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7
187 – 거짓말 # 2
비밀기지에 모두가 모였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복도에서 나온지 하루도 되질 않았지만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난 기분이었다·
“거의 1년은 지난 기분이다· 그렇지?”
다희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밝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다희가 이 모임이 끝난 이후 어떤 방식으로든 죽어버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기로 했다·
“치킨 시킬까요?”
흐흐흐-웃는 권수아·
다만 홍미리 선생님이 한마디 지적했다·
“지금 장사하고 있는 치킨집이 없을 텐데· 다 찾아봤거든· 사람들 다 가게 닫고 난동 피우기 바쁘잖아·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어·”
그건 그랬다· 배를 곪지 않는 세상에서 멀쩡히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비밀기지에 있는 재료들로 적당히 요리를 해서 먹어야 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즉석 피자를 만들어봤는데 다들 솜씨가 엉터리였다·
“안 되는 건 끝까지 안 되네·”
코에 밀가루를 묻히고 푸하하-웃는 양주희· 양주희가 웃는 것을 보는 것도 엄청나게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언니를 찾지 못했다고 나에게 또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던 모습을 봤던 것이 언제였더라· 하지만 지금의 양주희는 조금 초탈한 것처럼 보였다·
다들 그랬다·
내가 다희의 죽음을 막기 위해 무수한 시간을 기다려 포인트를 모으고 과거로 계속해서 연어처럼 거슬러올라가고 있던 사이 그 시간을 함께 겪었던 모두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생이란 참 대단하구나·
며칠 보지 않으면 훌쩍 바뀌어 있는 법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피자도 먹고 카드게임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도 회상했다·
“맨 처음에 머리 귀신 때문에 죽을 뻔했다니까· 그리고 내가 복도에서 탈출을 하기 위해 필살기를 쓰려고 양주희랑 사귀었는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웃겨· 양주희가 막 사귄 지 100일째까지는 손만 잡아야 한다고 그랬다니까?”
내 이야기에 푸하하-웃음을 터뜨리는 봉지연·
“뭐야 자기가 뭐 성모 마리아야?”
“그 그런 적이 언제 있다고 그래!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양주희는 빽-소리를 지르며 현실을 부정했다· 얼굴이 몹시 붉었다· 기억나지 않는 건가· 뭐 그렇겠지· 그때 양주희는 탈출하지 못했으니·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죽고 또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잃어왔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나랑 같이 고생해줘서 고맙다· 따지고 보면 너희들 모두 나 때문에 휘말린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앞으로도 고생좀 해·”
온갖 귀신과 만나 허우적거렸던 옛날의 일들이 지금은 평화로운 일상처럼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일들이 조금 그립기도 했다·
“그래서 봉지연 너 정말 정석이랑 안 사귈 거야?”
나는 봉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곧 봉지연이 크게 발끈했다·
“뭔 소리야 갑자기!”
“확실히 거절하든가· 아니면 받아주든가 해라· 자꾸 그러다간 진서연한테 정석이 뺏긴다·”
“닥쳐! 좀!”
화를 내는 봉지연과 다르게 이번에는 양주희가 푸하핫-웃음을 터뜨렸다·
양주희는 봉지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쟤는 누가 자기 쫓아오는 거 안 좋아해· 쟤는 자기가 쫓아가는 거 좋아한대· 그래서 사람들 사귀어도 오래 못 갔던 거야· 서로 좋아하게 되면 흥미가 식고 마는 거지·”
무슨 그런 고약한 심보가 다 있지· 완전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타입이라는 것이구나· 정석은 솔직히 나쁜 남자 타입은 되질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쁜 남자라는 거·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아무래도 나쁜 여자애들에게 휘둘릴 팔자였다· 나는 다희를 바라봤다· 다희는 아주 못되 쳐먹은 계집애였다·
사람의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버렸으면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하호호-웃다니·
이 모임이 끝나면 다희는 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죽어버리겠지·
우리에게 내일의 밤을 돌려주기 위해·
나는 그것을 막을 생각이었다·
“그럼 나는 화장실 좀·”
슬쩍-·
나는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구교사로 향했다· 영원의 시간에 잠겨버린 구교사는 이제 현실과 꿈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나는 3층으로 들어가 4층의 입구를 향했고 그곳은 어마어마한 물로 가득 잠겨 사람이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내게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잠수한 뒤 바다로 들어갔다·
거대한 시계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 시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고민했다·
“····”
고민은 짧았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그러나 내게는 우주의 시작부터 끝에 이를 만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두근 두근-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시계를 향해 나는 강하게 염원했다·
시계가 이루어줄 수 있는 것은 한번에 하나뿐·
내가 소원을 빌면 그 전에 누군가가 바랐던 것은 덮어씌워지듯 사라지고 만다· 그것이 단 하나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시계가 가진 약점·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이 시계에 손을 얹었던 여학생이 빌었던 아주 작고 사소한 소망이었다·
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선 그 여학생의 소원을 지워야만 했다· 꿈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 꿈을 하나 이루기 위해선 누군가 하나의 소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처음 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골랐고 세상이 홍수에 잠겼다·
그 결과 친구들이 서로 반목했고 다희의 경우에는 내 잘못을 책임지기 위해 영원히 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가족을 갖고 싶어·
시계가 들어주었던 누군가의 소망이 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작고 이기적인 그 마음의 위로 나는 강하게 염원했다·
─일상으로·
째각-째각-시계가 올바른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본디 있어선 안 됐을 나의 존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 # #
소녀는 딱딱한 책상 위에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 눈부신 햇살이 스며드는 교실의 풍경이 보였다·
「1-D」반의 아이들이 저마다 떠드는 게 보였다·
몸이 무거웠다·
엄청나게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잠을 잔 걸까· 핸드폰을 들어올리자 시간이 보였다·
4월 1일· 오전 10시·
“아·”
그런가· 오늘은 만우절이었구나· 양주희는 그때서야 모든 게 기억 났다· 아침에 있었던 가짜 고백 사건의 소동 같은 것들 말이다·
갑자기 화가 났다·
어째선지 매우 화가 났다·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게 뭔지 기억은 나질 않지만 화를 내야만 할 것 같았다·
“야! 이 개새끼야!”
