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9
‘역시 모르고 그냥 가네·’
저 멀리 작은 빛줄기 하나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게 보인다·
소형 초계함 크기의 잠수정이 깊은 심해의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들의 아래에서 무엇이 쫓아오고 있는지 전혀 모르면서 말이다·
‘뭐 평범한 인간이라면 나를 보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지금 나는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사용해 몸을 숨기는 중이다·
먼저 연막처럼 펼쳐져 나와 애들을 가려주고 있는 ‘암흑 장막’·
생체 파이프로부터 분출된 이 특수 물질은 기계의 탐지 시스템을 무효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원래라면 더 넓게 퍼져야 하나 수압 때문에 내 주변 언저리만 가리는 중이었다·
여기서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유일 특성 ‘섬뜩한 흉내꾼’이다·
섬뜩한 흉내꾼은 ‘강적의 증표’ 특성을 강화시켜주는 것 말고도 내게 강력한 위장 능력을 부여한다· 덕분에 암흑 장막 속에 숨은 내 몸은 주위 환경과 유사하게 변한 상태다·
전신을 감싼 외피의 재질은 얼음 바닥층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고, 거대한 머리갑각과 등의 침식 촉수는 외피의 무늬를 이용해 언덕의 능선 모양을 연출했다·
환경지물의 모양을 흉내내는 특성은 꽤 있지만, 섬뜩한 흉내꾼의 위장 효과는 그 무엇보다 뛰어나다· 그 수준은 눈에 카메라를 단 PS-111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정밀하다· 일반 생물의 눈으로는 알아보는 게 불가능하다·
거기다 환경의 변화가 실시간으로 반영되기까지 한다· 흐르는 물살과 그에 영향을 받은 바닥의 표면까지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잠수정이 접근해서 수차례 확인했음에도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적의 뒤를 쫓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딱 하나를 빼고·’
유일하게 번거로운 점은 애들과 딱 달라붙어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나와 함께 온 녀석들은 은폐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편이다· 메가콥의 탐지 시스템을 피하려면 적어도 암흑 장막의 범위 안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PS-111과 이사벨, 아드하이는 모두 내게 바짝 붙어서 이동 중이다·
PS-111은 딱정벌레처럼 날개를 접은 뒤 내 꼬리에 달라붙었고, 얇고 긴 몸을 지닌 이사벨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내 몸을 엄폐물로 삼아 움직였다·
아드하이는 이사벨만큼이나 날씬한 몸매를 지녔지만, 부피가 큰 날개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 특히 심해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레드아머’를 사용 중이라 더 눈에 띈다·
그래서 팔들로 꼭 껴안아서 녀석의 모습이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했다·
[즈즈즈(괜찮아?)]
「움직임」「불가」「답답해」「갑옷」「집중」「유지」「불편해」「그래도」
불만을 털어놓던 녀석이 문득 사념파를 멈췄다· 그러더니 내 품 안쪽에 머리를 푹 기댔다·
「가끔씩」「괜찮을 듯」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불평을 담은 사념파를 흘린 것과 달리 기분 자체는 괜찮아 보인다·
[즈즈(둘은?)]
「문제, 없, 어·」
「괜찮습니다· 극한지의 활동 상정· 개량됨·」
스크리머 자매는 우주 공간에서 했던 것처럼 사이킥 파워로 의사의 파장을 구현해서 대답했다·
아직 미숙한 동생과 달리 PS-111의 파장은 매우 또렷했다· 최고위원의 뇌를 이식하면서 기능이 향상된 거겠지·
셋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봤다·
암흑 장막의 경계 부근에서 작은 분홍색 해파리가 느긋하게 헤엄치고 있다· 우리 중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26호다·
오랜만에 고향과 비슷한 환경을 접해서 그런지 육지에 있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인다·
‘하긴 그럴 수밖에·’
씨데몬은 육상 활동이 가능하지만 주 서식처는 어디까지나 심해다· 신체만 봐도 땅 위에서 활동하기 적합한 구조가 아니다· 게임에서도 씨데몬을 공략하기 위해 육지로 유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히려 땅에서도 잘 돌아다니는 26호가 특이한 케이스다·
‘좋아해서 다행이네·’
즐겁게 수영하는 모습을 보니 묘한 감정이 든다·
26호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녀석이 좋아할만한 먹이를 사냥해서 주는 것 말고는 말이다·
‘아드하이네 집 근처에 바다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갤러곤들의 서식지 근처에는 바다가 없다· 강산으로 채워진 온천이 있긴 하나, 이건 바다라 할 수 없겠지·
‘특성으로 직접 만들어 봐?’
