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6
설가놈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왜 못하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딱 그런 독백이 있을 법한 표정이었다·
“별로 간절하지 않은가 보군? 하지만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라도 일단 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것이 아닌가·”
중원 말로 과하지욕이라 하는 고사다·
가랑이 사이로 기는 치욕이라는 뜻이었다·
초한 시대의 대장군 겸 중화 최고의 장군으로 꼽히는 한신의 흑역사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까지 도모한 후일을 결국 이루기는 했지만 이후의 말년은 매우 비참했다·
“죽는 것보단 낫지 않나? 자네가 취향일 만한 호색한 마두가 몇 있는데·”
하아· 청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됐고· 사람한테는 존엄이라는 게 있거든요?”
설가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멍한 눈빛과 회한 어린 주름이 과거 어딘가를 더듬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사과했다·
“미안하군· 자네 말대로일세· 이 꼴로 살려고 살다 보니 생각지 못했어·”
“아· 그래도 친한 할아범은 있어요· 자전마군이라고 욕쟁이 할아버진데·”
“그 불쌍한 영감탱이 말인가?”
설가놈이 청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긴· 그럴 만하군·”
“방금 되게 기분이 나빴는데?”
“자전마군의 딸이 자네 연치쯤 해서 죽었다고 들었지· 다만 그 싸가지가 아주 삼 대 악녀와 비견될 정도였던가· 아마 그래서 자네가 남 같지 않게 느껴졌을 거야·”
“이상하다? 왜 기분이 계속 나쁘지? 이상하게 손이 근질거리는걸·”
청이 하얗게 빛나는 창백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설가놈이 입을 다물었다·
“나도 알거든요? 나도 귀 있는데 할아범 노망났단 이야기 진즉 들었지· 그래도 뭐든 말을 해 봐야 아는 거 아녜요? 정해놓고 저 인간은 안 될 거야 해 봐야 뭐·”
“하지만 자전마군은 나서 지금까지 온 평생을 독실한 마교인으로 산 아주 지독한 마교도야· 자네가 무슨 재롱을 부리더라도 도울 것 같진 않군·”
청이 손을 휘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됐고· 대충 죽이고 불태우고 훔치는 쪽으로만 알아봐 줄래요? 아까 말하는 거 보니까 아주 설가놈이야말로 제대로 전문가더만·”
설가놈이 픽 웃었다·
“물론이네· 앉으나 깨나 세상 망했으면 하고 구상했는데 이야말로 전문가의 소양 아닌가·”
“오우· 든든하다! 총명하다!”
“다리 불편한 척에 살업에 나서서 철저하게 소수마공의 흔적만 남긴 것을 보아하니 자네도 퍽 용의주도한 인물이다만·”
“내가 잘나서 그래요· 설가놈도 잘났지만·”
대마두 연놈들이 서로 금칠을 해주며 시시덕거리는 장면이었다·
“신녀제자라면 검을 쓰겠고· 혹시 도나 창을 다룰 줄 아나? 능하지 않더라도 남는 흔적을 흉내 낼 정도만 되면 될걸세·”
“그야 당연하지·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뭐든 말만 해요·”
설가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내궁부 태평단부터 불태우는 게 좋겠군 그러니까···”
—-
해 뜨기 전에 돌아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나니 어느덧 점심때였다·
편안한 숙면으로 꿀잠을 잔 청의 심신이 아주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와 대정선공 대체 뭐야요· 효과 쥑이네·
근데 음· 꼭 좋지만은 않은걸·
원래 잠에서 깨면 혼미한 정신으로 팔다리에 힘은 쭉 빠지고 목은 말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면 목마름을 꾹 참고 침대 위에서 비비적거리며 남은 잠을 즐기는 맛이 있었다·
이렇게 정신이 번쩍 들어버리니 인생의 절반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백분의 일쯤 손해 보는 기분이랄까·
청이 그렇게 말똥말똥한 눈으로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잠기운이 있으나 없으나 결국 뭉개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부술 듯이 쳐들어오는 인물이 한 명·
청의 하찮디하찮은 사저 호소인이었다·
“사매! 밥 먹으러 갈 거지!”
