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6
청의 세심한 시술 덕분에 다리가 평범하게는 움직이겠지만·
아무래도 큰 힘이 실리면 무릎이 돌아가 와장창 쓰러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놈은 어떻게 살게 될까·
평범하게 평범한 사람처럼 살게 될까?
아니면 남은 평생 증오와 더는 불가능한 복수 사이에 망가져 폐인이 되어버릴까·
어느 쪽이든 참으로 보람있는 일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마음 고쳐먹고 건실하게 살든 아니면 죽을 때까지 괴로움을 떨쳐내지 못해 고통 뿐인 삶을 살게 되건·
전자는 세상에 이롭고 후자는 악행의 대가를 치르는 거지·
하지만 그 대형인지 무슨 문파에 달려가 일러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약초꾼으로 위장한 연놈들이 들어와 저를 이렇게 만들었고 억울하니 복수해 주세요 엉엉 뭐 이런·
그럼 좀 많이 화가 나지 않을까?
음· 역시 죽였어야 했나·
하지만 스승님도 계시고 장명이도 있고·
에이 지나간 일에 신경쓰지 말자·
“음· 그런데 이제는 뭘 해요?”
“아이고· 그리 태평하냐?”
“조급하다고 뭐가 되나요? 욕속부달이며 알묘조장이라 아시죠?”
욕속부달은 공자님 말씀 알묘조장은 맹자님 말씀이다·
둘 모두 서두르다 일을 망친다는 말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청의 고향 땅 속담과 같은 뜻이다·
그에 천유학이 콧김을 흥 뿜는다·
“흥· 겨우 제자백가를 한 번 훑어놓고는 문자를 쓰는구나· 하긴 그쯤이 딱 천하에 내가 문자를 배웠노라고 아주 소문을 못 내서 안달일 시기이기는 하지·”
원래 공부도 딱 겉에만 한번 훑은 놈이 요란하게 태를 내는 법이다·
청의 고향에서는 우매함의 봉우리라고도 하는 대충 기본만 뗀 놈이 자신만만하여 아는 척을 하는 상태다·
하지만 천유학은 시강학사 굳이 말하면 봉황쯤 되는 유학의 거인 앞에서 병아리가 삐약삐약 네 글자를 사자성어라고 내어놓는 꼴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봉황의 심정은?
매우 귀엽다!
아이고 병아리가 문자도 쓰네!
혹시 천재니? 대학원 안 오련?
척척학사 말고 척척박사 한번 해 봐야지?
천유학이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래· 그래도 네 말이 맞기는 하지· 뭐 서두른다고 보물이 도망이라도 가겠냐· 뭐다만 느긋할 여유도 없다만·”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될까요? 그냥 땅에 비급 안 떨어져 있나 낙엽이나 훑으면서 막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신시신묘향지· 신시에 신묘가 가리키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냐· 내 생각에는 어떤 묘비나 탑 아니면 그 비슷한 형상으로 높이 솟은 지형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보통 이러한 장보도에서 가리킨다고 하면 그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말한다고·
신시라면 그림자는 대략 남동쪽 방향으로 향할 테고 혹여 진법이나 기관장치가 되어 있다면 그 시간에 그림자가 져야만 입구가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러면 묘가 어디에 있든 어쨌든 볕이 잘 드는 위치에 그리고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그러니 북쪽 능선 위의 어딘가· 일단은 그 신묘부터 찾아봐야지·”
“오우·”
겨우 여섯 글자에 담긴 정보량이었다·
듣고 나니 어쩐지 진짜 보물찾기 같은? 어떤 모험? 왜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러한 본능을 건드린다고 할까·
청의 고향 땅에서 별거 아닌 행사더라도 보물찾기라고 하면 괜스레 ‘보물 다 뒤졌다 내가 다 찾는다’ 하는 마음이 들지 않던가·
그러니 청도 두근두근·
어쩐지 재미있을 것도 같고?
···라고 생각했지만 음 되게 넓다·
생각해보니 좁은 공간에 경품을 밀도 있게 쌓아놓은 그런 행사가 아니지 않던가·
산은 넓다·
거기에 아래서는 나무가 가리고 사실 나무 아니더라도 각도 때문에 위쪽으로 뭐가 솟았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높게 솟은 봉우리는 죄다 돌덩이로 수목이 없어 탁 트여있으나 그만큼 위에 선 사람이 잘 보인다는 뜻이다·
굳이 몰래 들어와서는 눈에 잘 띄는 헐벗은 돌산 위에 올라가겠는가·
그러니 처음에는 목을 쭉 빼고 능선 위에 뭐가 솟았나 인간을 초월한 시력으로 아주 눈에 불을 켜던 청이었지만·
“오· 장명아· 이거 보여? 목통이라는 건데 황제내경에 따르면 모든 풍을 치료하고 또 부인을 산수까지 살게 한다고 하거든? 특히 여인에게 좋은 보약이기도 하고· 임부에게 달여 마시라고 할 정도로 순하고·”
청은 짧으나마 제대로 배운 의녀다·
귀한 것까지는 몰라도 민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약재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뭐야· 이상하게 생겼어·”
“이게 꽃이거든? 이 안에 이 고치 같은 게 열매인데 그 맛이 캬· 먹어 볼래?”
