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37
요 쪼끄만 녀석이?
어린 게 벌써 학문을 멀리하려 들어?
“장명아?”
눈가가 꿈틀한 청이 손을 척 내민다·
진장명이 제게 주어진 희고 가는 손가락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앗· 나비·”
돌연 나비를 찾아 고개를 홱 돌린다·
이 자식이? 공부는 하기 싫다 이거야?
진장명의 괘씸한 학문 탈출 시도는 일단 나중에 응징하도록 하고·
“아· 맞다· 스승님· 여기 제자가 드리는 마음의 선물·”
“헹· 뭐 이런걸 다 가져오고·”
천유학이 혹시 거둘세라 청이 내민 상자를 척 빼앗아 열어본다·
쓴 적 없어 새 것인 서필이 얇은 것 더 두꺼운 것 아주 두꺼운 것 세 자루·
붓을 손으로 한 번 쓸어본 천유학이 픽 웃음을 터뜨린다·
“뭐야 담비네? 제법 값이 나가지 않든?”
“에이· 오다 주웠어요·”
“그래· 이 정도는 주워야 내 제자라고 할 만하지· 누구 품에서 주워 왔냐?”
“에이 그런 쪽은 아니고·”
광서 땅에 있을 때 각다귀 옆에 있던 문사 아저씨가 한 번씩 꺼내준 서필들이다·
일종의 선물 재활용이었다·
아니 재활용이 아니다·
선물의 ‘재분배’다·
어차피 청이 글씨 쓸 일이 드물고 가끔 쓸 때면 붓도 종이도 앞에 있는 법이라서 사실 고급 서필을 쓸 일이 없지 않던가·
그러니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는 편이 서필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고맙다· 잘 쓰마· 그런데 기왕이면 아주 화려하게 장식이 된 것으로 좀 주워 오지 그랬냐· 산호 몸체에 금박 붙인 그런 종류 있잖냐·”
“엥· 그런 취향이셨어요? 번쩍번쩍?”
“아니· 그래야 누가 물어볼 거 아니냐· 그 촌스러운 서필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하고· 그래야 나도 제자한테 받았다고 자랑을 좀 하지·”
“굳이 자랑하려고 촌스러운 서필을 받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헹· 효도가 별거냐? 자랑거리 만들어 드리는 게 효도야·”
툭 지나가는 말인데도 대단한 현기가 느껴진다·
청의 표정이 떨떠름하다·
“음· 이상하다· 자꾸 배우신 분처럼 구시니까 적응이 안 되네요·”
“원래 지성은 꺼드럭댄다고 나오지 않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지 뭐든 막 안답시고 떠든다거나 저가 잘났나느니 막 뽐내면 경박하기만 하지·”
그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들이·
그래 제갈이현이가 많이 경박하긴 해·
그리고 사마춘봉? 봉춘? 걔는 심하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고·
그에 비하면 설가놈을 보아라·
본인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주 입만 열면 배운 사람의 고아한 향기가 팍팍 뿜어져 나오지·
성희롱할 때만 빼고·
음· 이제 보니 정파 무림의 미래가 정녕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제일 똑똑한 둘이라는 연놈이 그따윈데?
청이 정파 무림의 암담한 미래에 대해 큰 우려를 표했다·
뭐 알아서들 하겠지만·
청이 잡생각답게 털어버리고는 짐에서 다른 물건도 꺼내 내민다·
“아· 맞다· 이것도요·”
“응? 뭐냐? 손수건? 사내 손수건 치고는 너무 화려한 오 이거 장보도로구나?”
“와· 보자마자 알아보세요?”
“어디 보자· 대충 봐서는 전혀 모르겠는데· 이거 어디서 구했냐? 원래 장보도라는 건 출처가 제일 중요해·”
“왜요?”
“그야 좀 묵직한 놈이 가지고 있어야 와 이게 진짜 보물 지도인가 하지· 야시장에 가 봤냐? 장이 열리면 꼭 장보도 파는 새끼가 서넛은 나와· 그런 걸 믿을 수 있냐?”
“오· 그러면 그건 어때요? 녹림 총채주가 가지고 있던 건데요·”
“녹림 총채주? 흐흐·”
그러자 천유학이 싱글벙글 웃음꽃이 아주 활짝 피었다·
“뭐에요 그렇게 좋으세요? 아까 서필 드렸을 때보다 열 배는 더 피셨는데?”
“그야 안 기쁘고 배기겠냐·”
“장보도가 그리 좋으세요?”
