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5
평산호를 앞둔 밤이었다·
김치찌개 말고 콜라도 먹고 싶다·
콜라가 아니라도 좋아·
얼음장 같은 탄산음료가 먹고 싶어·
목구멍 터지도록 밀어 넣어봤으면·
하지만 탄산은 어떻게 해도 안 되겠지····
청의 그리움은 더욱 심해졌다·
세상에 없는 것을 바라고 있으니 상태가 호전될 리가 있나·
그렇게 가만히 모닥불이나 바라보며 불멍을 때리고 있을 때였다·
“오늘 밤에 지존께서 보고자 하십니다·”
오랜만에 본 꼬맹이는 여전히 작았다·
청이 성의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별로····”
“지존께서 의향을 물어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따라오시는 편이·”
“이 년이 싫다고 하지 않소·”
최리옹이 지승주의 말문을 막았다·
“자전마군· 지존께서는·”
“다 큰 애새끼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소? 여기까지 와서 놈이 어쩔 텐가· 신교에서야 들어주지 않으면 온갖 패악질을 다 부리니 굽혀주었다만·”
지승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옘병· 제발 좀 봐주십시오· 오 년을 그놈의 옆에 붙어있었는데 그럼 자전마군께서 같이 가서 개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놀랍도록 불경한 소리였다·
그러자 최리옹이 움찔했다·
신교의 고위층 모두가 지승주에게 고마움을 품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방약무인이라는 네 글자를 사람으로 만들면 딱 지존이라는 놈이었다·
그걸 옆에서 살살 달래가면서 그나마 패악질을 막아온 소년이었으니까·
“내 마뇌의 어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오만 이 꼴을 좀 보시오· 아이가 심마에 들려 지금 삼 일 썩은 산양 시체처럼 늘어져 있지 않소·”
그 말에 지승주가 놀란 눈빛을 했다·
지승주에게 청은 비작부 살수들의 대가리를 깨고 실실거리던 천하에 미친 여인이었으니까·
“그 상태가 심마였습니까?”
“이 꼴을 보고도 모르시겠소?”
“방심을 유도하려는 수작인 줄 알았습니다· 자전마군께서도 이송 중에 혈사를 뻔히 보시지 않았습니까· 지존께 드릴 변명은 되겠군요·”
지승주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장 화려한 전막으로 향하니 지존 전용의 촉금 금침에 누운 지존의 모습이 보였다·
크게 하품을 야무지게 한 지존이 물었다·
“혼자 오는군?”
“말씀 올리기 송구하오나 서문청이 심마에 들린 상태라 하여 확인하고 복귀했습니다·”
“그년이?”
지존이 히죽 웃었다·
“이전에 그년의 눈빛을 봤단 말이지? 거기서 내가 뭘 봤는지 아나?”
“고견을 여쭙겠습니다·”
“천하의 비각주도 경지가 미천해서 그런지 영 사람 볼 줄을 몰라· 이 어르신께서 마땅히 지도해 주자면 살면서 그렇게나 격렬한 증오를 본 적이 없더라니까·”
지승주가 피와 뇌수 위에 버팅겨 눕던 청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파르르 소름이 돋았다·
지존이 그 모습에 킬킬거렸다·
“절대로 꺾일 년이 아냐· 그러니까 꺾을 재미가 있는 거고· 내 장담하건대 그거 다 연기라니까·”
“하오시면 다시 불러들여야겠습니까?”