보통 잠에서 깨자마자 밥 먹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보통은 눈 뜨자마자 밥 찾는 사람이 없어서·
하지만 청하고 사흘만 같이 살아보면 누구나 인사 대신 밥 먹느냐고 물어보게 될 것이다·
눈 뜨자마자 밥 찾는 청이 있었으니까·
견포희가 문을 닫고 들어와 경쾌하게 걸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위아래 내의와 속궁장 바깥궁장을 챙겨 끌어안고서 이번엔 침대로 향했다·
청이 익숙한 듯 팔 벌리고 다리 들고 일련의 꿈틀거림으로 화답했다·
견포희가 합을 맞춰 의복을 씌웠다·
자연스러운 행동과 능숙한 실력이었다·
“오늘 밥은 뭐에요?”
“방납장건어에 가지장국인데?”
“아 안돼····”
중국 요리란 몇몇을 제외하면 그냥 조리법과 재료의 나열이다·
식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청이 이럴 때만 또 영민하게 굴었다·
방납장건어는 졸여 만든 진득한 소스로 무친 말린 생선 익힘이라는 뜻이다·
청이 아는 고향 음식 중에도 이와 일치하는 것이 있어서 그 이름이 코다리조림이라 했다·
청의 눈동자가 가련하게 떨렸다·
“어떻게 이런 현실이 존재할 수가 있지····”
“사매!? 괜찮아!?”
“안 괜찮아요· 오늘 날짜 기록해두라고 해요· 내년부터 환희궁 숙수들 단체 제사상을 차려야 하는 날이니까 갈리고 싶지 않거든·”
“음···· 그러면 나가서 먹을까?”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청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할아범하고 먹으려구요·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견포희의 어깨가 축 처지더니 슬그머니 청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내가 귀찮게 군 거면·”
사실 좀 귀찮긴 하다·
견포희는 막내일 때도 환희궁 모두의 장난감이었고 지금은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전문 용어로 기수 열외라고 했다·
실력도 딸리는 주제에 뒷배로 이대제자 자리를 꿰찼다던가 하는 뒷담이 공공연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견포희의 태움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 아랫것들만 매일이 곡소리였다·
덜떨어진 사저가 처신이라도 잘 했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움의 정도가 심하고 대상을 가리지 않으니 위로는 멸시를 아래로는 멸시와 더불어 두려움을 샀다·
그러니 하루하루 지극정성으로 매달리는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청이 정신줄 회까닥이던 때 견포희의 이러한 처지를 이용해 시녀처럼 부려 먹었다·
뭐 하나 실수하면 정색하고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느니 괜히 혼잣말로 다른 애를 주워다가 이대로 올려놓을 걸 하고 중얼거리며 실망하는 티를 팍팍 내는 식이었다·
결국 이게 다 그 업보였다·
청이 양심 속 삼각형이 마구 돌았다·
거의 둥글어진 삼각형이지만 기본적인 양심 사양이 워낙에 콩알만 한 탓에 조금은 긁히는 지점이 있기는 했다·
“그게 아니라· 저녁은 나가서 같이 먹어요·”
“응! 먹고 저녁 수련도 같이 해!”
아씨 지금 이걸 들이민다고?
하지만 거절하기 난감한 시점이었다·
억지로 고개를 끄덕여주고 나니 해처럼 맑은 표정이 된 견포희가 총총 방을 떠났다·
청이 혼자 남아서 최리옹의 방문을 기다렸다·
꼬르륵·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그런데 할아범 오늘 안 오면 어떡하지?