“응· 응·”
그에 청이 기이하게 벌어진 꽃잎 사이에 애벌레 고치 같은 과실을 꺼낸다·
“자 아·”
“앙· 음? 오엑 퉤 에엑···”
겁도 없이 냉큼 베어문 진장명이 시뻘건 얼굴로 연신 침을 퉤퉤 뱉어놓는다·
청이 그 꼴에 또 신난다고 낄낄거린다·
그에 진장명이 청을 쿵쿵 두들겼다·
“으으 쓴 맛이 안 빠져·”
“그야 맛이 있었으면 과일로 먹었겠지· 약재로 쓸까?”
“자꾸 장난만 치고·”
“자· 이걸로 입 행궈· 스승님도 좀 드실래요? 막 달지는 않아도 먹을 만은 해요·”
언제 땄는지 손에 올려진 것이 온통 자잘한 산나무 열매들이다·
“아니 약초꾼 행세를 하랬더니 왜 진짜 약초를 캐고 앉았어?”
“음· 눈에 보이니까···”
“눈을 땅에다 대고 있으니 약초가 보이는 것이 아니냐· 묘비 찾으라니까?”
“그치만·”
청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저 높이 솟은 돌산을 향해 돌린다·
사실 중원의 돌산이라 하면 삐죽삐죽하니 그냥 보이는 봉우리마다 뾰좃하게 솟는다·
뭐 보이는 것마다 다 묘비처럼 솟았으니 일일히 저기 아닐까요 하고 입으로 떠들다간 입술이 부르트게 생기지 않았던가·
본래 정보의 과잉은 정보의 통제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람은 적은 자료 안에서는 쉽사리 흥미있는 것을 찾아내지만 목록이 끝없이 이어지고 나면 아예 전체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럼 그만한 마공이 잘 보이는 곳에 턱 놓여있을 줄 알았냐? 그랬으면 누군가 진작 찾아서 혈사가 벌어졌겠지 장보도가 온 천하에 여기 살중살이 있다고 떠들 때까지 온전히 남아있겠어?”
그에 청이 울상을 짓는다·
“뭐예요 그럼 흡정마공 비급이 그 전에 털려서 아예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녜요?”
“크흠· 이것아· 이게 다 세상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 이런 고생이 다 공덕이 되고 나아가 세상을 더 이롭게 하는 일 아니냐·”
다만 천유학의 표정도 밝지는 못하다·
고생길은 훤히 열렸는데 실제로 노산에 와서 보니 이거 생각보다 더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다시 어디어디 그럴듯한 지형이 좀 솟았나 점심은 주먹밥 우물거리며 대충 때우고 또 온종일 산을 헤매면서·
그러다 보니 하늘이 어둑하니 아직 해가 떨어질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위가 깜깜해지는 것이다·
까맣게 흐린 먹구름이 보아하니 제대로 비를 쏟아낼 준비를 하는 모양·
“오늘은 일단 돌아가자꾸나· 아직 깊숙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궂은 비바람 맞아가며 고생까지 할 필요가 있냐· 오늘은 일단 이만 하고 돌아가고·”
본래 계획은 산에서 야숙하며 비급을 찾는 것이었지만 당장 첫 번째 능선을 살펴보고 나니 벌써 유시 경이 되어가지 않나·
그러니 산에서 먹고 자며 수색하는 일은 본격적으로 저 깊은 곳에 들어가서 하자고·
산에 들었다가 나오는 시간이며 그러다 이목을 끌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고 나서야 시작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 약초꾼이나 산꾼들에게 지리를 좀 물어보고 들어가자꾸나 내 생각했던 것보다 산세가 고약하구나·”
“음·”
그에 청의 표정이 미묘하다·
천유학의 표정이 팍 썩었다·
“뭐야? 어째 불퉁해?”
“아니 되게 전문적인 보물 사냥꾼 같으셨는데 생각보다 별 대책이 없으셨구나 하고·”
“헹 장보도란 것이 뭐 살면서 몇 번이나 마주치는 일인 줄 알어? 이 정도면 충분히 전문가지· 왜 그럼 비 맞으며 야숙하면서 계속 찾으랴?”
“헤헤· 그건 아니구요· 아 빗방울· 쏟아붇기 전에 가자구요· 음· 장명아 너 여기 망태기 안에 들어갈 수 있나? 쪼끄마니까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빨리 가서 씻고 저녁 먹으려고· 꼬맹이는 짧은 만큼 다리도 짧으니까·”
“나 다리 안 짧아· 다들 몸통에 비해서 엄청 긴 거라고 했어·”
“절대적인 길이를 말하는 거지· 다리 긴 뱁새 다리는 길어도 짧은 거고· 황새쯤 되면 다리가 짧아도 긴 거고·”
그에 진장명의 이마에 힘줄이 빠직·
어째 진장명이 상상하던 여행의 그림이 아니다·
뭔가 그때처럼 애틋하기는커녕 온종일 짓궂게 놀려대기만 하고 있으니·
청이 그 표정에 또 좋다고 킬킬거리다가 돌연 무릎을 접어 어깨를 탁 붙든다·
“온종일 산 헤매느라 힘들지? 원래 산이란 게 은근히 체력이 빠진다? 나나 스승님이나 원래 야숙이 익숙한 사람들이지만 우리 장명이는 아니니까· 무리할 필요 없어·”
“···응·”
서운함이 사르르 녹는 상냥한 목소리·
완전 반칙이었다·
알고도 넘어갈 수밖에 없으니 반칙이다·
“자· 일단 들어가 볼래? 오· 뭐야 진짜로 쏙 들어가네? 안 불편해?”
