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8
노인이 보여준 한 수였다·
그 할아버지가 그 무천대제인가?
머리속에 박힌 것이 초식 한 줄 뿐이 아니다·
독고구검은 자유수련점을 사용할 수 없다·
대신 다른 구대문파의 절검벽을 통해 초식을 하나씩 채울 때마다 일 성씩 성취가 오른다·
그리고 아홉개 전부 모아 구 성을 찍고 나면 특별한 임무로 십 성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정보였다·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정보였다·
이런 게 머리에 들어있는 만큼 불쾌한 일이 또 있을까·
무공창 또 너지?
아주 씨발 것 같으니·
그런데 뇌 파먹는 괴물 상태창에게 당한 것 치고는 엄청나게 더러운 기분은 아니었다·
도중에 뭔가· 뭔가? 뭔가몬가?
대단히 좋은 기회가 있었던 것 같은?
근데 누군가 방해했던 것 같은?
있었던? 그런데 모르겠는?
사실 청은 입마의 문을 활짝 열고 두 발짝 정도 들어갔다 되돌아나왔다·
입마!
초절정을 지난 마인들이 화경의 경지 대신에 뛰어드는 일종의 개구멍이었다·
화경의 벽을 넘기보다는 훨씬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부작용이 좀 심했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살인 충동과 가학 성벽 그리고 식인 애호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청의 현재 상태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셈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입마에 경지에 들면 아무래도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려 마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후에 다음 경지에 들 때까지 계속·
마인이 벽을 넘어 현경에 들면 그제서야 정신줄 잡고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를 탈마라고 했다·
다만 무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탈마의 복귀자는 몇 명 존재하지 않았다·
벽을 개구멍으로 쉽게 넘어버린 놈이다·
그래놓고는 더 높은 벽을 넘어야 하다보니 정상적으로 화경에 오른 무인들보다 몇 배나 더 고생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어쨌거나 영영 마인의 구렁텅이에 빠질 뻔했던 청이 되돌아왔다·
위대한 무천대제 선배님의 위엄 넘치는 령도 덕분이었다·
안타깝게도 청은 기억이 없었다·
사람은 본래 강한 충격을 받으면 회복을 위해 기억을 지우기도 했다·
필살기 ‘없던 일로 하지 않을래?’ 였다·
온 우주가 적대하는 체험이란 연약하고 가련하여 벌레 한 마리 잡지 못할수도 있었던 청의 정신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을 진작에 초월했다·
어쨌거나 기억이 없으면 모른다·
청은 모르는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억지로 붙잡으면 생각이 나지 않는 법·
자연스럽게 놔 두면 떠오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 자리에 누우면 퍼뜩 떠올라 풉풉 웃어버리고 마는 아저씨들의 고오급 농담처럼·
청이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는 일행들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날려주었다·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팽대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괜찮은 게 맞나? 괜찮은 것 치고는 피를 좀 많이 쏟았는데·”
“내가?”
팽대산이 대답 대신 한쪽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 시꺼먼 피 웅덩이가 있었다·
사람에서 나왔다기에는 비범한 양이었다·
보통 저만큼 피를 토하면 죽지 않나?
청이 부정했다·
“뭐지? 내 피 아냐!”
“···방금 토하지 않았나·”
“으잉 제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등까지 두들겨 달라더니만·”
“그런가?”
청이 피 묻은 소매를 슬쩍 등 뒤로 감췄다·
“좀 진지할 수 없나? 혹시 모르니 내기를 좀 돌려 기혈을 좀 살펴보고·”
청이 얌전히 팽대산의 말대로 따랐다·
단전에 넘칠 지경으로 가득 찬 내기가 부드럽게 전신 혈도를 타고 세맥을 휘돌며 휘돌았다·
이전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고 해야 하나·
내기가 타고 도는 속도가 이전보다 빨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흐름의 제어가 더 수월해졌다·
이전보다 한 방에 보다 많은 내공을 때려박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 이거 되게 좋아졌는데?”
“좋아졌다고?”
“피 토하면 이렇게 되나? 한 번 더 토하면 막 초절정 가는 거 아냐? 이게 바로 깨달음인가?”
