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
청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객잔 가운데 서 있는 상태였다·
청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으며 외쳤다·
“여기요! 점소이!”
“예 소저· 갑니다요!”
점소이가 싹싹하게 외치며 나타났다·
“여기 생고기 김치찌개 이 인분이랑 햄사리 추가해 주시구요· 그리고 콜라 차가운 걸로요· 뜨거운 거 아니에요·”
“소저 죄송합니다만 본 객잔은 키오스크를 운용하고 있습니다요·”
“아· 네·”
청이 민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요즘엔 키오스크 아닌 데가 없네·
근데 이럴 거면 주문은 왜 받아주는 척을 해?
청이 투덜거리며 주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러자 아랫배에서 찌르르 무지근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청이 생각했다·
조용히 좀 있어· 눈치 챙겨야지·
신호에 꾹꾹 힘을 줘 억누른 청이 식탁에 턱을 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원 생활도 이젠 익숙해지면서 특히나 객잔 문화에 있어서는 이미 미개한 현지인 수준으로 빠삭하다고 자부했던 청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객잔은 독특하기 그지없었다·
회색빛 일색인 바닥이며 벽면에 심지어 식탁과 의자까지 전부 돌로 만들어진 객잔이었다·
마치 돌산의 안을 파내어 조각한 것 같은·
그런가 하면 어떤 조각이나 장식도 없이 덜 완성되어 도배가 안 된 건물 안에 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그 감성객잔인가 하는 건가·
근데 이것도 한물가지 않았나?
한물갔다기엔 객잔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거의 만석이다·
뭐· 주인장 마음이지·
객잔이 뭐 방 좋고 음식 맛나면·
그 사이에 음식이 나와 척척 식탁에 올랐다·
그토록 그리던 김치찌개와 흰 쌀밥·
청이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잘 묵은 묵은지를 푹 끓여 얼큰하고 텁텁한 국물이 꿀꺽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이런 세상에! 청의 눈깔이 홱 돌았다·
청이 곧장 전투적 식사에 돌입했다·
쌀밥에 즙을 적셔 싹싹 비벼놓고 묵은지 한 점 두부 한 점 살코기 한 점 올려다가 한 숟갈 야무지게 퍼서 입 안이 가득 차도록 한 입!
거기에 시원한 콜라캔을 찰칵 까서 토도독 탄산 튀는 소리를 혀로 느끼며 꿀꺽꿀꺽!
청의 머리속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래 이 맛! 이거 완전 우리 집 스타일이네·
진짜 너무 그리웠어·
나 너무 힘들었다구·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맛 아니 실제로 눈물이 흐르는 맛이었다·
“뭐야 왜·”
청이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눈물은 눈물이고 식사는 식사였다·
청이 볼썽사납게 울면서도 손을 쉬지 않으며 꾸역꾸역 밥을 처먹었다·
끄흡 흡 우물우물 왕· 끄흡 끄헝헝 끅·
울고 먹고 울고 먹고 아주 난장판이다·
그러면서도 손놀림은 아주 야무졌다·
김가루도 뿌려 비벼먹고 두부 김치 고기 햄을 경우의 수로 조합해 쌀밥을 퍽퍽 축냈다·
원래 김치찌개는 밥이 두 그릇이다·
셀프로 퍼낸 두 번째 대접밥을 두고 청이 또다시 음식물과 사투를 벌였다·
“후우· 잘 먹었다· 히끅·”
청이 퉁퉁 부은 눈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먹었는데도 홀쭉한 배였다·
그리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밥이 맛있어서인지 아니면 실컷 울어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밥 한 끼 겸 통곡을 동시에 하며 심마를 극복한 것이다·
청의 의자에 삐뚜름하게 기댔다·
좀 아쉬운데· 다른 것도 있으려나?
그러다 어느새인가 식탁 위에 자리잡은 석판을 발견했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석판에 떠오른 화면에 객잔의 메뉴가 큰 종류로 묶어 그려져 있었다·
아· 태블릿· 요즘엔 이런 집도 많더라·
그런데 원래 이런 게 있었나?
근데 왜 굳이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시켜?
