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
아주 기가 막힌 장면이었다·
품에 소녀의 시신을 안고 내려다보는 늙은이·
그 옆에서 흉기를 높이 치든 여인이었다·
누구라도 당장 멈춰 세우기 위해 덤벼들 만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여기에 악명 높은 대마두가 하나 그리고 도가의 배분 높은 어르신이 하나였다·
이 설명까지 곁들이면 청에게 무수한 칼날의 비가 쏟아져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실상 도가의 어르신은 청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된다·
청은 만년한철 단봉의 형태를 한 신병을 높이 치들고 심각한 갈등에 처한 상태였다·
아· 이거· 힘을 얼마나 줘야 할지 모르겠네·
노인네가 무방비 상태였다·
대체 어느 정도 힘을 주어야 대가리가 깨지지 않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핵은 너무 강하겠지?
일단은 가볍게 벽돌 파괴자 수준으로다가·
구천 근이나 되는 화약을 인심 좋게 꽉꽉 넘치게 담아낸 악명 높은 폭탄이었다·
시가지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리기 위한 물건이라서 화약 인심이 아주 좋았다·
그 벽돌 파괴자의 심상으로 펼치는 선의에 의한 폭격이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딱!
뼈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다·
노인네의 듬성한 머리카락과 늙은 머리가죽이 전혀 충격을 완화해주지 못한 까닭이었다·
본래 정수리는 천령개라 쓰며 신체의 가장 중요한 혈자리이자 급소다·
완전히 방심한 때에 일격을 얻어맞은 최리옹의 눈이 까무룩 뒤집혔다·
최리옹이 앉은 자세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의식 잃은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니 바닥에 머리를 쿵 찍고 수그린 자세로 널브러졌다·
“앗· 할아범 미안요· 힘이 좀 들어갔네· 음· 그래도 그 정도 사셨으면 호상인 게 아닐까요?”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민간 요법이었는데 그만 기절을 시켜 버렸네·
허가받지 않은 물리 치료가 위험한 이유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귀가 먹먹하던 빗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는 침침한 석실 안의 풍경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막힌 데 없이 넓게 펼쳐진 석실 안이었다·
수 십여 명 마교의 고수들이 멍청한 얼굴로 횃불을 든 채 바깥쪽으로 커다란 원을 여럿 그리며 걷는 중이었다·
시선은 전방으로 고정된 것이 어째 사람 냄새 나지 않는 꼴이기도 하고·
개중에 유일하게 사방을 둘러보는 이가 한 명·
꼬맹이 지승주가 안쪽 원과 바깥쪽 원 사이에서 고개만 휙휙 돌렸다·
진법에서 벗어나 보는 풍경이었다·
본래 환상의 주인이 의식을 잃어버리면 다른 환상으로 공간을 채우는 동안 아무것도 없이 깜깜한 암흑 속을 비춰야 했다·
하지만 대정선공이 정견 올바로 봄의 이치로 거짓된 공허를 꿰뚫어 보았다·
타인의 시선도 존중하는 불가의 가르침이기에 남의 환상은 그대로 비추었지만 환상이 없는 때에는 거짓을 그대로 깨어버린 것이다·
천하의 반치 위대한 진법의 설계자조차 생각하지 못한 빈틈이었다·
진법에 걸린 걸 밖에서 보면 이렇구나·
좀 뭐랄까· 병신 같은·
그리고 나선 청이 보물을 보았다·
묘실의 정중앙 오색으로 은은한 서기를 뿌리는 모양이 딱 봐도 내가 보물입니다를 외치는 중이었다·
스스로 빛나는 삼각뿔이다·
자체 발광이라니·
게다가 어떤 위압감이라고 해야 하나·
강렬한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
한눈에 천마혼이라는 그런 영적인 직감이 들었다·
잠깐 이러면 이거? 기회지?
