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모름지기 사나이라면 어떤 치욕을 버텨서라도 해내야 할 큰일이 있는 법이다·
설가놈이 이야기한 과하지욕 한신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했다·
한신은 젊을 때 허세충이라서 항상 큰 칼을 차고 다니며 쎈 척을 했다·
그 꼴이 보기 싫었던 동네 건달 하나가 발을 벌려 길을 가로막고 배를 들이밀며 말했다·
네가 그 칼을 쓸 줄 알면 내 배를 갈라라·
혹시 그냥 멋으로 차고 다니는 거면 특별히 눈 감아 줄 테니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라·
한신은 열불이 치솟았다·
하지만 살인죄로 빨간 줄이 그어지면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결국 공무원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한신이 건달의 다리 사이를 기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가 하면 구천상분의 고사도 있었다·
이는 월나라 왕 구천 그러니까 월녀가 도와준 그 구천의 이야기다·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와 대륙 걸고 전쟁빵을 벌였다 지고 나서 오나라에 포로가 되었다·
구천은 이를 아드득바드득 갈면서도 겉으로는 비굴하고 순종적인 노예처럼 굴었더란다·
심지어 부차가 병이 나자 부차의 똥을 먹고 맛에 문제가 없으니 큰 병 아니라고 손수 진맥까지 해 주었다!
(똥 먹는 진맥은 의외로 정통 의학이다)
이에 감동한 부차가 구천을 놔주었다·
아니면 그냥 똥 먹는 역겨운 놈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기 싫었을 수도 있고·
그 후에 구천은 월녀 만나 월녀검 열화판으로 무장한 군대를 몰아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여기 그러한 치욕을 버텨야 하는 또 한 명의 아름다운 사나이 겸 여인이 있었다·
이름하여 서문청이라 하는 군필 미소녀였다·
한신이 다리를 기고 구천이 똥을 먹은 것은 청이 앞으로 겪어야 아는 수모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내가· 내가···!
청이 손에 들린 병기를 내려다보았다·
길게 뻗은 손잡이와 날렵한 코등이 그리고 유려하게 육중한 칼몸과 그에 새겨진 혈조·
그리고 한 면뿐인 칼날·
청이 치욕으로 몸을 벌벌 떨었다·
내가 반검을 써야 하다니···!
그렇다·
청은 반검을 들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
청의 존엄과 치졸한 복수심 그리고 재미를 위한 숭고한 희생인 것이다·
겸사겸사 마교의 간악한 마수로부터 중원 무림의 평화도 쬐끔 보장하던가 말던가 사실 그 쪽은 별 관심이 없다·
보상으로 자유수련점은 많이 주겠지만····
설가놈놈의 의견이었다·
소수마녀만 분탕을 치면 좀 심심하니까·
마교의 삼 대 외문파 중 하나인 마왕도문에게 죄를 좀 뒤집어씌워 보자는 것이다·
청이 반검을 내려다보았다·
음· 근데· 쪼끔? 마음에 드는 것도 같고·
청의 순수한 근력은 그간의 온갖 무공 수집으로 인해 이제 사람의 수준을 벗어나고 말았다·
중원 아니라 오 대양 육 대륙을 통틀어 가장 힘이 쎈 사람일 것이다·
그런 청에게 검은 너무 가벼웠다고나 할까·
혈영뇌전도법은 특히나 커다란 대도를 쓰는 도법이었다·
중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무기였다·
아무리 관무불가침이라고 해도 이리 커다란 무기를 대놓고 차고 다니기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었다·
국법은 사사로운 무기의 패용을 금지했다·
그리고 또 불편하니까·
쇠의 무게로만 이십 근에 달하는 중병이었다·
크고 무거운 것을 상시 가지고 다녀야 하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하지만 청에게는 부담없이 딱 좋은 무게감이 마음에 들 뿐이었다·
청이 쓰러진 태평단원을 내려다보았다·
순찰에 성실하지 않고 골목에 짱박혀 돗자리 깔고 누운 죄로 영영 일어날 수 없게 돼버린 불행한 악인이었다·
물론 하필 대도를 들고 있던 것이 가장 큰 사인이라 할 것이다·
“니 무기 쩐다? 오늘 밤엔 내가 잘 쓰고 돌려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태평단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청이 서쪽을 가늠했다·
태평단 본채가 대충 저쪽에 있는 파란 지붕 큰 건물이랬지·
—-
천마신교 내궁부 산하 태평단은 천산신시의 치안 유지를 주 업무로 소방 및 세금 그리고 대출 관련 상품을 취급하기도 했다·
다만 천산신시의 치안은 너무 완벽해서 굳이 태평단을 두어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계속 나오기는 했다·
천산신시에서는 근 몇백년 동안 강력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강도 살인 강간 인신매매는 천산신시에서 강력 범죄로 취급하지 않고 그저 당한 놈이 멍청이 부주의한 바보로 여겨졌다·
그러니 천산신시가 끔찍한 범죄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지상의 도원향임은 기록으로 증명되는 명백한 사실이라 하겠다·
설가놈은 결국 흘러들어온 외부인이었다·
그러니 일단 치안대를 불태우고 도시를 혼란에 빠뜨려야 한다는 계책이란 진정 신교도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내용이었다·
원래 하는 일 없는 놈 불태워봐야 뭐하냐고·
다들 눈치보면서 조금씩 하는 강도 살인 강간 인신매매를 눈치 안 보고 하는 정도겠거니·
멍청한 중원인이라면 바로 그것을 혼란이라 한다 하겠지만 신교도들에게는 글쎄·
그런 이유에서 태평단 역시 세상 태평했다·
사실 태평단은 누군가 쳐들어 온다는 발상 그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순찰자들은 밤놀이 한 번 찐하게 할 금액이면 쉽게 우정을 다질 수 있는 모두의 친구들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갑작스러운 야간 근무로 다들 머리가 혼란스럽고 온갖 질병이 돌아 너도나도 태평동에 틀어박혀 출근이 어렵다고 말하는 시기다·
그리하여 야근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신시 내에 한 여인이 태평단의 소연무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정문에서 왼쪽 다섯 층짜리 건물·
태평동이라 하는 태평단 무사들의 기숙사다·
기숙사 앞을 지키던 불침번이 커다란 대도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사람의 형체를 보았다·
전신을 꽁꽁 싸맨 까만 복장·
중원에서는 야행복이라 하는 의상이었다·
불침번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가 야행복이 끄는 대도를 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신시 사람치고 그걸 알아보지 못한 이가 없다·
붉은 수실이 달린 무식하게 큰 대도는 마왕도문의 직계 제자들이 쓰는 병기였으니까·
이 시간에 나간 마왕도문도 출신이면 아마·
불침번이 반가운 척을 했다·
“사 사범 벌써 돌아온 거야? 그래도 순찰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이렇게 조기 복귀를 해버리면 출입부가 꼬이잖어·”
그러자 흑의인이 대답했다
“울어라·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
뜬금없는 소리에 불침번이 반문했다·
“뭐? 사범 술 마셨어? 울긴 왜 울어? 사내대장부가·”
“누가 너보고 울래?”