청이 능숙하게 석판을 조작했다·
이내 점소이가 카트를 밀며 온갖 디저트들을 탁탁 내려놓으니 식탁이 가득 차는 케이크의 향연이었다·
티라미스로부터 시작해서 설탕 코팅 반짝이는 레어 치즈 바삭한 시트 위에 뉴욕 치즈 바싹 구워 새까만 바스크에 이르는 치즈 케이크의 총출동이었다·
거기에 쇼콜라 쉬폰과 살짝 갈라져 뜨끈한 속이 새는 퐁당 오 쇼콜라· 딸기 생크림과 장식 없이 단아한 우유 크림 겹겹이 생지와 크림으로 층을 쌓은 크레이프 스타일과 빵으로 분류해도 괜찮은가 싶은 무스 케이크·
저마다 다른 색의 토핑을 입힌 에끌레어가 일자로 정연히 정렬을 하고 메이플 시럽 절여진 팬케이크에 오페라 와플 브륄레 커스타드에 브라우니 파이 타르트 마카롱 까놀레 머랭 카스텔라 꽉 눌러 구워낸 크라상까지···
거기에다가 무려 31·01 fl oz 트렌타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청에 손에 들렸으니 천하 무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후식 학살자의 탄생이었다·
달고달고달고 또 달고·
실컷 먹고 울어 후련한 때에 치사량 이상의 당분으로 기분이 붕붕 떠오르니 슈가 하이라 하는 무림의 무시무시한 중독 증상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드는 생각이 하나·
내가 언제부터 단 걸 이렇게 좋아했더라·
청의 손이 멈췄다·
막 베어무려던 파이에서 사과 녹아난 머멀레이드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출도 이전에는 단 것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챙겨먹지도 않았다·
단 것은 지금의 몸뚱이가 가진 취향이었다·
이러면 뭔가 위험하지?
“에이 씨· 좀 더 즐겨볼까 했더니·”
청이 손에 든 것을 툭 내던졌다·
동시에 단전을 옥죄던 힘을 풀어낸다·
연신 아랫배를 쿡쿡 찌르면서 눈치코치 난리를 피워대던 대정선공의 진기가 풀려나왔다·
그 고즈넉하나 맑고 밝은 진기가 척추를 타고 뇌를 향해 흘렀다·
불가의 여덟 가지 수행을 팔정도라 한다·
그리고 개중 첫 번째를 정견이라 했으니 이는 곧 세상을 올바로 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청이 허상을 인지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청이 입맛을 다셨다·
뭐 그래도 김치찌개는 원 없이 먹었으니까·
앞으로 삼 년은 또 버틸 수 있겠지·
신녀문에 돌아가면 김장이나 해 봐야겠다·
대충 배추에 소금물 적신 후에 파 마늘 양파 고추 다져다 바르고 묻어두면 되는 거 아닌가?
안 되면 여기 다시 오지 뭐·
근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청이 아주아주 뒤늦은 의문을 가졌다·
처음부터 대정선공의 진기가 날뛰는 바람에 뭔가 이상하다는 정도는 쉽게 눈치챘다·
일단 식탐 채우겠다고 꾹 억눌렀다·
그리고 제대로 재미를 보았으니 간만에 진심으로 행복한 한때였다·
뭐지· 정신계 환각 마법 같은 건가·
무협에도 그런 게 있는 거였어?
사부님 보니까 손에서 불도 나가고 검 타고 날아다니시고 다 하시던데·
여기에 환각 마법까지·
그럼 무협이랑 해리 포터랑 뭐가 달라·
날아다니고 불 쏘고 환각 보여주고 거기에 뭐 공공의 적인 마두들까지 있는 판인데·
그냥 짱깨 새끼들 나오면 다 무협인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작이자 세계 팔백억 구천삼백만의 무협 애독자들이 거품을 물고 호통을 칠 불경한 생각이었다·
청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객잔 안을 또각또각 걸어나갔다·
그리고 객잔 밖으로 나서자 또 풍경이 뒤바뀌었다·
천장 드높은 궁궐의 대전 안·
수없이 솟은 왕좌를 저마다 한 명씩 꿰차고 앉은 꼴이었다·
어디서 얼굴 본 듯한 익숙함에 생각해보니 바로 마교의 정예 마두들이었다·
어떤 마두는 높은 왕좌에 앉아 미인이 주는 과일을 받아먹는 중이었고 또 어떤 놈은 높은 왕좌에 앉아 비단 옷 입은 신료들의 절을 받고 있었으며 또 다른 어떤 마교도는 높은 왕좌에 앉아···
청이 인상을 팍 썼다·
“아니 이 새끼들· 왜 하나같이 왕이 될 상이야? 좀 참신한 것 좀 없어?”