그에 천유학이 입술을 한 번 뒤집어 보이고는 말하는 것이다·
“이것아· 내가 뭐 제자한테 장보도 받아서 기쁘겠냐? 제자가 녹림 두목한테서 이 장보도를 가져왔다고 하니 그 성취가 기특해서 그런 거지· 이제 어엿한 큰 도둑년이 다 되었구만! 장보도란 본래 피를 부르는 물건이니 이리 훔쳐서 감추는 것이 천하의 큰 도둑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냐· 너도 이제 완전 도둑년이 다 됐어· 내 제자 하나는 아주 잘 뽑았다· 나는 은퇴해도 되겠구만·”
그러니까 신투로서 예비 신투가 무려 녹림 총채주에게 장보도를 훔쳐온 일 자체가 기특하고 어여쁘다는 소리다·
“그래서 무용담이나 좀 들어보자꾸나· 어찌 가져왔어? 장보도가 있는 줄은 어찌 알았고· 그걸 천자산까지 가서 훔칠 생각을 했단 말이지· 크큭·”
아닌 게 아니라 천유학은 기쁘다·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아직 수련도 다 끝마치지 못한 예비 신투가 천하의 산적 두목에게서 화근이 될 법한 장보도를 훔쳐왔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필시 장보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신투로서의 사명을 자각하고는 어떻게든 훔쳐 치워버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천자산까지 잠입하여-
“음· 그냥 가져왔는데요?”
“···?”
천유학의 머리가 잠시 회전을 멈춘다·
“그냥 가져오다니?”
“그게요 제가 장가계를 구경하던 중이었는데요· 아 장가계 아세요? 거기 경치가 진짜 끝내주는데 막 이 세상 경치가 아닌 것 같고 산이 막 이렇게 세운 주먹처럼 생겨서는 그런 게 수천 개 있는데-”
“이년아 손은 좀 내려라· 누가 볼까 무섭다· 뭔데 말좆이냐?”
“앗·”
청이 대단히 불순하게 내보인 주먹 산을 감췄다·
그래도 하나 배우기는 했다·
중원에서는 이걸 말좆이라고 쓰는 모양이구나!
그리고는 녹림도들과의 혈투를 풀어놓는데·
지나가던 정파의 여협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산적 놈들을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깨부숴 응징하는 영웅담이었다·
이야기가 끝나니 진장명의 눈이 반짝반짝 별빛처럼 빛난다·
“언니 대단해· 굉장해· 초 협객이야·”
“그렇지? 내가 이렇다니까·”
“아이고· 그러니까 제자야· 제자가 녹림을 토벌했다고?”
“에이 토벌까지는 아니고· 세상에 산적이 한둘이에요? 뭐 두목도 죽고 다른 화경 고수도 해치웠으니 앞으로는 몸을 사리긴 하겠죠?”
“아이구야·”
천유학이 이마를 쓸었다·
그게 가능했는지는 둘째로 치고·
다 죽이고 가져오는 건 보통은 훔쳤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신투야?
신강도 아니 신 자를 붙이기도 민망하니 그냥 강도 살인마가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냥 강도 살인마는 아니다·
초절정 강도 살인마다·
“아니 도둑년이 되랬더니 왜 강도년이 됐어?”
“어 음· 목숨을 훔쳤다고 하면? 어차피 해로운 거 훔쳐서 치우는 거면 백해무익한 산적 놈들 목숨을 훔친 건 결과적으로 그 뜻과 결과는 같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음·”
그에 천유학이 한숨을 푹 내쉰다·
“대사께서 왜 공부를 시켜달라 하셨는지 이제 알겠구만·”
“하지만 어차피 녹림 놈들은 놔둬 봐야 산적짓이나 했을 테고-”
“그만·”
천유학이 엄한 소리로 청의 말을 끊는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지라 청이 목을 움츠려 머리를 어깨 사이에 끼워넣으려 애를 쓴다·
청의 신체는 인간을 초월했지만 그렇다 해서 거북이에 닿지는 않았기에 그저 애를 쓰는 수준에서 멈추고 말았지만·
잔뜩 주눅이 든 청을 보며 천유학이 혀를 쯧쯧 찬다·
“나는 네가 녹림의 흉악한 도적떼를 학살한 건에 대해서 잘못했다고는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잘한 일이 아니냐?”
“어 진짜요?”
그에 청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천유학이 말을 이었다·
“내 성현들의 경전을 무수히 읽고 또 읽어 마음에 새겼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개소리도 여럿이다· 노자가 말하기를 천망회회소이불실이라 했다· 무슨 뜻인지 아냐?”
“헤헤·”
청이 웃었다· 모른다는 뜻이다·
“하늘의 그물은 성긴 것 같아도 작은 것 하나 놓치는 법이 없다·”
하늘의 그물이란 즉 악업에 대한 심판·
성긴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그 심판이 때로는 완벽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자가 굳이 여기에 사족을 붙이고 말았으니 소이불실 그렇게 보이더라도 작은 것조차 놓치지 않는다고·
악행이 결국에는 필히 돌아와서 잘못된 행위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세상이 정녕 그러한가?
