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6
“그래서 이제 어쩔텐가? 어르신의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들이키겠나?”
“···?”
뭔 소리야? 권주는 뭐고 벌주는 또 뭐야?
술? 술인가? 벌술?
작금 무림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었다·
지금 썼다가는 할아버지 냄새 난다고 욕먹기 십상이라서·
혹시 무천대제 시대 살다 오셨어요? 하고·
청이 눈을 끔벅거렸다·
누구나 보면 아는 표정이었다·
사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얌전히 따라 올 테냐?”
“그냥 얌전히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아니면 맞고 가야지·”
에이씨 우리 사부님만도 못한 게 까부네·
하지만 청은 서문수린이 아니었다·
그냥 절정 후기 무인에 불과했다·
도시 무관마다 한둘씩 있으니 한 도시에서만 여럿이 사이좋은 흔한 고수였다·
절정 서러워서 못 살겠다 진짜·
하지만 초절정은 닿지도 않고·
초절정 임무는 뭐가 꼬였는지 뜨지도 않는다·
끝판왕을 먼저 만나서 그런가?
그도 아니면 이쪽 사람들 방식으로 초절정에 올라야 하는데 그것도 뭐 알 수가 없네·
“그럼 혹시 따라갔다가 다시 나올 수도 있나요?”
“본좌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있으면 천 점 찍는 놈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청이 한번 더 확인했다·
“그런데 시체로 나온다던가 어디 불구가 된다던가 하는 식으로 속이는 건 아니죠?”
“하· 지금· 본좌가 그런 얄팍한 수작이나 부리는 것 같다는 소린가? 감히 본좌가 존귀한 본좌의 이름을 걸었음에도?”
“아니 의심한다기보다억·”
어느새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청이 당황했다·
청의 배에 사내의 주먹이 거의 팔목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청이 허리가 굽은 채로 붕 날았다·
아찔한 비행이 나무에 부딪쳐 끝을 고했다·
청이 배를 붙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꺼헉 꺽· 끄흑···!”
숨이 숨이 안 쉬어져····
청이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바짝 죄는 가슴에 찌그러진 폐가 펴질 줄을 몰랐다·
머리를 가득 메우는 통증·
숨이 턱 막힌다·
아프다· 너무 아파· 배가···!
혈도에 칼날이 타고 흐르는 것만 같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좁은 혈맥을 억지로 찢고 뜯고 물어뜯었다·
그저 아파하는 이외에· 아윽·
사고 자체가 멈춰버리는 끔찍한 고통·
정신이 어지럽다·
세로로 누운 땅에 기둥 두 개가 척 붙었다·
옆으로 붙은 두발이다·
개중 한 짝이 저만치 멀어져갔다·
어 설마·
청이 머리를 감싸쥐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내가 그대로 청의 머리를 걷어찼다·
퍽· 골이 흔들리며 세상이 전원을 내린 마냥 픽 꺼진다·
청의 몸이 재차 허공에 떴다·
청이 온몸으로 추락하는 충격에 정신을 차렸다·
보이는 시야에 온통 붉은 기운이 아른거렸다·
한쪽 눈의 핏줄이 터져 피가 차오른 탓이다·
청이 무얼 해볼 새가 없다·
억센 힘이 머리채를 붙들고 잡아당겼다·
얼굴이 깨어져 부서진 것처럼 아프다·
적의 침투경은 여전히 속을 찢었다·
세상이 붉은데·
두피가 저 뜯겨나간다고 계속 통증으로 보챘다·
파들파들 떠는 청의 귓가로 사내의 말이 파고들었다·
즐거움이 듬뿍 배인 목소리였다·
“호신경? 고작 절정 나부랭이치곤 제법 능숙히 다루지 않나? 눈깔 하나 정도는 터뜨릴 생각이었다만·”
“왜 왜?”
