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7
지승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표정만 안 변한다 뿐이지 보면 감정이 없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냐니 진법의 환상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이면 결국 허구이니 굶고 말라 죽고 말 것이라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개죽음을 당해도 상관없으시다는 겁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죽고 싶대?”
“방금 당신이·”
“진법 해체 안 할 거야? 전문가 두고 굳이 왜 내가? 귀찮고 힘든 일은 우리 꼬맹이가 해줘· 아주 하고 싶은 거 다 해·”
지승주가 입만 뻐끔거렸다·
이 무슨 뻔뻔한 소리를!
“낯짝이 두꺼운 것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 돕지도 않을 거면서 결과만 누리겠다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겁니까?”
“응· 어차피 급한 건 내가 아니잖아?”
“그 그런·”
“게다가 꼬맹이를 돕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단 말야· 나도 정말 어쩔 수 없어·”
“그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난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지승주의 표정이 팍 썩었다·
“옘병· 무슨 이딴 년이 다 있냐!”
“여기에 있지· 이제는 여기에만 있을까 생각 중이야· 근데 드러눕기엔 바닥이 좀 찬가·”
청이 낄낄거리며 약을 올렸다·
지승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청이 돌연 정색을 했다·
“야· 내가 무식하긴 해도 일이란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거든? 진법이라곤 좆도 모르는 얼간이 하나 데리고 뭘 할 수 있는데?”
“그건·”
“힘 정도는 대신 써 주겠지? 그런데 그게 전부 아냐? 따로 움직이면 차라리 안 건드리는 편이 나을 거고· 같이 움직이면 너 혼자 하는 거랑 별 차이도 없잖아?”
지승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꼭 할 말 없는 것들이 입만 다문다니까·
청도 나름 생산직으로 뼈가 굵었다·
이 말은 무수히 스쳐지나가는 신입들과 작별을 경험했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란 데리고 다녀봐야 사실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멀리에 두고 따로 작업을 시킨다?
그날이 바로 공정의 수율을 제대로 날려 먹는 날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 자신이 신입 진법을 모르는데 굳이 데리고 다녀봐야 무엇하겠는가·
안 보이는 데서 마교도 대가리를 깰까 봐 무서워서 옆에 붙여두고 감시하려는 수작질로밖에는 안 보이는데·
청은 그저 무식할 뿐· 멍청하지 않다·
애초에 개길 사람 개기지 말 사람 딱딱 구분해서 면상을 바꾸는 간사한 년이었던 것이다·
딱히 영리하게 행동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멍청한 행동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기는 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처신으로 살아남은 당당한 무림의 여검객인 것이다!
무식한데도 딱히 필요한 사항 아니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신경함은 분명 사람으로서 글러먹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가서 날 위해 진법을 해체해 주지 않을래? 나는 여기서 좀 쉬고 있을 테니까· 아유 다리가 좀 저린 것도 같고”
청이 비열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지승주가 숨을 씩씩 몰아쉬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좋습니다· 대신 당신도 신교의 교인들께 손을 대지 말아 주십시오·”
“글쎄· 어쩔까·”
“당신에게도 괜한 원한을 쌓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일이 끝나고 멀쩡히 걸어 나가고 싶다면 말입니다·”
그럼 그 전에 다 죽이면 되지 않나?
청이 그리 생각할 때였다·
“진법도 사람에 따라 심도가 다른 법입니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환상에서 깨어나면 고작 절정의 무인이 감당할 수 없는 분도 여럿 계신 상황이고 말입니다·”
“아씨· 그거 말 되네·”
하긴 당장 이 꼬맹이만 봐도 제정신으로 잘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다른 마두가 이렇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게다가 마인의 대가리를 깨면 아예 다 깨서 화근을 제거해야 하고 실패하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안 깨면 적어도 천마혼을 놓치더라도 일단은 돌아갈 수 있다·
이러면 굳이 전자를 선택할 이유도 없고·
청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곤 헝클어진 머리를 습관으로 풀어 다시 틀어 올리며 청이 순순히 인정했다·
“좋아· 얌전히 구경이나 좀 하고 다니지 뭐· 그래서 얼마나 걸릴까? 전문가쯤 되면 대충 각이 잡히는 거 아냐?”