청이 중심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다시 세상이 바뀌었다·
모르는 집의 대문 앞이었다·
마교 고수가 벅찬 표정으로 연신 대문을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 내가 돌아왔소! 내가 돌아왔다니까!”
-가가? 당신이에요?
“그래 나야!”
-가가!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 타타닷 가벼운 발소리 하나가 가까워졌다·
고수의 입이 벌어지고 그 얼굴이 행복 그리고 기대로 인해 붉게 상기되었다·
마침내 철컥 대문의 빗장을 푸는 소리·
그리고 끼이익 이내 문이 열리기 시작-
빡!
고수가 그대로 허물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뻔한 이야기 하고 앉았어·”
청이 툴툴거리며 복신적을 쓸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천마총 내부였다·
어느새 가장 바깥쪽 원에 서 있는 중이었다·
아까는 괜히 둘러보느라 시간만 버렸지·
이번엔 빠르게·
청이 땅을 박찼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
온 사방이 전라의 여인들이다·
그 가운데 청일점 유일한 사내가 한 명·
빡!
이제 청일점은 없다·
다시 천마총· 다시 바깥쪽이었다·
청이 마교 고수 일곱 명을 기절시키고 혹시 몰라 한 명은 아예 대가리를 박살내고 나서야 결론을 내렸다·
“에이씨· 이걸로 안 되네·”
죽여서는 바깥을 엿볼 수가 없고 기절시켜야 잠깐 동안 환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한 발짝이라도 떼면 다시 돌아오니 이런 식으로 탈출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거면 충분했다·
천마혼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알게 되었으니까·
진법이 사라지고 난 후에 곧장 달려가면 그 누가 청보다 빨리 천마혼을 손에 넣겠는가·
인질극으로 밖에 나가서 거리를 벌린 후에는 부숴버리고 도망쳐야지·
사부님도 경공으로 세상에 청을 따라잡을 이가 별로 없을 것이라 말했으니 도망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그럼 이제 진법이 풀리기만 하면 되는데·
진법이 풀리는 순간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기만 하면 거의 성공이나 마찬가지리라·
그러려면 진법을 푸는 사람 옆에 붙어있으면 된고·
꼬맹이 찾아서 도와준다고 하면 되겠네!
청의 잔머리가 핑핑 돌아 결론을 내렸다·
청이 한 발짝 재차 진법 속으로 파고들었다·
—-
막상 계획은 참 좋았는데·
그런데 꼬맹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막 돌아다니다 보면 만나지 않을까 싶어 환상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와중이었다·
어딘지 모를 화창한 장원의 마당 쯤인가·
익숙한 목소리가 청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년이 이젠 애비를 애비로도 안 여기느냐? 세상 천지에 애비를 매질하는 년은 없다· 아주 악독한 년 같으니·”
정신을 차린 최리옹이었다·
최리옹은 화경의 고수다·
기가 실리지 않아 그저 묵직할 뿐인 공격에 명줄 놓고 황천길 떠나기에는 너무 고수였다·
최리옹이 정수리를 문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아프긴 아픈 모양이었다·
그런데 애비라니?
정신을 차린 게 맞나?
청이 긴가민가하여 되바라진 소리를 했다·
“뭐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요? 애비는 뭐 누가 애비야? 정신 좀 차려 봐요· 안 그러면 한 대 더 때려야 하잖아·”
그러자 최리옹이 흠칫했다·
무언가 잘못 본 사람처럼 눈을 비비더니 청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야 대뜸 남의 얼굴 보고 한숨 쉬기 있기 없기? 그러면 맞기 안 맞기?”
“세상에 노인네 패는 어린 것이 있을 줄이야· 독한 년인 줄은 알고 있었건만·”
“그래서 치매가 위험한 거예요· 노인 공경이 노인 공격 되고 막 이래· 원래 정신 나간 사람 앞에선 성인군자가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 그런 말이 있었나? 대체 그게 어느 성현께서 하신 말씀이더냐?”
