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0
170 – 죄수의 동굴 # 1
수중 동굴 바깥은 지상 동굴이었다·
횃불을 켜자 여기저기 비치는 그림자들·
그림자들 또한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처럼 우리 주변으로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처음엔 당황했던 나였으나 그림자들을 자세히 본 순간 깜짝 놀라게 됐다·
“다희야 이거· 이 그림자· 꼭 권수아 같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해?”
구깃-·
평소 인상을 잘 찌푸리지 않는 다희가 눈썹 사이에 주름을 만들었다·
어떻게 알았냐면 그림자가 무척 풍만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사이즈는 한국인 중에서 권수아 정도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말을 사실대로 했다간 다희가 날 혼자 이곳에 두고 다시 물속으로 가버릴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얼버무렸다·
“그냥· 권수아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데 왜 이곳에 권수아 그림자가 있지? 잘 보니까 그림자들이···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들이네·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그림자일까?”
“음 난 잘 모르겠어·”
부싯돌을 부딪혀서 횃불을 붙이는 서바이벌 전문가 다희였지만 그림자를 알아보는 재주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림자들은 우리를 향해 섣부르게 다가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는 거리를 유지했다· 우리를 구경하는 느낌이다·
다희도 그들을 구경했다·
나는 다희를 구경했다·
축축-·
뚝뚝-·
다희의 젖은 옷자락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무척 추워 보였다·
얇은 천이 몸에 달라붙어서 그런가 하얀 살결도 비쳐 보이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나 물속에서 다희와 입을 맞췄구나·
당시에는 급했기 때문에 큰 생각을 못 했지만 갑자기 생각이 나니까 몹시 부끄러웠다·
나 혼자만 부끄러워 하는 건가?
다희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냥 인공호흡일 뿐이다 이건가·
다희가 말했다·
“그림자가 있다는 건 어딘가에 실제 형상이 있다는 거잖아· 어디에 있는 그림자가 비치고 있는 걸까? 이게 진짜 권수아의 그림자면 이 근처에 권수아가 있다는 거야?”
“나도 그건 모르겠어· 일단 여기가 3·5층은 맞는 것 같아· 나침반이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가보자· 주희를 찾고 여기서 얼른 나가야 해·”
양도희 누나에게서 받은 나침반의 바늘이 어느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다희랑 함께 나침반의 바늘을 따라 걸었는데 동굴 안이 워낙 구불구불하고 복잡해서 어지러웠다·
또 횃불에 비치는 그림자의 숫자가 몹시 많고 다양해서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이 동굴은 마치 그림자들의 세계 같았다·
“저거 봐 꼭 수업 듣는 것 같지 않아?”
다희의 말처럼 책상과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자들도 있었다· 자동차를 타는 그림자도 삽질을 하거나 망치질을 하는 듯한 그림자들도 있었다·
그림자들이 멋대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
3·5층은 그런 장소였다·
째깍-·
그때 내 머릿속에 시계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혹시나 싶어 조언 기능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언·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엉성한 시계》의 조언 : 현재 시각은 오전 4시 30분입니다·」
오전 4시 30분·
내 기분 탓이 아니라면 이 그림자 속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만큼 현실에서도 시간이 흐른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이 장소에서 시간을 너무 보내버리고 만다면?
우리도 양주희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혼수상태에 빠져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입원해야만 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빠르게 이 장소를 빠져나가는 게 옳을 터·
“양주희!”
나는 동굴이 왕왕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쳐 양주희를 불렀다·
그림자들만 존재하는 세상·
큰 소리를 내도 우리에게 해코지를 할 것은 없을 것처럼 느껴졌으니· 하지만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르르르-·
어디선가 굶주린 짐승이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네 발의 짐승을 닮은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덩치가 자동차처럼 큰 것을 보니까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의 그림자 같았다·
팟-!
내가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그림자가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벽에서 바닥을 타고 덤벼든 놈은 이내 앞발을 들어 나를 할퀴었는데 아주 놀랍고도 경악스럽게도 내 팔이 녀석의 앞발 그림자에 닿은 순간 살갗이 터지며 피가 뿜어졌다·
“아아악!”
“영원아!”
“이 새끼들 평범한 그림자가 아니야!”
그림자라고 방심했다·
설마 그림자가 나를 공격해올 줄이야·
문제는 이 호랑이 새끼가 포기할 줄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제2 제3의 공격이 올 터·
어떻게 하지?
내가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다희가 동굴 바닥에 잔잔히 흐르고 있는 물가에 횃불을 집어 넣었다· 치이이익-·
동굴이 다시 어둠 속에 잠겼고 그림자들의 모습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
더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횃불을 켜서 그림자가 보였잖아· 혹시 횃불을 끄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진짜였어· 다친 곳은 어때?”
“그냥 긁힌 정도야·”
사실 긁힌 정도는 아니었다·
내 팔은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처럼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으니·
아팠다·
하지만 죽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희야 덕분에 살았다· 상태창·”
횃불을 킬 수 없어진 이상 우리가 의지할 불빛은 상태창의 미약한 빛밖에 없었다·
「《엉성한 시계》의 조언 : 현재 시각은 오전 4시 31분입니다·」
정말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이곳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동등하게 흐르지 않았다· 이곳의 시간이 훨씬 더 빠르다·
내 체감상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 했을 때부터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던 것 같은데· 실제로 상태창을 보니 겨우 1분이 지나가 있었다·
내가 《시계》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시간 하나만큼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시간이 거의 30배나 느리다·
현실의 1분이 여기선 30분·
현실의 1년이 여기서는 30년·
잠깐 그렇다는 말은 현실의 하루가 여기서는···한 달?