“뭐· 됐다· 앙탈을 부리니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줄 수도 있지· 비각주의 실패도 함께 말야·”
지승주가 속으로 생각했다·
두 번째로 넘어갈 기회는 오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 속마음을 감추고 허리를 낫의 모양으로 꾸벅 접었다·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지존이시여·”
—-
고지대에서 내려보기에 평산호 대협곡의 전망은 그저 절경일 뿐 그렇게까지 복잡해 보이지도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구불구불한 협곡의 틈새로 발을 들이고 나면 누구나 당황하고 만다·
해가 제대로 들지 않아 어두침침한 바닥에선 기본적으로 사람이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곧게 뻗은 길이 없어 겨우 몇 장 앞의 절벽이 보이는 시야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잃고 헤메이도록 만들었다·
물론 고수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지형은 아니다·
십여 장 절벽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오르는 초인들이라 정 길을 모르겠으면 벽을 타고 위에 올라 하늘 보고 집 찾아가면 그만이었던 것·
그래서 천마총의 입구는 바깥으로 기운 절벽 아래틈 사시사철 해가 들지 않아 깜깜한 음영 속에 숨어있었다·
대협곡의 한가운데이니 헤메는 자가 발견해도 돌아가지 못해 알리지 못하고 고수는 절벽을 올라 빠져나가다 보니 깊숙한 협곡 바닥일랑 들어올 일이 없었다·
그러니 마교는 무천대제의 일기장에 의존하여 천마총이 평산호에 있음을 알았기에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 년을 헤매도 찾지 못할 외지였으니·
청이 최리옹의 품에 안겨 천마총의 입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뭔가 생각보다· 초라하네····
뭐가 더 웅장한· 에이 무슨 상관이람·
장정 둘이나 나란히 어깨 맞대고 들어갈 작은 석문이 절벽에 기대 거의 누워 있었다·
아마 그 뒤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으리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현실적으로 보물 창고에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황금 문 따위를 달아놓는 이가 있겠는가·
청의 고향에서나 있는 모험 영화에서나 나올 광경이니 실제 도적이 염려되면 꽁꽁 숨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천후의 묘실이 묘비도 없이 아예 야산 밑에 석실로 봉인이 된 것과 같은 까닭이다·
청이 복신적을 입에 물었다·
애써 편곡한 신나는 곡조가 있었으나 청의 마음이 신나지 않았기에 그저 애절하게 부는 원곡의 천심화음이었다·
노래의 심상이 그리움이며 또한 청의 마음이 일치하였으니 세상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와 더불어 극악한 마두들의 마음임에도 감동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일부는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가운데 유난히 구성진 피리 소리가 조용하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쿵· 쿵 쿵 쿵···
석문으로부터 무언가 떨어지는 충돌음이 연신 멀어지는 간격으로 둔중하게 울려 퍼졌다·
마교의 기관 전문가가 조심스레 석문에 붙어 두드리고 찌르고 귀를 대는 등 조사를 하는 것 같더라니 이내 저편을 보고 말했다·
“잠금기관이 해제된 것 같습니다·”
청은 맥이 빠진 가운데서 또 맥이 빠졌다·
이런 분위기면 피리 불고 나서 멋지게 문이 자동으로 드드드드 열릴 것 같았는데·
겨우 자물쇠 떨어져서 그것도 저 안쪽 멀리 굴러가 버리는 게 전부라니·
기관 전문가가 알았다면 펄쩍 뛸 생각이었다·
세상에 특정 소리로 잠금이 풀리는 문이라니 그야말로 반치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천하의 기물이었다·
게다가 억지로 열어 어떤 기관이 발동할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한 설계가 오히려 단순하게 해제가 되는 편이 훨씬 고절한 솜씨였으니·
전문가가 석문의 고리를 잡아당기니 곧 낑낑 힘을 쓰며 열렸다·
뻥 뚫린 새까만 구멍·
불씨를 틔워 던지니 예상대로 아래로 향하는 투박한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기관 전문가며 도굴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선발대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먼저 그 안으로 향했다·
청이 조금 당황했다·
어· 잠깐·
이러면 쟤네가 먼저 천마혼 찾아 들고나오면 나는 그대로 나가리되는거 아닌가···
청의 생각으로야 모두가 함께 진입하여 온갖 기기묘묘한 함정과 정체모를 괴물을 처리하고 고생이 이어질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끝에 찬란한 황금 문을 열면 출처 모를 신비로운 연기 사이 한 줄기 광선이 내리쬐는 영롱한 보물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면 그때야 비로소 절름발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과 함께 천마혼 들고 인질극 벌여서 탈출하고 보란 듯이 부수고 짼다·
이것이 청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의 핵심 인원들이 안에 무엇이 있을 줄을 알고 대뜸 들어가겠는가·
이것이 바로 전자오락이 해로운 이유였다·
남의 집에 들어가 상자 열고 주인의 눈앞에서 당당히 챙기고서 말을 걸어 대화를 나누기까지 하는 전자오락만큼 황당한 것이 또 있으려고·
전자오락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들면 이 꼴이 나고 마는 것이다·
설가놈이 진작 청의 계획을 알았다면 현실을 살게 좀 매담꾼의 이야기 좀 그만 들으라며 한심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하아· 할아범 잠깐 내려줄 수 있어요?”