선량한 이는 복을 받고 악독한 이는 벌을 받게 되는가?
아니다·
하늘의 그물은 너무나 헐거워서 악인은 너무나 쉽게 빠져나가고 만다·
노자께서는 개도 안 믿을 새빨간 거짓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속이며 기만했다·
아마 본인께서도 입에 올리며 민망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음·”
“그리하여 사마천이 말하기를 음 아니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자꾸나·”
“사마천이 다음에 하자고 말한 건 아닌 거죠?”
“그래· 어쨌거나 네 말대로 떳떳하다면 어째서 목소리에는 힘이 없고 얼굴은 이 스승을 똑바로 보아 당당하지 못하는데? 내가 도적 새끼들을 참살했다· 다시는 도적질 못 하도록 그냥 반으로 잘라놨다· 어깨가 치솟고 콧대를 드높여 가문의 자랑거리를 말하듯이 자랑스럽지 않고?”
“음· 그건·”
청이 대답을 골랐다·
하지만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까끌하니 신경을 건드릴 뿐 대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야 재미있었으니까·
어차피 누군가를 죽여야 살 수 있다면 죽어도 되는 놈들 죽여서 겸사겸사 선업도 쌓고 내 즐거움도 채우고·
세상 좋고 청도 좋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는 세상의 완성이다·
물론 산적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 안에 들지는 않는다·
악인은 죽여야 한다가 아니다·
악인은 죽여도 된다·
그 미묘한 차이가 그 사소한 차이가 너무나 커서·
“노자 그 사람이 순진하고 멍청한 놈이 아닌데 개도 안 믿을 개소리를 씨불였겠냐? 지은 죄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순리이니 착하게 살고 나쁜 짓 하지 말라고 정말로 진심으로 믿어서 그런 소리를 했겠냐고·”
“그럼요?”
“노자 본인도 안 믿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으니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노자 본인도 알지만 전국 시대 그 악행이 흘러넘치는 시대에 권선징악 네 글자를 널리 퍼뜨려야 했으니까· 그러니 노자는 그런 개소리를 당당하게 했다· 본인이 거짓을 입에 담고 있음을 알면서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사기를 치고 다녔다 이 말이다·”
천유학이 청의 등을 탁탁 두드려준다·
“그것이 옳다고 믿고 정녕 필요한 일이라고 하면 그것이 설령 천하 만민을 기만해 속이는 일이 되더라도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한림원의 대학사의 입에서 나오니 참으로 멋진 대사다·
하지만 그게 또 신투라고 생각하면?
고작 도둑질 하는 새끼가 참으로 거창한 소리 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니까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남의 물건 훔치고 다닌다는 소리냐면서·
“음· 잘 모르겠어요· 옳다고 믿고 필요한 일이라는 게 그건 누구한테요? 저한테요? 아니면 세상에요?”
그에 천유학이 킬킬 다시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그걸 모르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 거다· 제자백가 무수한 옛사람의 고뇌를 한 번씩 체험하고 나면 그때는 제자가 고민하는 바 역시 스스로 결론을 낼 수 있을 거다·”
돌고 돌아 기승전공부 결국 공부하라는 소리가 되고 만다·
그래도 이렇게 듣고 나니 어쩐지 공부를 매우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것이 원래 이름난 강사들의 수법이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제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정신을 콱 붙드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가 어디인가·
다름아닌 한림원의 태학이다·
현 중원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교육 기관으로 기초는 물론이거니와 응용까지 전부 다 떼고 오는 청의 고향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쯤 되는 위치라고 할 수 있겠다·
천유학은 저 뒤에서 근엄하게 자세를 척 잡고 있다·
한림원 학사들이 주어진 시제로 돌아가며 발표하고 그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해석들 교환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는 모양인데·
“여기에 하얀 말이 있다· 하얀 말을 말이라 한다면 검은 말은 말이 아닌 것인가? 누런 말은 말이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하얀 말은 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는 정확히 말해서 하얀 말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말에 더해 하얗다는 그 빛을 추가함으로써 하얀 말은 말이 아닌 한개 집단의 특이한 말을 지칭하는 말이 되므로 하얀 말과 말은 비록 같은 말이라고 하나 엄밀히 말해 같은 말이 아닌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씨 무슨 말 같잖은 소리를 하고 있어 아주 뚫린 입이라고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당근을 처박아버릴까보다·”
청의 신랄한 평가에 주변 학사들이 킥킥 웃음을 참느라 난리다·
기초도 모자란 청이 들어봐야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백마비마론 정도야 다들 한 번쯤 떼고 오는 학사들과는 달리 청이 듣기에는 뭔 말이 말인지 무슨 말이 말이라는 소린지 전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백마든 흑마든 맛만 좋으면 그게 최고의 말이 아닐까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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