양주희는 이곳에 한 달이나 있었다는 소리가 됐다·
# # #
횃불도 없이 상태창의 미약한 불빛에만 의지하여 동굴을 돌아다니니 아주 으스스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바늘을 따라 한참 걷기를 몇 분·
으으으으-·
누군가 앓는 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혹시 양주희인가 싶어서 황급히 걸음을 옮겨보니 넝마 같은 것을 입은 사람이 바닥에 웅크려 있었다·
머리가 다 빠진 노인이었는데 솔직히 연령이나 성별 신원 같은 건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 생김새가 비누처럼 미끈하고 흉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가 아닌데···?”
다희가 나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아아아악!”
바닥에 웅크려 있던 노인이 우리를 향해 덤벼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란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넘어지고 말았고 노인이 그런 내 위에 올라타 내 어깨를 이빨도 몇 없는 입으로 크게 물었다·
콰득-·
“아아악! 존나 아팟!”
그림자 호랑이에게 발톱으로 할퀴어지고 미친 노인에게 깨물리고·
아주 오늘이 내 수난의 날이구나·
눈앞이 아득해질 때 다희가 손에 쥐고 있던 목사 천애수의 명패로 노인의 머리통을 퍽-후려쳤다·
“죽어!”
퍽-퍽퍽퍽퍽퍽퍽-·
그야말로 무자비한 난타였다·
그 덕분에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영원아 괜찮아?”
“아니·”
내 어깨의 살점이 움푹 뜯겨져나갔다·
완전 미친 노인이었다·
“저 미친놈이 날 잡아먹으려고 했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기에 잘 살펴보니 엄청나게 앙상한 노인이었다· 옷은 완전 넝마였는데 잘 보니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황금이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원판· 금화인가 싶었는데 이상한 무늬 같은 게 잔뜩 그려져 있었다· 품에서는 거의 다 삭아버린 두루마리도 나왔다·
“뭐라 적혀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낯선 언어였다·
다만 「1522」나 「1523 10 2」같은 숫자가 적혀 있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건 아무래도 시간 같았다·
이 서책은 설마 1523년도의 물건인가?
그렇다면 이 노인은 몇 살이라는 거지? 어느 시대 사람이야?
뭐가 됐든 내 어깨를 갑자기 물어 뜯다니·
문제는 방금의 싸움으로 나침반까지 박살났다는 점이었다·
진짜 큰일 났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가 있었다·
저벅 저벅-·
어디선가 발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왔다·
방금 있었던 일 때문인지 이 세상에 존재할 인간이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았던 나는 일단 어디론가 숨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스슥-·
때마침 근처에 나랑 다희가 숨을 만한 틈이 있었다·
그 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자 녹색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 둘이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채 군도(軍刀) 같은 것을 차고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 앞에 널브러져 있는 노인의 시체를 보고는 하하-웃었다·
“━━──·”
“━─━·”
그들은 낯선 언어를 말했다·
잘 들어보니까 일본어 같다·
그들은 죽어버린 노인의 시체를 짊어지고 사라졌는데 저들이 시체로 무엇을 하려는지 대체 저들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들은 손에 쥐고 있던 전등으로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발견한 듯했다· 어깨를 깨물리고 팔을 할퀴어졌던 내 몸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그들의 손전등이 점점 더 핏자국을 추격하다가 마침내 바위 틈새에 숨어 있는 우리를 발견했다· 스릉-·
허리춤에서 군도를 망설임 없이 뽑아든 일본 무리·
그들의 눈이 비열한 살의로 빛날 때 나는 악을 내지르듯이 소리쳤다·
“잠깐! 죠또 마떼!”
잠깐 멈춰!
내 열의가 닿은 건지 일본 군인들이 멈췄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외지인이냐?”
어눌한 한국어였다·
하지만 알아들을 정도는 됐다·
다만 외지인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바깥 세상에서 왔냐는 말인가?
“네 저희는 외지인이에요!”
“그렇다면 바깥 세상은 몇 년도지?”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했다·
일단 대화에 어울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바깥 세상은 2천 년도가 넘었어요·”
“전쟁은? 누가 승리했지?”
전쟁? 뭔 전쟁·
순간 무수히 많은 전쟁들이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계사 시간에 수업 좀 더 잘 들을 걸 그랬네·
다만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 복식으로 보아 저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인인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일본은 전쟁에서 졌잖아· 그걸 사실대로 말하면 저 군도가 우리를 향해 날아들지 않을까?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그럴 듯한 답을 내렸다·
“그 뭐냐· 지금 세상은 미소 냉전을 지나서 미중패권주의의 싸움이 계속 되고 있어요· 유가가 마구 치솟고 경제는 어려워지고· 세상은 저출산의 늪에 빠져서 저출산과의 전쟁을····”
“너희가 입고 있는 제복의 문양은 텐쇼인의 문양인가?”
교복에 그려진 문양?
별 모양이 그려진 학교 마크를 말하는 걸까?
“이제 보니 너희들은 텐쇼인 백작가의 사람인 모양이로구나·”
일본인들의 태도가 제법 누그러졌다·
천씨 가문의 매국적이고 친일적 태도가 당장 우리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느덧 3월도 2/3가 흘러가고 있습니닷···!!!
과연 새로운 봄 새로운 3월을 독자님들께서 잘 보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닷···!!!
저 미츄리··· 낮에 돌아다니지 않는 야행성 생물이다보니···봄이 온지도 사실 잘 몰랐다는 것입니닷···!!!
그런 의미에서 독자님들께 방문의 부두술을 걸어드립니닷···!!!
봄과 행운 등 즐거운 것들이 독자님들의 곁에 찾아가는 서비스로 방문하게 되는 부두술입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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