“조심히 발 딛고·”
최리옹이 조심조심 청을 내려놓았다·
참으로 지극정성인 늙은이였다·
청이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섰다·
여전히 의욕이라곤 나지 않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해야 하는 일··· 인가?
내가 왜?
청의 깊은 곳에서 누군가 항변했다·
왜 해야 하는데?
그야 마교 놈들 안 막으면 신녀문도 그렇고 겸사겸사 중원에 선량한 사람들도 피해를-
왜 그걸 내가 막는데?
내가 복신적으로 열었으니-
너 아니라도 어차피 열릴 문이 아니었어?
복신적을 네가 빼앗지 않았으면?
어차피 마교 놈들이 가지고 열었을 거 아냐·
오히려 내가 마두들 잔뜩 죽였으니 지금 한 일 만으로도 칭찬 백 배는 받아야 하지 않나?
어?
맞네····
난 그냥 이 진절머리 나는 동네 내가 모르는 동네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청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천마총의 원래 이름은 사모능이라 했다·
반치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비동인 동시에 자신의 무덤이기도 했다·
반치는 안에서 기관진식의 설치를 마무리한 후에 음독하여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모능이 천후의 사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사모능의 문이 열린다면?
복신적을 불어 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복신적을 불었다는 의미는 사랑하는 아내의 묘실을 파헤쳤다는 뜻이 된다·
아내를 그리워해 목숨을 끊은 사내였다·
아내의 묘실을 파헤친 무도한 자를 감히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후에 무천대제라는 미친 자가 멀쩡한 입구 놔두고 땅을 가르고 천정을 뚫고 들어와· 귀한 약탈품 하나를 살포시 두고 갈 것이라는 예상은 못 했지만·
무천대제쯤 되면 기감으로 비동을 찾은 후에 또 복잡한 기관진식을 건드리지 않는 지름길을 뚫을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반치의 분노는 사모능의 개문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특정한 음역의 떨림으로 풀리도록 만들어진 잠금장치에 커다란 쇠공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지금·
잠금장치는 풀렸다·
쇠공은 떨어져 쿵쿵거리며 계단에서 떨어져 깊게 팬 홈으로 파고들었다·
기울어진 홈을 따라 철구가 데굴데굴 구른다·
구르는 철구가 또 다른 철구들을 두드리니 곧 다른 방향으로 파여진 홈을 향해 출발시켰다·
구르는 철구가 늘어난다·
철구가 또 다른 철구를 두드리며 갈라진 홈을 따라 수십 수백의 철구가 흘러내렸다·
어떤 철구들은 줄을 당기고 또 어떤 철구들은 막대를 밀고 누르며 기관의 최후 조작 반치가 남긴 최후의 진법을 완성시켜나갔다·
반치의 유작·
환상미종불귀진幻想迷綜不歸陣의 개진이었다·
—-
킁킁·
청이 문득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얘야?”
“할아범· 어디서 냄새 안 나요?”
“냄새라니? 갑자기 무슨 냄새 타령을·”
청은 진지했다·
코끝에 감기는 이 익숙한 너무나 익숙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서울 고향집의 현관을 열어 훅 끼치던 그 어머니의·
“김치찌개!”
청이 바락 소리지르며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입구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 “어어?” “어어어?”
모두가 그 기적적인 광경에 얼이 빠졌다·
청은 이미 마교 고수들의 이상향이자 시각적 안식처였다·
끝내 주는 피리 공연에 이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던 때에 앉은뱅이(는 아니고 절름발이지만)가 경공으로 내달리는 광경을 보고야 만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그리고 대체 김치찌개는 무엇이고 왜 그리 간절히도 외치며 뛰어간단 말인가·
그렇게 눈을 끔벅이고 비비며 입만 멍청하게 벌리고 있을 수밖에는·
모두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노인네가 지르는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 때문이었다·
“천마혼! 안돼! 방채야! 최방채! 돌아와!”
최리옹이 장이 끊어진 듯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그 뒤를 쫓았다·
“크하핫! 그래! 내 말했잖아! 이럴 줄 알았어! 과연! 내 계집이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지·”
지존이 광소하며 달려나가고·
“무얼 하고 있습니까! 빨리 쫓아가지 않고!”
지승주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에 마교 고수들이 속도를 높여 천마총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아무래도 한자가 없으니 너무 심심하네요··
더는 참을수가 없다·· 틀니가 울부짖는다·· 틀틀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