“응· 의외로 편해·”
“좀 흔들리려나 모르겠네· 너무 흔들린다 싶으면 말하고· 물론 그런다고 멈추지는 않을 거지만·”
“···?”
“앗 빗방울! 스승님 빨리 가요· 아주 왕방울이 떨어지는데요·”
그에 천유학이 피식 웃으며 달려나간다·
현역 신투와 예비 신투가 작정하고 달려나가니 그 속도가 사뭇 매섭다·
사실 청은 예비 신투 이전에도 경공으로 이미 일절을 이뤘다고 서문수린에게 인정을 받은 달리기의 달인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지리 몰라요인 청이라서 그냥 천유학의 등을 따라 달려 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수목 바깥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휘이이 큰비 내리기 전의 습기 가득한 바람에 아직은 푸른 논밭에 파도가 친다·
좌우로 밤바다 같은 논밭에 두렁을 밟고 내달리는 기분이 늦여름답지 않게 시원하여 저도 모르게 미소가 서린다·
구름 끼어 어둑한 사위 저편에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꿀꺽 갑자기 허기가 훅 밀려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녁 때가 지났구나?
아씨· 근데 요새화한 촌동네 같은데 음·
저런 데는 외지인에게 워낙 야박하고 또 경계심도 많아서 잘 열어주지도 않고·
또 열어준다고 해도 요리점도 없고 중원식 집밥이라고 해봐야 고봉밥에 무친 야채 절인 야채 기름에 데운 야채 뿐 은자 주면 닭이라도 몇 마리 잡아주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좀 아쉽단 말이지·
어느새 마을 입구가 코앞이다·
건물을 방벽처럼 두르고 그 사이에 커다란 문을 달아놓은 외진 동네 특유의 요새 마을이다·
청이 진장명을 내려놓으려다가 등 뒤의 쌕쌕 깊고 고른 숨소리에 그냥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그를 눈치챈 천유학이 앞으로 나서서 사람을 불러 본다·
“크흠 이보시오 안 계시오?”
그러자 부스럭·
나오라는 사람은 안 나오고 괜히 진장명이 잠에서 깨고 만다·
“뭐야 깼어?”
“응· 벌써 다 왔어?”
“다 온 건 아니고· 자 봐봐· 어쩐지 익숙한 풍경 아니냐?”
그에 꼼질꼼질 등판을 꾹꾹 누르는 촉감이 전해진다·
망태기 너머로 등과 등을 맞대고 있던 진장명이 몸을 돌리는 것이다·
“아·”
일전에 장명이랑 그 살수 새끼들이 삑삑 좆같은 피리 불면서 쫒아오던 때에도 어찌 따돌리고 나와 이런 촌락을 마주했었다·
그때는 귀신 흉내를 내고 나름 거하게 한 끼 얻어먹었었는데·
“찬밥이긴 해도 참 맛있었는데· 그치?”
“응·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
“이야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야? 시간 참 빠르다 빨라·”
맨날 가난해서 만두빵에다 건더기 없는 탕국을 적셔먹던 떠돌이가 이제는 금은이 넘치는 부자가 되고 말았단 말이지·
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되게 옛날이다·
뭐 하나 그때와 같은 게 없네·
장명이 키 말고는·
청이 잠시 추억에 잠긴 때였다·
“뭐야 약초꾼들이냐?”
마을의 대문? 성문? 방벽문? 뭐라 부르기 참으로 애매한 그 구조물 위로 사내의 얼굴이 불쑥 솟아난다·
그런데 악업의 상태가?
청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천유학이 헤헤 하고 잡상인 때처럼 간사한 목소리를 낸다·
“지나가던 중에 날은 저물고 비구름은 짙다 보니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들렀습니다·”
“거 망태기가 묵직해 보이는데· 노산에 다녀오는 길이냐? 그래 일단 들어와 봐·”
뭐지? 말이 좀 짧지 않나?
아무리 촌구석이고 외인에게 불친절해도 그렇지 초면부터 이리 띠껍게 나온다고?
예절 주입은 핵분열이 최고인데 이참에 한 발 날려줘 말아?
청이 속으로 갈등하는 사이 끼이익 나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린다·
그리고 드러나는 사내의 몸통·
여기저기 튄 것이 아직 싱싱한 선혈으로 지저분한 복장을 하고서는 이쪽을 향해 척 칼을 겨눈다·
그리고는 비열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안 그래도 쓸만한 산꾼을 찾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제발로 찾아와 주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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