에이모프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생각 중인데, 26호가 헤엄쳐왔다·
「큰애기야· 여기 밥 하나도 없어·」
녀석은 이상하다는 감정을 담은 파장을 흘렸다·
‘확실히·’
내가 알기로 녹스에는 씨데몬이 서식하지 않지만, 다른 심해의 포식자들은 존재한다· 전에 만났던 ‘페일마스크’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외에도 심해에 서식하는 해양생물이 많다· 이렇게 깊이 내려왔으면 어떤 생물이든 한두 마리는 보여야 정상이다·
하나 여기까지 오면서 본 살아 있는 생물은 저기 앞서 가는 잠수정뿐이다·
‘이유는 둘 중 하나야·’
저 잠수정이 안전한 길로만 다니고 있거나, 아니면 메가콥이 녹스에 있는 위협 요소들을 전부 제거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쪽이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메가콥 플레이어들이 행성에 기지를 짓고 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야생동물을 싹 제거하는 거다· 위험 요소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서다· 겸사겸사 유전자 샘플도 얻고·
이 기지를 만든 자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큰애기한테 선물로 주고 싶었는데·」
[즈즈즈 즈 즈즈즈즈(괜찮아· 더 찾아보자)]
「응·」
기지의 주인이 이곳을 청소했다면 야생동물을 찾기 어려울 거다· 대신 저 잠수정이 향하는 기지에 먹을 만한 것들이 많겠지·
‘사냥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아쉽지만 그 부분은 이후 아웃스페이서와의 전투를 기대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잠수정 뒤를 따라갔다·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어둠만이 가득한 심해의 저편에 모래 알갱이만한 빛이 보인다·
‘저곳인가·’
빛과 가까워질수록 물에 잠긴 기지의 전경이 조금씩 드러났다·
수십km 깊이의 바다 아래, 인간이 빚은 구조물이 있다· 저곳이 심해의 연구기지다·
연구기지는 원고리 모양의 구조물이 반구(半球)형 구조물을 둘러싸는 구조였다· 토성의 반을 잘라놓으면 저런 모습일 거다·
‘꽤 크네?’
토성만큼은 아니더라도 기지의 규모는 규격 외로 크다· 바깥쪽에 위치한 고리를 보면 지름만 우주도시의 2배는 될 것 같았다·
「저만, 한, 기지, 처음 봐·」
「규모· 메가콥 통상 연구단지 이상입니다·」
도시를 본 이사벨과 PS-111이 한마디씩 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저렇게 큰 해저도시는 게임에서도 본 적 없다·
‘게다가 모양도 좀 다르고·’
일반적인 해저기지는 수상기지와의 교류를 위해 초대형 엘리베이터 타워와 통신탑을 설치한다· 하나 저 기지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밀시설이라 출입 통제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두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통신 시설까지 빼먹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접근해보자·’
나는 잠수정 추적을 관두고, 기지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PS-111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에이모프· 문제 있습니다·」
[즈즈(왜 그래?)]
「기지 통신망· 보안 시스템 철저합니다· 외부 간섭 불가합니다·」
[즈즈즈즈즈 즈즈(교란침으로도 안 돼?)]
