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2
‘이런 식으로 함선을 장악한 건 오랜만이네.’
나는 의자에 앉아 함장실을 쭉 훑었다.
보통 함선을 빼앗을 때면 내부의 상태가 완전히 엉망이 되는데 이번만큼은 아니다. 문 앞에 부서진 바리케이드를 빼고 나머지는 모두 멀쩡해 보인다.
모두 예전부터 즐겨 쓰는 옛 방식을 택한 덕분이다.
인간으로 위장해서 적을 속이고 무너트리는 방식 말이다.
11일 전 나는 우주도시의 생존자들 사이에 섞여 에저튼의 구조선에 올라탔다. 그리고 외형을 바꿔가며 배 내부에 혼란을 가져왔다.
적들은 나를 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자기들이 누구와 싸우는지도 모르는데 애써봐야 헛수고일 뿐이다.
놈들이 멍청한 짓을 하는 동안 나는 이 배의 생명줄을 하나둘씩 끊어 놨다.
식수에 심우주 역병을 퍼뜨리고 통신망을 멀리서 뒤따라오는 PS-111에게 제어권을 넘겨줬다. 원인을 모르는 문제가 연달아 발생하자 사람들에게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배는 일반 구조선이 아니라 에저튼 은사자기사단의 군함이다. 배에 탑승한 자들도 대부분 유전자가 개조된 군인이었다.
‘그러면 더 좋지.’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죽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들의 불안이 서로에게 향하도록 유도했다.
팀장급 인원으로 위장해 반란을 선동하고 사람들 머리에 기생충을 심어 분란을 조장했다.
우주 한복판에 고립된 작은 공동체가 무너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군인들은 자기들끼리 총질을 하다가 자멸했다.
“새로 얻은 이 능력 역시 마음에 들어.”
나는 창백하게 질린 손을 내려다봤다.
매끈하고 단단한 갑각 대신 연한 가죽의 보호를 받는 이 손.
의태 기관의 페로몬이 만들어 낸 환각이 아니다. 실물로 존재하는 인간의 손이다.
‘뒤틀린 혐오체’가 적용되면서 새로 얻은 변신 모드 ‘미지의 강탈자’의 효과다. 지금 나는 이 배에 있던 한 군인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군인의 가죽을 뒤집어 쓴 거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손등을 꼬집어서 당겼다. 핏기 없이 창백한 손 가죽이 실밥이 터지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찢어졌다. 찢어진 피부 사이로 비늘로 덮인 진짜 내 손이 보인다.
미지의 강탈자가 활성화되면 몸이 에이모프 유체와 비슷한 모습의 존재로 변한다. 꼬리와 갑각이 퇴화했기에 에이모프와 사람이 적당히 섞인 모습이다.
비늘까지 하얀색이다 보니 고전 영화 에X리X의 후속작에 나오는 하이브리드 괴물과 비슷한 느낌이다. 단지 팔 개수만 내가 더 많을 뿐이다.
사람 팔 역할을 맡을 2개의 팔을 뺀 나머지 4개의 팔들은 허리와 복부 부근에 얌전히 접혀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저 배가 좀 나온 것처럼 보인다.
다만 영화 속 괴물과 달리 이쪽은 방어력이 거의 0에 가깝다. 갑각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비늘의 두께도 얇다.
미지의 강탈자로 대체되기 전에 있었던 ‘영리한 약자’와 비교하면 전투력이 많이 떨어진다.
‘다만 이 변신 모드의 진가는 다른 곳에 있지.’
미지의 강탈자가 되면 ‘스킨워커’ ‘가죽의 집’ 이렇게 두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중 스킨워커는 체내에 저장된 유전자 정보 외부에서 획득 가능한 유기물을 소모해 나의 체형을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기물은 사람 볼프 같은 인간형 생물의 가죽이다. 스킨워커라는 이름 그대로 동물 가죽을 뒤집어쓰고 그 생물인 척하는 거다.