“피리 부는 데는 입과 손이면 충분하잖나·”
청이 이를 악물었다·
천살의 외로운 별이 지켜보는 아이다·
고통은 이내 악성으로 변해 뼈에 스민다·
이 새끼 절대로 가만 안 둬·
씨발 새끼· 절대로 곱게 안 죽일 거야·
청이 분노할 자격이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청은 나쁜 놈만 골라서 가지고 놀았으니까·
선업이 이제 천 사백 오십 점을 넘긴 청이었다·
곧 천 오백 점의 교환을 앞두고 있을 정도니 스스로 천하제일 착한 놈이라 자부하는 청이었다·
게다가 고수가 되고 나서 오랜만에 느끼는 무력함이었다·
무력함이 분노를 부채질했다·
무력감과 분노가 어우러져 흉중 깊숙한 기저 어딘가의 전원 단추를 눌렀다·
뭐지? 분노조절장애라도 있는 새낀가?
멀쩡히 대화하는데 선빵을 쳐?
그것도 나보다 더 고수면서·
치사한 새끼 두고 보자· 내가 얼마나 진짜로 치사한 게 뭔지 보여줘야지·
속마음과는 달리 청이 미소를 그렸다·
벌써 퉁퉁 부어오른 얼굴의 왼편과 더불어 비굴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헤헤 그냥 말로 하셔도 되는데····”
천살고성을 타고난 자의 두려움이었다·
그저 이성 없이 피와 고통만 탐하는 존재가 아니라 냉정히 때를 노릴 줄도 아는 괴물이기 때문에·
사내가 편안한 말년을 맞이하고 싶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청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 정파의 여협이란 자가 천살을 타고났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내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계집은 패야 말을 듣는다니까·”
무슨 고대 시대쯤 살다 오셨나?
아주 주둥이를 잘라버려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원시 고대 미개한 중국이었으니 당연히 이 새끼도 미개한 새끼가 맞다·
청이 계속 바보처럼 웃었다·
“헤헤 말만 잘 들으면 팰 일도 없겠죠?”
그러자 사내는 오히려 실망한 표정이었다·
“정파의 뻣뻣한 여협이라더니· 좀 재미있나 싶더니 그래봐야 결국 계집년에 불과한 것을· 쯧· 되었다· 가져가라·”
청년이 청을 내팽개치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뒤이어 흑의인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뒷모습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
끌려온 청의 몰골이 영 엉망이었다·
얼굴 절반이 부어서 찌그러진 눈에 온통 피가 차올라 시뻘겋다·
새 도복은 바닥을 나뒹굴어 온통 흙투성이였으니 지승주가 혀를 차는 것도 당연했다·
“쯧·”
생글생글 비굴한 안색이나 지승주는 눈 앞의 소녀가 자신과 동류임을 직감했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인간·
동류를 접한 자의 날카로운 육감이었다·
얌전히 협조를 구해야 하는 판이다·
속으로 이를 북북 갈고 있으면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 아닌가·
애초에 함월 그 노괴가 실패하지만 않았어도·
지승주가 아쉬움을 꾹 눌러담았다·
그렇다고 감히 지존을 탓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이쪽이라도 당근을 좀 던져야겠지 하고·
“너무 악감정을 갖지는 마십시오· 여협이 한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청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녕? 꼬맹아· 사람을 처음 보면 인사부터 해야지? 난 서문청이라고 해! 우리 쪼그만한 아해는 대체 누구지? 아· 혹시 너도 고수야? 혹시 너도 멀쩡히 대화하다가 주먹을 뻗는 병이 있지는 않지?”
웃는 낯이나 말은 사납다·
속을 감추는 게 아니었나?
그러나 지승주는 무표정했다·
“소인은 지승주라고 합니다· 부족하나마 신교의 비각주를 맡고 있지요·”
“비각주? 그게 높은 자린가?”
청이 싱글벙글 쪼그만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대낮에 납치당해서 제일 먼저 끌고 온 데가 이 꼬맹이 앞이라니·
중요한 인물이려나?
죽이면 그놈이 열을 좀 받을까?
일단은 기억해 둬야지·
지금은 그놈이 주변에 있으니까·
청이 무표정한 지승주를 보여 생각했다·
머리 위의 숫자는 이제 별로 확인할 필요를 못 느꼈다·
심장과 함께 뛰는 이 깊은 빡침을 먼저 정리해야 내가 살겠다 싶었으니까·
“이렇게 모시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저희도 저희 나름의 사정이 있던지라·”
“뭐· 사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왜 그럼 이야기나 한 번 들어 보자·”
“지금 말씀드리기엔 영 때가 좋지 않군요·”
지승주가 탁자 위에 있던 사발을 내밀었다·
“통증이 심하실 터인데 드시면 좀 나아지실 겁니다·”
“이게 뭔데?”