청이 호들갑을 떨었다·
팽대산은 사람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게 되면 아예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했다·
그때 청이 유하 진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문 어르신· 저거 무천대제 선배님이 남긴 흔적이요· 천변만화라고 한대요·”
유하 진인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천변만화? 그게 무슨 말이더냐?”
“저 초식이요· 무공 이름은 독고구검이라”
“홀로 외로이 구하고자 하는 검! 이럴 수가! 세상에! 검우! 그 아름다운 글귀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어찌 그 거칠고 방정맞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리도 심금을 울리는지! 그럼 그것이 무천대···제···· 음·”
남궁신재가 끼어들었다·
흉흉한 눈빛으로 침을 토하며 방정을 떨다가 유하 진인의 매서운 눈빛을 받고서는 스르륵 진중한 청년의 흉내를 냈다·
그런데? 어째? 중간에 필요 없는 사족이?
분명 내 취급이 좀 박한 것 같았는데?
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궁신재의 대사를 되씹어 보는데 유하 진인이 재촉을 했다·
“막내 사매· 자세히 말해보시게나·”
“그 무슨 환상 같은 걸 봤는데요· 어떤 할아버지가 검으로 변해서? 검환을 막막 이렇게·”
“신검합일! 검환! 과연 무천대···제···· 음·”
“자네는! 좀! 가만히 있질! 못하겠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남궁신재가 다시 공손해졌다·
다만 그 공손함은 청과는 조금 달랐다·
유하 진인의 강력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강호의 손꼽히는 검객에 대한 예의였다·
유하 진인은 남궁신재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진정한 검객’이었으므로·
남궁신재가 쪼그라든 사이 청이 유하 진인에게 환상 속에서 본 노인의 한 수를 묘사했다·
그것이 약속이었으니까·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말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노력도 없이 날로 먹은 한 수·
무천대제가 화산파에 준 심득이었다·
내 것도 아닌데 사이 좋게 노나먹어야지·
“그분의 검흔을 읽은 게로구나! 선재야! 선재로다! 어디 한 번 펼쳐볼 수도 있는가?”
“물론이죠!”
청이 기세등등하게 검을 뽑았다·
그리고 뇌와 몸이 기억하는 대로-
기억하는 대로····
청이 애꿎은 월광검(8호)만 노려보았다·
“어· 음····”
“왜 그러는가? 막내 사매·”
“검이랑 합체하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강기도 못 쓰는데···”
모처럼 익힌 초식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무천대제가 말년에 터득한 최상승의 강기공을 꼴랑 절정 후기의 무인이 재현할 수는 없었다·
청의 어깨가 축 쳐졌다·
“아····”
유하 진인이 탄식을 내뱉었다·
검흔은 읽었으나 경지가 아직 절정 후기밖에 되지 않으니 재현하지 못할 수밖에는·
“신검합일의 묘리를 알기엔 막내 사매의 경험이 아직 모자란 게로구나·”
그러나 유하 진인이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앞으로 막내 사매의 경지가 오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이란다· 분명 벽을 깨는 데에도 무천대제 선배님의 심득이 도움이 되겠지·”
“그럴까요?”
“물론이란다·”
유하 진인의 마음속에서 청에 대한 평가가 수직으로 치솟았다·
든든한 뒷배경을 가진 기대주에서 다음 세대 천하제일인을 노려볼 만한 잠룡이요 신검으로·
그리고 유력자와의 관계 쌓기는 중화 인민이 가지는 민족 특유의 본능이었다·
“사혈을 토하느라 심신이 많이 지쳤겠구나· 푹 쉬고 저녁에는 한 상 크게 차려 기운을 보하도록 하자꾸나· 어떠냐?”
밥!
청의 눈이 번뜩였다·
—-
청은 아주 신명 나는 일주일을 보냈다·
무려 화산파 장문인의 진심 접대였다·
어찌나 끼고도는지 화산파 장문인이 어디서 늘그막에 딸이라도 발견해 데려온 것이 아니냐는 뒷말이 돌 정도였다·
화산파에는 문도들 외에도 수많은 손님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한 주 동안 성대하게 열린 연회 급의 만찬에는 당연히 그 손님들 역시 번갈아가며 자리를 차지했다·
그 결과 대모 서문수린의 기명제자가 공식적으로 참여한 무림 행사 비슷하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유하 진인은 진심 접대를 위해 어지간히 주접을 떨었는데 개중에 정점을 꼽으라면 이랬다·
‘그야말로 월녀의 화신과도 같으니 머지않은 미래에 신검이라 불릴 천하의 재목이로다!’