팡-!
그래서 양주희는 앞자리에 앉은 남학생의 의자를 발로 찼다· 곧 콰당-넘어진 남학생· 느닷 없이 발로 차인 남학생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씨 갑자기 뭔데? 미쳤어?”
“뭐냐니 하영원 너· 진짜 죽을래?”
“뭔 소리야· 누가 뭐라고?”
“···?”
양주희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남학생을 바라봤다· 이제보니 남학생은 곱슬머리에 안경을 쓴 친구였다·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에는 「김준호」라고 적혀 있는데 영 낯설었다·
양주희는 당황했다· 그야 자신의 앞 자리에 이런 학생이 앉아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
“뭐야 너 씨발 누군데? 하영원은 어디에 있어!”
“씁 아까부터 뭔 소리 하는 거야? 꿈 꿨어?”
“···꿈?”
“아니면 뭐 만우절 거짓말하는 거야? 노잼이니까 그만 해라·”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잠깐만···· 너희 하영원을 몰라?”
“뭐라는 거야·”
벌떡-·
양주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양주희에게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이었다·
“너희 하영원을 몰라?”
“···?”
“쟤 왜 저래·”
“몰라·”
“어그로 끄는 거야· 관심 받고 싶어서·”
“거짓말하지 마! 만우절 장난이지! 이딴 장난 하나도 재미 없어! 너희 하영원을 몰라? 너희들 하영원을 잊은 거냐고!”
오랜 시간 꿈을 꾼 기분이었다· 자신을 향해 커다란 몰래 카메라의 장난이라도 누군가 꾸민 느낌이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팟-·
양주희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운동장으로· 많은 풍경들이 기억하던 것과 달랐는데 가장 기이한 건 우람하게 솟아있는 신교사에 간판처럼 적힌 글자들이었다·
「대전 양지 고등학교」
낯선 지명· 낯선 이름이었다·
“뭐야 이거· 뭐야···· 거짓말이지···?”
양주희는 자신이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 커다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이 느껴졌는데 그게 무엇인지 설명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느낌이었다·
소녀의 눈망울에는 이제 커다란 눈물이 맺혔다·
말랑말랑 내 마음 마치 맑은 도랑물─·
그때 양주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싶어서 액정을 바라보자 「언니」라고 적힌 글자가 보였다·
─야! 양주희! 너 또 땡땡이 쳤어? 홍예리 선생님한테 전화 왔잖아!
“언니?”
양주희의 머릿속에 꽝꽝 얼어붙어 있던 눈들이 녹는 듯했다·
불가해했던 상황들이 따스한 봄의 날씨처럼 이해가 됐다·
“···언니를 찾아주려고·”
─여보세요? 너 어디야?
양주희는 전화를 끊고 머릿속에 선명한 번호를 향해 통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갑고 처량하다·
─지금 거신 번호는····
“···헉 헉!”
양주희는 이제 핸드폰을 대충 집어 던지고 허겁지겁 달렸다·
구교사를 향해서· 그곳으로 가면 그 지하로 가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하지만 구교사가 있어야 했을 자리에 커다란 강당이 들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몹시 거대한 생활 체육관이었다·
양주희의 기억에 없던 건물이다·
“시바알! 이게 뭔데!”
양주희는 그만 참지 못하고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를 찾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양주희는 자신의 안에 항상 꼿꼿하게 서 있었던 무언가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문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더 이상 달릴 힘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병신새끼!”
누군가를 향해 하는 욕설일까·
누구에게도 향할 수 없는 욕설이었다·
그런 양주희를 향해 어떤 남학생이 다가왔다·
“너도 정신이 들었나 보구나·”
“···너는····”
“이곳은 우리가 기억하던 개룡 광역시가 아닌 것 같아· 대전이라나 봐· 영지 고등학교의 이름도 양지(陽地) 고등학교로 바뀌었고· 참고로 내가 이상함을 느낀 건 다섯 살 때야·”
“····”
“아무도 시계나 수맥에 대해서 기억 못 해· 애초에 그런 게 없었다는 것처럼· 세상이 처음부터 다시 쓰여진 것처럼 변했어· 어쩌면 이게 우리의 일상이었던 거야· 귀신도 없고 악몽도 없어·”
정석이 양주희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시시하지· 우리가 고작 이런 따분한 날이나 보내려고 그 고생을 했던 게 아닌데· 그러니까 같이 되돌려보자고· 모두를 모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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