몸이 실제로 변하는 거라 카메라를 쉽게 회피할 수 있다. 심지어 체내의 열도 인간과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어 열 감시 장치 또한 우회가 가능하다.
두 번째 가죽의 집은 미지의 강탈자의 지속시간을 늘려주는 능력이다. 원래라면 7일이 지나고 해제됐어야 할 변신이 가죽의 집 덕분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현 상태에서 체형에 맞는 새 가죽 적당한 수분과 양분을 보급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가죽의 집이 자동으로 활성화되어 지속시간을 증가시킨다.
단점이라면 가죽을 바꿀 때마다 외형이 바뀐다는 점 수분을 꾸준히 공급하지 않으면 가죽이 말라 부서진다는 점일까? 관리하기가 좀 귀찮긴 해도 활동에 크게 지장을 주는 문제는 아니다.
간단히 말해 내가 보유한 잠입 특성들의 단점이 보완된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해도 좋겠지.
‘여기에 의태 기관도 같이 쓰면 완벽할 텐데.’
아쉽게도 두 특성은 양립이 불가능하다. 스킨워커는 유전자 정보를 소모시키면서 작동하고 반대로 의태 기관은 유전자 정보가 있어야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뭐 지금도 충분히 유용하니까.’
아무튼 미지의 강탈자 기생충 등의 여러 특성들 덕분에 배를 장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제 이 배에 담겨 있는 정보를 확인할 시간이다.
‘괜찮은 정보가 꽤 많을 것 같던데.’
메가콥은 아무런 이익이 없는 자선 사업은 절대 하지 않는다. 구조선도 원하는 것이 있기에 파견한 거다.
‘정보를 얻으려는 거겠지.’
선원 우주도시의 생존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현재 메가콥 전역에서 아웃스페이서가 출몰 중이다. 귀환파의 랭커 4위가 움직인 거다.
여기서 내가 메가콥의 지배자라면 가장 먼저 적 군단원의 외형부터 확인할 거다.
아웃스페이서의 하위 개체들은 외형과 역할이 비교적 직관적이다. 생체포대를 달았는데 날렵하게 생겼으면 원거리 지원 날카로운 발톱이 있고 몸이 크면 근거리 돌격대 역할을 하는 식이다.
그리고 나처럼 아웃스페이서와 많이 싸워본 사람은 외형만 보고도 어떤 유전자 정수가 들어갔는지 금방 안다. 적 군단이 유용한 정수를 얼마나 많이 확보했는지 대략 가늠할 수 있다.
메가콥의 랭커들이 이걸 모를 리 없다. 필시 정보 수집이 한창일 터. 랭커가 아닌 다른 노블캐피탈 프라임캐피탈들은 그걸 보고 따라하는 중이겠지.
아웃스페이서의 습격을 받은 생존자를 모으러 다니는 구조선도 그 목적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있다.
‘이 배 이 상황을 잘 이용하면….’
내가 발품을 팔지 않아도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내가 움직이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터. 아웃스페이서를 포식하는 것 말고도 아키라를 잡는 것에도 도움이 되겠지.
“어디 그러면 뭐가 있는지 봐볼까?”
나는 함장실 책상에 놓인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안에 담긴 내용물을 확인하려는 찰나 책상이 작게 흔들렸다.
책상뿐만 아니라 방을 둘러싼 벽에서도 규칙적인 진동이 느껴진다. 무언가가 우주선 외벽을 두드리고 있다.
‘26호인가.’
내가 배에 잠입한 동안 녀석들은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왔다. 이제 함선 장악이 끝났으니 애들도 들어오고 싶은가 보다.
나는 함교에 있는 감염자들을 시켜 격납고 문을 열고 그쪽으로 이동했다.
격납고에 도착하니 우아한 붉은 갤러곤과 귀여운 분홍색 씨 데몬이 보인다.