「예· 불가합니다· 직접 연결· 유일한 방법입니다·」
전함의 통신망이나 위성도 손쉽게 해킹하는 녀석이다· 그런데도 어렵다고 하는 걸 보면 기지의 보안이 매우 높은 수준인 듯하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내부로 몰래 진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바다 전체를 감시할 정도인데 기지에 손상이 생기는 걸 모를까· 문제가 생기면 즉각 외부에 지원 요청을 하겠지·
‘감염자를 이용하는 것도 힘들고·’
기생충에 감염된 자들은 지금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수상기지에 있다· 그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와 잠입시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다·
그럴 바에는 기지 내부의 인원을 감염시킬 방법을 찾는 게 더 빠를 거다·
‘잠깐·’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위대한 감염체가 바뀐 뒤로 한 번도 안 써봤었지·’
감염, 둥지 관련 특성을 골라서 특별한 효과를 부여하는 유일 특성 ‘위대한 감염체’·
이것 덕분에 산성 진균을 브레스 형태로 쏘거나, 기계를 망가트리는 미생물을 구름 형태로 분사할 수 있었다·
위대한 감염체도 ‘뒤틀린 혐오체’의 영향을 받아 그 효과가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감염, 둥지 관련 특성을 각각 3개씩, 총 6개의 특성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하나 지금은 두 계열의 특성을 최대 3개까지 골라서 ‘정신오염 강화’라는 특수 효과를 부여하는 걸로 바뀌었다·
이렇게 바뀌면서 기존에 강화 효과를 받던 ‘기생 군체’나 ‘산성 진균샘’ 같은 특성들이 전부 초기화되었다·
그 후로는 지금까지 재지정하지 않았다· 딱히 필요하지 않아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써먹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지금이 그 기회인 것 같네·’
나는 텍스트박스를 활성화했다·
「위대한 감염체: 당신은 하나이면서 다수입니다· 감염, 둥지 강화 타입에 속하는 특성들 중 최대 3개를 선택해서 특수 효과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 ‘정신 오염’ 강화: 미설정, 미설정, 미설정
* 주의: 강화 효과가 모두 부여되면, 강화된 특성이 사라지기 전까지 다른 특성에 효과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추신: 관점에 따라 개인은 집단이 되기도 합니다·」
전과 달리 ‘미설정’으로 되어 있는 텍스트박스· 어떤 특성을 적용할 지는 결정했다·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통신 설비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정확한 추정 불가합니다·」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대략적인 위치와 구역만 알면 돼)]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나는 느릿하게 기지 주변을 돌았다· 도중에 PS-111이 통신 설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을 일러줬다·
위치 파악을 끝낸 뒤, 생각해뒀던 특성을 위대한 감염체로 설정했다· 기계들과 싸울 때 유용하게 쓰던 융합 특성, ‘그렘린 이끼’ 말이다·
‘전처럼 구름이 되어 퍼지는 식이면 좋을 텐데·’
아니면 정신 오염이라는 이름처럼 사이킥과 관련된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뭐가 됐든 직접 써보면 알겠지·’
나는 PS-111이 찍어준 지점 중 하나에 접근했다·
[즈즈 즈즈 즈즈즈즈즈(둘 다 잠시 떨어져 있어]
혹여 말려들 수도 있으니 스크리머 자매와 거리를 살짝 벌렸다· 그리고 새로운 능력을 얻은 그렘린 이끼를 사용했다·
내 몸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빛무리가 암흑 장막 밖에 노출되었다·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촘촘히 빛나는 빛의 알갱이들은 곧바로 얼음 지각층 위에 내려앉았다·
「와! 반짝반짝 예쁘다!」
26호의 감탄처럼 심해 아래에서 빛나는 그렘린 이끼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하나 보기만 그럴 뿐이다· 나의 에너지장이 감지한 그렘린 이끼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존재였다·
불길한 반딧불이들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고는 인간이 세운 구조물 위로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위대한 감염체: 당신은 하나이면서 다수입니다· 감염, 둥지 강화 타입에 속하는 특성들 중 최대 3개를 선택해서 특수 효과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 ‘정신 오염’ 강화: 그렘린 이끼, 미설정, 미설정
* 주의: 강화 효과가 모두 부여되면, 강화된 특성이 사라지기 전까지 다른 특성에 효과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추신: 관점에 따라 개인은 집단이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