다행히 청이 점심을 굶는 세상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를 직접 겪게 되지는 않았다·
치사하게 혼자서 점심 먹고 온 최리옹이 차나 한잔하자고 찾아왔던 것이다·
“아니 누구는 지금 쫄쫄 굶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혼자서 밥을 먹고 와요? 할아범 내 그렇게 안 봤는데·”
“기다린다고 미리 약속이라도 잡아놨냐? 아주 개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배고프다는 게 중요한 거지·”
“쯧· 모진 년· 성질머리는 어디서 나왔는지·”
원조 받침대가 툴툴거리며 청을 안아들었다·
원조다운 편안한 탑승감 승대마두감이었다·
—-
식사는 여럿이 하면 더욱 즐겁다·
왜냐하면 요리의 개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어차피 경쟁자들을 제치고 누구보다 빠르게 요리를 해치울 수 있는 청이었다·
중요한 것은 가짓수다·
최리옹은 그런 점에서는 좋은 식사 상대였다·
이 할아범 못 먹고 다니는 사람처럼 순 해골바가지 꼴에 색바랜 낡은 옷이나 입고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수상하게 돈이 많았다·
아니 이럴 거면 돈이 많아서 무슨 소용이야?
그러니 내가 좀 축내도 상관없지 않나?
청이 전투와 같이 장렬한 식사를 해치웠다·
거의 음식에 원수진 사람이었다·
최리옹이 쭉 잔소리를 했지만 어차피 욕쟁이 할아버지 허튼 소리라 별 타격도 없다·
“돼지도 그보단 조신하게 처먹을 것이야·”
청의 식사가 마무리될 쯤 사람을 불러 온갖 후식들을 주문했던 최리옹의 말이었다·
“에이· 그럼 돼지보다 조신하게 처먹으면 뭐 그게 자랑이나 돼요? 어차피 돼지랑 비교하면 어찌 먹어도 자랑거리는 안 되는데·”
“허허· 그놈의 주둥아리·”
“됐고· 할아범· 나는 이대로는 못 살거든요· 제대로 깽판 치고 도망갈 생각인데 딱 정해요· 나야 천마신교야?”
청이 갑자기 훅 치고들어갔다·
최리옹이 크게 움찔했다·
“얘야·”
“사방에는 나쁜 놈들 천지고· 강자존이 뭐야· 자연의 법칙? 그것도 틀린 말이긴 한데 맞다고 쳐도 그래· 사람이 사람 법칙으로 살아야지 짐승 법칙으로 살아요?”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단다· 이제 천마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면 중원을 해방해 천마께서 영도하시는 아래 사해 만민이 평등한 새 세상이 열릴 것이야·”
“그놈이 제일 문제 아닌가? 지존 호소인 그 새끼가 아주 인간말종이던데?”
“그건·”
최리옹이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뻐끔거렸다·
결국 청이 입에 담기도 불쾌한 소리를 꺼낼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 그 말종 새끼가 나 따먹겠다고 벼르고 있는 건 알고 있어요? 선녀공 잔뜩 갖다주면서 익히라고· 나는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 꼴은 안 봐· 진짜로 혀 깨물고 죽을 거야·”
사람은 혀 깨문다고 죽지 않는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연약한 생물로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재수가 없으면 잘린 혀가 말려들어가 기도를 막고 질식사할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청이 알게 무어란 말인가·
그러자 최리옹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하아· 얘야·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단다·”
“뭐가요?”
“지금 존재하시는 현재의 지존과 천마혼을 받아들여 신공을 완성한 미래천마 지존께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시니· 신공을 완성하시고 나면 네게 더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실 게다·”
“그걸 할아범이 어떻게 알아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관심이 사라져? 신공 익히면 뭐 갑자기 남색이라도 밝히게 되나?”
“그건····”
최리옹이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어물거리다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말해줄 수가 없다·”
“진짜야요? 게이 아니 남색가가 된다고?”
청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어지간해서 안 쓰는 서역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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