「큰애기 안녕!」
거대한 해파리를 닮은 26호가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몸이 줄어들어서 내 앞에 섰을 때는 작은 풍선만한 크기가 되었다.
그 상태로 녀석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녀석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단인 괴물의 촉수는 지금 목 가죽 안쪽에 숨겨져 있다. 나는 촉수를 귀와 입 구멍으로 살짝 빼냈다.
[즈즈즈(어서 와)]
「사람 모양 달라졌어.」
[즈(맞아)]
「얇은 부속지가 적은 사람!」
녀석은 인간 가죽이 신기한지 촉수로 내 머리를 쿡쿡 찔렀다.
「또」「난쟁이」「별로야」「큰어른」「본모습」「더」「좋아」
우아한 발걸음으로 걸어온 아드하이가 사념을 보냈다.
26호와 달리 인간으로 위장한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취향만큼은 참 한결같은 녀석이다. 나는 녀석을 달래기 위해 손으로 뿔과 목 사이 부분을 살살 긁어줬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오래 안 있어. 조금만 참아)]
「간지러워」
「나도! 나도!」
말과는 달리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긁기 어려운 부분 같아 보여 만져 줬는데 좋아해서 다행이다.
머리 위에서 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26호도 긁어달라고 어깨 위로 내려왔다.
[즈즈(좋아?)]
「응!」
「그럭저럭」「괜찮아」
“저희도 왔습니다.”
두 녀석을 긁어주고 있는 사이 스크리머 자매 PS-111과 이사벨이 격납고로 들어왔다. 나는 괴물의 촉수를 몸 안쪽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건 볼 때마다 아파보이네.”
“내 몸이 아니라서 아무 감각도 없어.”
나는 옷소매로 입과 귀에서 흘러내리는 체액을 닦았다. 지네처럼 긴 몸으로 똬리를 튼 이사벨의 시선이 내가 입은 군복에 향했다.
“어깨의 그 견장 지금은 함장으로 위장 중인가 보네.”
“뭐 그렇지.”
“밖에서 보니까 배 크기가 꽤 크던데. 이 정도 규모면 선원도 많이 필요하지 않아?”
함선 운행에 필요한 중요 인물들은 이미 기생충으로 감염시켜 놨다. 설령 부족한 부분이 생겨도 괜찮다. 이를 도와줄 존재가 이곳에 있으니까.
“함선 관리 문제는 저와 미니 스크리머들이 해결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대화에 끼어든 PS-111이 복부에서 미니 스크리머들을 꺼냈다.
“출동!”
“출동!”
녀석들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뾰족한 금속 다리를 바삐 놀리며 격납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걸 본 이사벨이 서둘러 한마디 했다.
“잠깐. 또 혼자 해결하려고 그러네. 그러지 말고 같이 해.”
“예? 알겠습니다.”
“전에 말했던 회선으로 미니 스크리머에게 접속하면 되지?”
“맞습니다. 다만 전에 말씀드린 사항만큼은 주의 부탁드립니다.”
“원격 조종 중 회선 변경은 무리를 줄 수 있다고 했지? 알았어.”
“지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함선 시설에 접속할 때는….”
그대로 대화를 이어가는 두 스크리머들.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서로 날선 독설을 날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미 화해한 건가?’
느낌상으로는 이사벨이 먼저 화를 푼 것이 아닐까 싶다. 언니에게 지적할 때의 말투에서 익숙함이 느껴지는 걸 보아 예전에도 이런 일이 여러 번 겪은 것 같았다.
‘현실에서도 이런 관계였으려나.’
자기주장이 강한 말썽꾸러기 언니 툴툴대지만 결국 언니 말을 따르는 순한 동생이라는 관계 말이다.
‘뭐 내가 없는 동안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네.’
아무튼 이걸로 나를 도와줄 애들이 무사히 도착했다. 쓸 만한 정보만 빼내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메가콥은 물론이고 구조선을 보낸 에저튼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황.
이번 사냥은 적의 영토 먹이의 내부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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