“서문청이요·”
최리옹이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최리옹이 듣기에 일리가 있기는 하여 구태여 따지지는 않았다·
“심마에 들린 다리병신인줄 알았더니 아주 남 속이기가 귀신 같은 사기꾼 년이었어·”
“처음에는 다리 병신이 맞았고 심마는· 아! 그게 심마였구나· 어쨌든 뭐· 잘 극복했어요· 다들 심마 무섭다고들 난리를 치더니만 그거 별것도 아니구만·”
듣는 심마 억울할 소리였다·
본래는 사람 속을 태우며 폐인으로 만들 기량이 충분했음에도 전설적인 진법 하나가 불쑥 등장해서 방해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나 최리옹은 대강 납득했다·
직접 진법에 걸려 보니 이 환상에서 벗어날 방도만 있다면 그리움 정도는 단숨에 극복할 만한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렇게 최리옹이 진법에 다시 생각이 닿았다·
“보아하니 고약한 진법이 펼쳐져 있는 모양이다만· 어찌 너는 쌩쌩하구나·”
“애초에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거든요? 이런 잡기술에 걸리는 애들이 다 나약해서 그런 거예요· 근성이 없어서 그래· 근성이·”
이러면 진법도 억울한 소리였다·
실상 청이 잘한 것은 하나도 없이 대정선공 그 불가의 청청함이 거짓을 지우려고 계속해서 단전을 쑤셔댄 까닭이 아니던가·
그나마도 고향 음식 먹겠다고 꾹꾹 억눌러서 결국 처먹을 거 다 처먹고 나서야 풀어냈다·
거기에 더해 마교 고수들도 억울했다·
그러고 보면 청이 가진 최고의 능력은 입을 열 때마다 누군가가 억울해지는 재주였다
“어쨌든 할아범 잘 만났네요· 그 꼬맹이가 진법 걷어내겠다고? 밀어낸다고? 뭐 어쨌든· 이거 치우겠다고 하던데· 나보고 도와달라고 했는데 어차피 뭘 몰라서 알아서 하라고 했었거든요·”
그러자 최리옹의 표정이 밝아졌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구나· 그래 비각주는 어디에 있느냐? 내 한손 보태야겠다·”
“문제는 그걸 모르겠어요· 돌아다니다 보면 찾지 않을까 했는데·”
“쯧· 너는 꼭 항상 마무리가 안 되는구나·”
“뭐에요 궁상맞게 비 맞고 있던 게 불쌍해서 기껏 깨워줬더니만· 마무리고 뭐고 시작도 못 한 노인네한테 들을 소린 아니거든요?”
“크흠·”
최리옹도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헛기침을 하는 척이나 하는 것을 보니·
“자· 그럼 가요·”
“그래· 가자꾸나·”
최리옹이 그리 대답했다·
그리고는 자리에 멀거니 서서 청을 보았다·
“뭐해요? 가자니까요?”
“그래· 가야지·”
“근데 왜 안 가구요?”
“크흠·”
또다시 헛된 기침을 하는 척이었다·
청이 노인네가 대체 왜 이러나 바라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작은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혹시 진법 안이라도 내내 돌아다녔는데 발은 괜찮더냐? 아픈 척에 불과하더라도 꽤 오래 쓰지 않은 근육이 무리라도 가면 안 될 텐데·”
그에 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범 소원이 그거라면야·”
청이 팔을 벌리자 최리옹이 익숙한 태도로 조심스레 받쳐 품으로 끌어올렸다·
절름발이 호소인임이 만천하에 들통나고도 다시 뻔뻔하게 승객이 된 청이 받침대를 따라 장원의 정문을 통과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근데 여기는 누구네 환상이지?
환상 주인은 멀쩡한 모양인데?
뭐 누가 주인이건 무슨 상관이겠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몇 번 갈아엎는 바람에 좀 늦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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