“석청에 앵속 즙과 몽혼약을 탄 겁니다· 드시고 한숨 좀 길게 주무시고 나면 많이 나아지실 겁니다·”
석청은 꿀이고 몽혼약이란 수면제를 말했다·
마약에 수면제 든 꿀물이란 소리였다·
그런 약을 대뜸 마시라니 이 무슨 미친 소리냐 하겠지만 중원에서 앵속 즙이 진통 해열 지사의 효과를 가진 만능약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딱히 악의를 가지고 탄 약재가 아니다·
“그래? 그럼 뭐· 성의를 봐서·”
청이 꿀물을 시원스럽게 들이켰다·
따뜻하고 단 꿀물이 속에 들어가니 그래도 좀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차피 앵속이라봐야 몸에 해로울 것도 없고 몽혼약은 이미 여러 번 먹어 봐서 안 듣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럴 때는 체질이 좀 아쉽기도 했다·
얼굴 한 편이 심장 박동 따라 쿵쿵 뛰며 욱씬거린다·
수면제 마시고 떡실신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이후에 청이 순순히 마차에 올랐다·
창문이라곤 철격자 바깥으로 두꺼운 종이를 붙여 어설프게 빛이 새는 정도가 끝이었다·
마차 안에 오르니 밖에서 철컥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났다·
수면실로 꾸며놓은 마차 안은 제법 아늑하다고 할 만 했다·
두꺼운 종이에서 새는 빛은 거슬리지 않고 좌석 없이 몇 겹이나 쌓은 누비이불에 올린 발이 발목까지 파고들었다·
청이 넓직한 마차 안에 몸을 눕혔다·
마차가 출발한 듯 조금 흔들거렸지만 딱히 진동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앵속의 효과가 밀려와 안면의 통증도 살그머니 가라앉았다·
폭 파묻히는 침구에 누워있으니 마치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청이 누운 채로 오랜만에 머리를 굴렸다·
그 곧 자연경 타령의 개새끼를 빼면 오히려 대우가 나쁘지 않았다·
나쁘기는커녕 정중한 편이라고 할까·
청이 빼앗긴 복신적을 떠올렸다·
애초에 그 피리를 찾던 놈들이 마교 놈들이고 또 그 꼬맹이가 스스로 신교 어쩌고 했으니 그 정체는 이제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그 피리가 뭔가에 필요한데 불어서 잠금 해제 기능 때문에 그 주인인 나한테까지 볼일이 있는 거겠지·
개 같은 새끼들· 내가 절대 들어주나 봐라·
애초에 나쁜 놈들 부탁이란 들어줄 생각조차 없던 청이 혼자 씩씩거렸다·
사실 마교가 괜히 원망을 샀을 뿐 애초에 협조를 구하기엔 글러먹은 상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한을 샀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지만 한번 원한을 사고 나면 물불 안 가리고 상대에게 엿을 먹여줘야 하는 청이었다·
경지 미상의 끝판왕에게도 대들지 않았던가·
겨우 화경에 있는 새끼 주제에 감히·
마교? 씨발 놈들 내가 어떻게 하나 보자·
청의 눈동자에서 새는 흉흉한 별빛이 깜깜한 마차 안을 붉게 비췄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연재 첫 날짜가 8월 3일이었으니 오늘이 딱 한 달 째 되는 날이군요·
일만 선작 감사합니다· 한 달 만에 될 것이라고는 대충 생각 했었읍니다·
작가놈도 대충 지표를 읽으며 기대하였기 때문에·
사실 매일같이 오늘은 한 편만 올리고 쉬어야지 하다가도 여러분들의 사랑 연참으로 대체되었다·
항상 Mad Blue을 사랑해 주신 zakuti 귀하 앞으로도 감사하십시오· and i also 정통무협조아
늘 감사드립니다·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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