“글쎄요· 재수가 좋으면 일 다경 안에 가능할 수도 있고 재수가 없으면 우리 모두 여기서 굶어 죽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알려주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을 해라· 하여간 머리 쓰는 놈들 화법이라고는·”
청이 툴툴거리며 몸을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구경하러 간다· 왜·”
실은 천마혼 찾으러 간다·
보아하니 적어도 단시간에 끝날 작업은 아닌 것도 같고·
“진법에 휘말리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뭐야 걱정이라도 해주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분명히 경고했으니 알아서 처신하십시오·”
지승주가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몸을 척 돌려 가버리고 말았다·
저거 삐졌네·
청이 고개를 저으며 대전 안을 두리번거렸다·
들어온 문과 꼬맹이가 나간 문을 제외하고도 남은 문이 일곱이었다·
일단은 왼손 법칙이려나·
어떤 미로든 왼손을 벽에 대고 죽 걸어나가면 돌파할 수 있다는 간단한 논리적 추론이었다·
청이 가장 왼쪽의 문으로 향했다·
—-
체감상 반나절이나 되었을까·
청이 알아낸 것이라곤 타인의 환상에 대한 아주 작은 지식뿐이었다·
환상은 결국 두 부류로 나뉘었다·
욕망이 큰 놈들은 오지 않은 미래에 성취를 이룬 자신의 모습을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과거로부터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작 먹을 것이라고는 해도 청 역시 후자에 속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환상을 엿보고 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딱히 재미있지 않았다·
미래의 희망을 본다고 표현하면 어쩐지 멋져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내면에 감춰둔 유치한 망상에 불과했으니까·
과거를 보는 사람들의 환상은 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사연 따위 관심도 없는 청이었으니까·
게다가 수색에도 성과가 없었다·
사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물건을 찾아다니고 있으니 성과가 있을 리가 있나·
막말로 무슨 돌맹이처럼 생겼으면 청이 아예 각 잡고 수십년 돌아다녀도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씨·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네·
청이 툴툴거리며 폭포수 흐르고 말들이 떼로 풀을 뜯는 광대한 초원을 가로질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귀가 먹먹해지는 빗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컴컴한 폭우 내리는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미 환상을 깬 청에게야 그저 통과할 뿐인 허상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듣고 보는 것만으로 압도될 정도의 거친 폭우였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품에 누군가를 끌어안고서·
청이 다가가서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최리옹이 딸의 시체를 품에 안고서 하염없이 그 얼굴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쏟아지는 비를 그저 몸으로 얻어맞으면서
청이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빗줄기 외에는 아예 멈춰버린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그저 늙은이의 회한 가득한 눈빛을 가끔 덮어 가리는 눈꺼풀만 깜박거릴 뿐이었다·
청이 들어와 식사를 하고 단것들 양껏 즐기는 시간이 전혀 짧지 않았고 그 후로도 느끼기에 반나절은 돌아다닌 것 같았다·
청은 최리옹이 그 긴 시간동안 그저 이렇게 제 딸이었던 식은 몸통을 붙들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청이 인상을 찌푸렸다·
모처럼 환상 속에 왔으면 좀 더 희망찬 장면을 보고 심신의 치유를 할 수는 없나·
에이씨 노인네가 청승맞게·
“이봐요 할아범·”
그러자 최리옹이 멀거니 청을 올려다보았다·
“좀 밝고 즐겁고 행복한 장면으로 보면 어디 덧나기라도 해요? 모처럼 딸 얼굴 볼 거면은 좋았던 추억이라도 좀 떠올려 보든가·”
그러자 풍경이 바뀌었다·
으리으리하게 펼쳐진 어느 꽃밭 어린 꼬마가 나비를 쫒으며 꺄르르 아이 특유의 맑은 웃음 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연신 이쪽을 흘끔거리는 것이 혹여 제 아빠가 어디 가지는 않았나 연실 살피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훨씬 보기 좋구만· 아재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좋은 걸로 골라 보다가 호상 치르고 가요· 불쌍해 보이게 궁상떨지 말고·”
최리옹이 홀린 듯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마디를 내뱉기를·
“안 돼·”
그러고는 도로 그 장면이었다·
비는 내리고 노인네는 처맞고 딸은 죽었고·
청이 짜증을 부렸다·
“뭐에요 대체 뭐가 문제야?”