그야 마교에서 한가닥 하는 실력자들의 꿈이 대부분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원 통일 이후 왕작을 받아 한 성도를 다스리며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
청이 복신적을 꺼내들었다·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아주 정신 번쩍 차리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예 승천해서 극락정토 저 높은 신선들 있으신 곳으로 보내주려고·
그렇게 청이 흉흉한 미소와 함께 가까운 왕좌로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그만두십시오·”
앳된 목소리가 청을 멈춰 세웠다·
청이 고개를 돌렸다·
흉흉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이야· 승주 아니니? 이러게 보니 반갑구나? 안 그래도 우리 승주 얼굴이 보고 싶었다니까· 그리고 그 얼굴 속에 든 것도 좀 보구·”
지승주가 청의 미소와 복신적을 번갈아 보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다급히 말문을 텄다·
“절 죽이면 당신은 영원히 이 진 속에 갇히게 될 겁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응? 진이라니?”
“환상미종불귀진· 과거 혈교의 지파에 속한 혈종의 사악한 진법입니다· 당신도 이름 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응? 진법이라니?”
청이 다시 물었다·
지승주가 떨리는 눈빛으로 청을 보았다·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무식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냐는 놀라움으로 흔들리는 눈동자였다·
“거기서부터 설명해야 하는 거였습니까?”
“응· 그래서 진법이 뭔데?”
진법이란 자연의 기를 이용해 펼치는 술법의 한 종류였다·
수맥과 영맥이 흐르는 천지의 지리를 알고 흐름을 비틀어 나타나는 결과까지 읽어야 하는 고도의 기술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진법이 펼쳐진 안에 들어선 인간은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들으며 오감이 뒤섞여 비현실을 자각하여 깨어나지 못했다·
“아· 지금 이 난리가 진법 때문이다?”
“환상미종불귀진은 인간이 살면서 가장 원하거나 그리워하는 환상을 보여주는 끔찍한 절진입니다·”
“그게 왜 끔찍해?”
청이 의아함에 되물었다·
본인이 당장 먹고 싶은 것 왕창 먹고서 심마까지 깨끗하게 낫지 않았던가·
“본인이 진법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환상을 먹는 것이 실상 먹는 것이 아니고 잠들지 않고 내내 깨어있으니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달콤한 독이 됩니다·”
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청이 으레 그렇듯 속으로만 생각지 않았다·
“흠···· 그정돈가?”
“옘병· 아 죄송합니다·”
지승주가 곧장 사과를 이었다·
어째서인지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저 한마디가 어떻게 이리 속을 긁어댈 수가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의 심상이 아예 밖으로 나와 타인에게 보일 정도의 절진입니다· 백팔기문에 오행을 완전히 녹여낸 이치로 보입니다만 개중 생문을 찾으려면 일단 기본적인 팔괘축의 영상사문과 칠절문을 찾아서···”
“야·”
청이 지승주의 수다를 끊었다·
어차피 못 알아듣는 영양가 없는 소리였다·
이게 바로 똑똑한 놈들의 문제점이었다·
남들도 다 지들만큼 똑똑한 줄 알아·
청이 설가놈을 동네 최고의 지성이라 평가한 이유기도 했다·
적어도 설가놈은 항상 설명이 쉬웠으니까·
똑똑한 놈이 지만 아는 이야기를 한다?
청은 이럴 때에 효과적인 수단을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교수님과의 가장 효과적인 대화 수단 복신적이었다·
청이 복신적을 치들며 말했다·
“어려운 말 할래?”
“···진을 벗어나는 길이 오백사십개가 있습니다만 그중에 다섯을 빼면 전부 함정입니다· 그러니 사실상 길을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지승주가 곧장 말을 바꿨다·
지식은 높은 곳에 있으나 복신적은 바로 앞에 있는 까닭이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데?”
“모든 진법은 중추정 그러니까· 예· 주춧돌이 있습니다· 아· 주춧돌이 무엇이냐면·”
“나도 주춧돌이 뭔지는 알거든?”
“대단하시군요·”
“난 항상 대단해· 대단하지 않은 적이 없지·”
“····”
지승주가 잠깐의 침묵 후에 다시 말했다·
“그 주춧돌들을 바른 순서대로 바른 자리로 치워 진을 걷어낼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제가 알려드리는 대로 기물을 옮겨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청이 대답했다·
“내가? 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댓글확인 좀 하려면 항상 게이트웨이가 뜹니다·· 이러다 이세계 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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