청이 톡 쏘고는 다시 말했다·
“울어라 지옥참마도·”
지옥참마도가 보름달같이 둥근 원을 그렸다·
혈영뇌전도법 일 초식 혈만월·
그저 뒤로 도첨을 땅에 댄 상태에서 수직으로 휘돌려 벼락처럼 내려치는 단순한 초식이다·
그러나 혈마왕신공의 혈왕마기가 합쳐지면 그야말로 지상 위에 피빛의 보름달이 뜬 광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정수리에 틀어박힌 칼몸이 수직으로 꿰뚫어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왔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자글자글한 손맛·
병기로 찍어눌러 억지로 끊고 부숴 찢어내는 손맛은 또 새로 경험하는 신세계였다·
“아흐···· 진짜 너무 좋아···”
베는 게 아니라 찢는 맛·
이거 또 별미거든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청이 성큼 움직였다·
태평동 안으로 살귀가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
내당 태평단 소속 상급 수사관 석훔훔은 오늘도 홀로 외로운 사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천마신시에 소수마녀 그 간악한 악적이 숨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석훔훔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천마위사대 전투단의 파견을 요청함과 동시에 태평단 특별 야간 근무 편성을 제안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으로 야간 근무 편성을 허가하되 소수마녀를 발견하면 가능한 한 생포하고 아니면 포위하여 시간을 끌라 명령했다·
소수마공을 탐내는 것이었다·
석훔훔은 얼마 안 되는 태평단의 양심으로서 분통이 터졌지만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없었다·
오늘도 야근으로 밤을 지새며 천마신시의 지도 위 피해자들을 연결한 도식으로 소수마녀의 은신처를 추리하는 중이었다·
“소수마녀· 어디 숨었나· 분명 동구 어디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분명 마녀는 동구에 있었다·
동구라 하면 역시 홍등거리의 어딘가 창녀들 사이에 숨어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때였다·
수하가 온갖 방정을 떨며 난리를 쳤다·
“큰일났습니다! 불이 불이 났습니다!”
석훔훔이 한심하다는 듯이 수하를 보았다·
“소방 또한 태평단의 소임이다· 불길 잡기가 오랜만이라고 해도 허둥대는 꼴을 보니 소방 훈련 계획을 다시 잡아야겠어·”
“그게 아니라!”
“아니긴 무어· 뭐해? 당장 태평동에 무사들 깨워 소방기 들고 출동시키지 않고·”
“그 태평동에 불이 났단 말입니다!”
석훔훔이 팍 인상을 썼다·
“뭐? 젠장! 종을 울려 인근 무사들 다 불러모아! 본단에 나머지 인원들은 뭐해! 당장 방화기 들고 태평동으로 모이라 해!”
그렇게 태평단의 밤이 깨어났다·
야간 근무를 서던 인원들이 전부 모여 방화 모래 들고 기름천이며 물동이 들어 태평동의 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닌 밤중에 불구경 하러 기웃거리던 신시의 시민들도 그 자리에서 잡혀 물동이를 나르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 과정을 지휘하던 석훔훔의 등줄기가 돌연 서늘해졌다·
불이 났는데 어째서 밖으로 나오는 인원이 없을 수가 있지?
본래 불이 나면 창밖이 천 리 낭떠러지라도 참지 못하고 뛰어내리는 것이 사람의 생리다·
하지만 건물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데 도대체 사람의 인기척이 없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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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청은 태평단의 대사전에 있었다·
태평단의 중심이자 모든 지휘 조회 서류 등의 주요 업무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태평동에 잠든 무사들을 처리하기는 어렵지 않을 걸세· 애초에 군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놈들이니· 온 이목이 불길에 쏠리고 나면 기록소에 불을 지르게· 뭐? 기록소가 어디냐고? 그건 나도 모르겠군· 그 정도는 좀 알아서 하게·
그래서 청이 알아서 했다·
태평동에서 하나 살려 턱 뽑고 귀를 잡아뜯고 하나 남은 귀를 붙들고 물어본 것이다·
그랬더니 친절한 안내자로 전직을 하더라·
그 안내에 대한 보답으로 청도 녀석을 손수 저승으로 안내해 주었다·
안내에 안내로 보답해준 친절한 청이었다·
청이 설가놈이 준 자기병을 툭툭 던졌다·
쨍강쨍강 송진 섞인 기름이 사기 조각 사이로 경쾌하게 튀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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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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