무림에 별호가 생기는 방법은 다양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대단히 권위있는 누군가의 보증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유하 진인은 너무 주접을 떨었다·
화산파에 방문했던 손님들이 무려 그 대모의 기명제자를 보고 별호로 착각해 머리에 박아둘 정도로·
월아신검!
강호인의 특성 중에 나만 아는 사실에 입이 근질근질하여 남에게 말하기를 참을 수 없는 버릇이 있었다·
후에 화산파를 떠난 손님들은 화산 장문인의 주접과 백도 정파에 나타난 신성과 같은 여협에 대해 떠들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백도 정파의 여협이 사람 죽이기를 취미로 삼아 마공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청은 즐거웠고 즐거움에는 언제나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우리 막내 사매는 이제 어찌할 생각이로고?”
어느새 막내 사제에서부터 ‘우리’ 막내 사매로 승격한 청이었다·
“신녀문으로 돌아가 보려구요· 사부님 뵌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추울 때쯤 돌아가겠다고 말씀도 드렸거든요·”
“그래· 언제든지 다시 방문해 주려무나· 늙은 사형이 적적하니 세상 이야기라도 나누면 좋을 것이야·”
무려 화산 장문인이 직접 나선 배웅이었다·
다른 구파의 장문인들이 보았다면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어찌 저렇게 체통 모르고 속물처럼 구느냐고·
그러나 본래 유하 진인은 원래 유별나도록 세속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의 화산파의 성세가 바로 그러한 점에서 나왔으니 유하 진인은 떳떳했다·
“창빈이도 잘 있고· 다음에 또 언젠가 봐·”
“서문 소저도 잘 지내시오십시오····”
창빈이 장문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항렬의 대사형인 창빈은 한동안 화산파에서 다시 수련에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만 세가로 돌아가야겠군·”
“그렇지· 이제 슬슬 아버님께서도 화가 누그러지렸을테니·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
“뭐야 산! 검우! 날 버리고 가겠다는 거야?”
팽대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옥기린이라는 별호를 수치로 여겼던 데에는 자신이 실력으로 후기지수 중 단연 제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이 개박살이 났다·
이제 팽대산의 마음속에는 수련에 대한 다음 경지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여자한테는 지고 싶지가 않다·
청이 가끔 말하는 ‘너 나보다 약하잖아·’라는 도발에 어째서인지 참을 수 없는 울화가 끓어오르는 것이다·
어쩐지 다시 속이 끓어오르는 느낌에 팽대산이 애써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나중에 하북에 들를 일이 있거든· 세가에 한 번 들르도록· 맛난 것은 아주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여줄 테니·”
팽대산이 품에서 목함을 꺼내 척척 만지더니 한 조각 꺼내 청에게 내밀었다·
“오우·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
“도대체 그 말뽄새는···· 아니다·”
청이 팽대산이 건넨 목패를 받았다·
팽대산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나무토막이었다·
“팽가의 손님이라는 증명패다· 혹여 내가 부재중이더라도 세가에서 손님으로 잘 맞이해 줄 거다·”
“그래 그렇군! 검우· 내 것도 받으시오· 안휘에 들르거든 이 검우의 본가에도 들러 보시오· 검객이라면 마땅히 천하제일검가에 한 번쯤 방문해야 하는 것이지·”
청은 손패 두 개를 받았다·
뭐 대충 명함 같은 건가 보다· 하고·
얼추 들어맞는 개념이기는 했다·
다만 손패에도 급이 있다·
청이 받아든 패가 귀빈에게나 주어지는 최고급 특상패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렇게 일행이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아쉬울 일은 아니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겠지·
아니면 집에 찾아와도 된다고 했고·
아무리 즐거운 놀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나서 집으로 향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이젠 돌아갈 집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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