 집단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녹림은 어떠한가?
녹림이 말이 좋아서 녹림이지 그냥 산에 사는 도적 새끼들이다·
이는 관부에 녹림을 토벌해달라 탄원을 올리면 그 핑계가 군사는 내 소관이 아니라서 군사는 저기 국경을 막느라 바빠서 포졸이라도 쓰면 안 되냐고? 그럼 도시는 누가 지키는데 하는 변명이 날아오는 데에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산적 놈들을 놔두는 데에는 관무불가침의 핑계조차 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녹림 총채주의 셋째 아들이 찾아왔다고 들었을 때 사도련주는 그놈이 왜? 산도적 새끼들 우두머리의 새끼가 갑자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는·
“하· 녹림을 제꼈다고? 겨우 초절정에 막 도달한 애송이가?”
“온갖 비열한 수단을 다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식을 잔인하게 죽여 전시하고 산채를 불태워 평정심을 흐리고 거기에 독을 쓰고서는 네 자식 이렇게 죽였다고 악을 쓰며 독이 퍼질 때까지 도망을 다녔다는 소리는···”
“그게 진짜겠소? 원래 진 놈은 억울해서 온갖 개소리를 다 짖어대는 법인데· 저네도 쪽팔린 줄 아니까 그런 개도 안 믿을 소리를 싸지 않겠소· 화경 후기가 초절정 초기 이제 막 경지에 발 들인 애송이한테 지면 와 그냥 병신새끼네 그거·”
“그래서 어찌하시겠습니까?”
“녹림을 삼켜봐야 그게 련에 도움이 되기는 하나? 애초에 그놈도 그래· 나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녹림을 드릴테니 복수를 해 달라 하면 녹림이 뭐 그렇게나 가치가 있는 줄 아는 모양이오? 그랬으면 진작에 내가 가서 인녹림 그 새끼 패고 자식새끼들 죄다 데려다 인질로 삼았지·”
그러자 순웅이 빙그레 웃는다·
왕대양의 큰 실책이었다·
사도련은 굳이 녹림이 필요하지 않다·
혈교 묻어서 광주 일을 그르친 것처럼 녹림이 묻어봐야 내 그럴 줄 알았다 도적 놈의 새끼들 이젠 아예 본색을 드러내는군 하고 사도련 전체의 격이 떨어질 뿐이니까·
순웅의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에 부안평이 왈칵 성을 낸다·
“아니 누가 책사야!? 옆에서 딴지만 걸면 그게 책사야? 대신 생각하라고 앉혀놨더니 왜 남의 머리를 굴려!? 일을 하시오! 일을!”
“련주께서 이미 총명하시니 제가 굳이 나서서 뭘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손에 들어온 패를 버릴 필요는 없으니 적당히 고수나 붙여주고 조종해 보겠습니다· 중원 전역으로 통하는 산길이라면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자원이지 않습니까·”
그에 부안평이 마뜩잖게 혀를 한번 쯧 차고는 말을 잇는다·
“그리고 천화검 그년도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어· 어떻게든 해치울 방도를 나라도 좀 나서게 명분을 판을 짜 주시오·”
“굳이 말입니까?”
“천지 분간 못하고 멍청해서 날뛰는 년은 놔둬도 돼· 그러다 죽어 자빠질 테니까· 제 원한에 익사하는 게 무림인의 말로라는 걸 나중에나 알게 되겠지·”
부안평이 미소를 거둔다·
“그런데 이제 보니 멍청한 년이 아니야· 저보다 고수를 사냥할 줄 아는 년이니까· 지금은 고작 초절정이지 최연소 초절정? 다음은 최연소 화경인가?”
고작 초절정의 애송이가 화경을 둘이나 해치우고 녹림을 불태워?
부안평이 초절정이었을 때는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능할지 막막한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솜씨가 아닌가·
그게 초절정이라고? 그럼 나중에는?
“그딴 게 고수가 되도록 놔두면 안 돼· 세상 모든 악인을 다 참수하겠다고 날뛰는 절세 고수?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해·”
부안평의 눈빛이 번뜩인다·
—-
청이 광서로 떠나기 전 편지에 여름에 찾아뵈어도 좋느냐고 서신을 보내놓았으니 돌아와서는 제자 얼굴 보기 참으로 힘들다고 툴툴거리는 답장이 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마차 타고 곧게 뻗은 가도를 따라서 산서성까지 특급으로 직행하는 여정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머다하고 그럼 우리 어디 가? 중간에 뭐 있는데? 또 다른데 어디 가? 어디 뭐 있어? 하고 쫑알쫑알 일 각에 한 번씩 물어보던 꼬맹이가 있었다·
잔뜩 부풀어서 설렌 모습을 보자니 응 우리 하루 열두 시진 마차에서 자고 마차에서 먹고 마차에서 늘어져 있다가 태원까지 닿을 거야 하고 초를 치기도 뭐하다·
그러니 어째 좀 여행 기분을 내 줘야지·
그러니 상회의 초특급 고오급 마차는 다음 기회에 설렁설렁 마차 빌리고 들르는 도시마다 명산 구경도 하고 특산품도 먹어보고 하며 북으로 또 북으로·
그렇게 한없이 느긋하게 풍광도 좀 보고 모처럼 강호에 나와 신이 난 진장명과 어울려주며 한 달·
삼문협을 떠나 운성 가는 길·
즉 이제는 여정이 산서성에 접어들었다·
슬슬 수목이 바뀌어가는 마차 밖의 풍경을 무심히 들여다보던 청이 사각사각 무언가 갈아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뭐 해?”
“이거· 갈아·”
“엥· 그거 안 버렸어?”
“안 버려· 끝에만 둥글게 갈면 돼·”
청이 선물한 작은 조개 귀걸이다·
조각이 난 날카로운 부분은 둥글게 갈아놓으면 원래부터 반쪽짜리 물건으로 보이지 않겠냐고·
진장명이 부러진 쪽을 조심스레 바투 잡아서는 숫돌에 살살 문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조심스레 갈아내던 진장명이 후 불어 제 눈가에 비춰보며 요리조리 살피나 싶더니만 어딘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고개를 푹 처박고 사각사각 조개를 간다·
그때였다·
덜커덕! 마차가 튄 돌을 밟았는지 크게 뛰어오른다·
“앗·”
진장명이 울상이 되어 제 손을 내려다본다·
반토막 난 가리비 귀걸이가 이제는 반의 반 가리비 귀걸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반절일 때는 반절 짜리 가리빈가 싶은 원형이 남기는 했었는데 이제는 한 짝만 봐서는 도대체 무슨 형상인지 알 수 없는 그냥 반짝거리는 무언가다·
“윽····”
“에이 너무 마음 상하지 말고· 내가 또 사주면 되지·”
“응····”
대답이야 하지만 어깨가 축 처진 꼴이 상당히 낙심하고 만 모양·
그래도 마차 안에서 세심한 작업을 하려 들다가는 일순간에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으리라·
다들 이렇게 경험하면서 배우는거지 뭐·
그렇게 산서 땅에 들자마자 거하게 신고식을 한 번 치르고는 이후로 열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산서성의 성도 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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