“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나도 알거든요· 저번에도 들었으니까·”
“누구나 제 목숨이 제일이 아니냐· 설령 힘이 들고 어려운 삶이라도 그러하다· 그런데도 제 목숨 제가 버릴 정도면 그저 살아 숨 쉬는 게 괴로울 뿐이었겠지·”
“그래서 할아범도 같이 괴롭겠다구요?”
최리옹이 클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중원으로 나가는 게 소원이었단다· 어떤 놈이 바람을 불어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원에 제 행복이 있다고 믿었지·”
“그런데요?”
“그때는 늙은이가 신교의 대호법이었다· 그럼 대호법이 마교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겠느냐· 늙은이 알기로는 중원이라 하는 곳이 부모가 아이를 서로 바꿔 잡아먹는 아귀지옥이었다·”
딸이 생지옥으로 가겠다는데 막아서지 않을 아비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최방채는 중원 모두가 증오하는 신교도 중에서도 거두인 대호법의 딸이었다·
“착한 아이였다· 남한테 모진 소리를 한마디 못 해서 차라리 제가 손해를 보는 년이었지·”
아이는 하루하루 변해갔다·
청이 변하는 세상으로 그 성장을 지켜보았다·
누군가 맞는 꼴만 보아도 눈물을 글썽이며 그 아픔에 공감하던 딸은 이제 그저 독기만 가득 채운 눈빛으로 누구에게나 모진 말을 쏟았다·
그러나 그 본성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어서·
그렇게 하는 패악질이 전부 제 가슴을 할퀴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최방채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딸이 죽고 나서야 자리를 내려놓고 외당의 근무를 자처했단다· 멍청한 년이 그리던 중원의 꼴을 내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지· 못난 년이 제가 호사를 누리는 것도 몰랐다고 누구 딸로 태어난 덕에 제가 얼마나 행복한 처지인 줄도 모른다고· 그렇게 비웃어주고 싶어서·”
그렇게 중원에 나가고 나서야 알았다·
아이의 말이 맞았다·
딸을 보내주었어야 했다·
최소한 아이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이 고독의 항아리 서로를 잡아먹어 독기를 키우는 신시는 아니었던 것이었다·
신시가 아니었다면 어디든 행복했을지도·
최리옹이 다시 죽은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이 그제야 이 풍경을 이해했다·
최리옹은 이미 한참 전에 죽은 늙은이였다·
숨이 붙어있는 이유는 그저 괴롭기 위해서·
딸자식 죽였다고 여기는 애비가 제게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바라는 소망이 이런 꼴이었다·
삶에서 가장 아프고 괴로웠던 시간 속에 박제되는 소망일 것이다·
그저 끊임없이 가슴이 찢기고 싶어서·
이런 삶을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청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곧장 다시 머리를 묶어대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실은 기분이 편치 않아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진짜 신파는 딱 질색이야·”
하지만 이게 노인네 잘못인가?
평생 이리 고통받을 정도로 큰 잘못이라고?
그 심정이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청이 자전마군의 악업을 보았다·
그리고 딸에게 못 박힌 그 시선을 보았다·
잘 되든 안 되든 뭐 노인네 팔자겠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꼴 보기 싫은 꼴을 그대로 놔두기는 싫단 말이지·
가방끈이 짧아서 심리적인 상담은 못 하겠다·
하지만 물리 치료가 또 내 전문이잖아?
청이 복신적을 쥔 손을 번쩍 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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