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신입생 대표 연설이 끝나고 나서도 입학식은 조금 더 이어졌다.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간단한 공지 교수진 소개 시설 안내 등… 학교 첫날 알려주는 전형적인 사항들이었다.
그나마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었다면 기숙사 배정에 관련된 부분 정도일까.
당장 오늘부터 입실이 가능하다는 소식은 꽤나 쓸만했다.
더 이상 여관에 묵을 필요 없이 아카데미에 자리를 잡아도 괜찮다는 뜻이었으니까.
정말 원작이 시작되는구나.
실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갈리마르 아카데미의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건투를 기원하겠습니다.]
학장의 격려를 마지막으로 행사는 마무리된다.
조금씩 강당을 빠져나가는 학생들.
나 또한 그들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으면 별안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간다.
“스네이커스 공자님!”
“여기야.”
분홍색 머리칼의 파일럿 그리고 주홍색 머리칼의 여우.
각각 레지아와 아이린이었다.
두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강당 주변을 서성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두 분 모두 저를 기다려주셨군요. 이렇게 감동일 수가…!”
갑작스럽게 떨어진 수석 타이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약간 짜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두 사람을 보니 스르르 씻겨져나간다.
무려 게임 속 최애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다고.
이런 게 바로 성공한 덕후 아닐까.
“무슨 소리야.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으면서.”
“저를 이토록 각별히 아껴주실 줄은 몰랐군요! 역시 저희는 모두 친구인 걸까요?”
“아니 아까 전에 당신이….”
“그럼요 아이린 양! 너무 감사한 걸요.”
“…됐다.”
감동을 깨려는 다소 불순한 시도가 있었지만 대충 무시하는 것으로 넘겼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할까요?”
마침 기숙사도 열렸겠다.
배정 받은 방이나 한 번 둘러볼 생각이었다. 이상이 있다면 미리 알아야 하니까.
학원 자체가 웬만한 소도시에 준할 정도로 넓은 만큼 기숙사로 이어지는 길 또한 파악해두는 편이 좋았다.
마차를 타지 않으면 불편할 정도의 거리였기에.
우리 셋은 근처 마차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레지아와 아이린. 둘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여서 그런지 아직 서로에게 어색한 느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스몰토크로 분위기를 풀어간다.
“그래서… 다들 제 연설은 어떠셨나요?”
가볍게 던지는 한마디 물음.
나름 청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좋은 연설이었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의 감상이 궁금했다.
“에 에? 네?”
“왜 그렇게 당황하실까요? 아무런 의도 없이 물어본 거니까 편하게 답해주셔도 좋아요.”
“아 네 네. 그 공자님의 여 연설 말씀이시죠….”
레지아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질문을 받자마자 고장난 사람처럼 삐걱거리더니 말까지 열심히 더듬어댄다.
뭐지? 뭔 문제라도 있나?
“레지아 양? 왜 그러나요?”
“어 어어… 멋 멋졌어요! 공자님의 연설 완전히 마 마음을 울렸달까요!”
“하하~! 그리 평가해주시니 영광이군요!”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하던가.
일단 고래는 모르겠고 뱀새끼 정도는 춤추게 할 수 있는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탭댄스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아이린이 질린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당신은 진짜….”
“네? 왜 그러시죠 아이린 양?”
“…아무것도 아니야.”
“흠?”
“됐으니까 앞이나 보고 걸어.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세상에 저를 걱정해주시다니. 드디어 제게 마음을 열어주시는 건가요!”
“절대 아니야.”
“이리 매정할 수가…!”
유치하게 이어가는 티키타카.
그렇게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걷고 있던 때 문득 시선이 느껴진다.
“…?”
누군가 길목을 가로막은 채로 서있었다.
갑자기 뭐지. 그런 생각으로 시선을 들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의 소녀.
나는 벙찐 잡음을 흘린다.
“…어.”
꽤나 익숙한 외형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백금빛의 머리칼. 푸른색 눈동자는 투명하게 세상을 비춘다.
“안녕.”
나풀거리듯이 떨어지는 인사.
목소리마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다. 마치 새벽 바닷가처럼 잔잔하다.
나는 소녀를 알고 있었다.
원작 ‘어린 왕자가 보는 세계’ 게임의 또 다른 주인공.
유저들이 뽑은 최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삼는 등장인물.
‘샬롯.’
제국의 제 1황녀 샤를로테 폰 리틀 슈타우펜.
본래 원작에서는 수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였으나 나 때문에 차석으로 밀려난 소녀였다.
나는 곧바로 무릎을 꿇는다.
“제국의 별을 뵙습니다.”
“응 반가워.”
샬롯은 고개를 끄덕인다.
다소 자유분방한 말투. 4차원 소녀라는 그녀의 특징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나는 조용히 머리를 굴린다.
샬롯은 타인에게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성격인데.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언가 잘못된 건가? 설마 수석의 자리를 뺏긴 것 때문에 압력을 넣으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샬롯은 딱히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모든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해야겠지. 그녀의 소중한 ‘장미’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렇다면 대체 왜.’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이유를 유추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굳어있던 때.
“그냥 왔어. 궁금해서.”
먼저 입을 떼는 샬롯.
그녀는 내 정수리를 몇 번 툭툭 두드리더니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뜬금없는 그녀의 행동에 모두가 물음표를 찍는다.
“머리. 부드럽네.”
“예?”
“그럼 안녕. 나중에 또 보자.”
“…?”
직후 볼일이 끝났다는 것처럼 등을 돌린다.
갑작스럽게 다가와서는 인사만 하고 다시 가버리는 소녀.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대화의 흐름에 사고가 멈춘다.
뭐지…?
나는 방금 뭘 당한 걸까. 벨튀도 아니고 인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지 당혹스러운 감정이 들 틈도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어린왕자식 화법이라는 건가.
얼떨떨한 상황에 잠시 굳어있지만 샬롯은 이미 저 멀리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혹시 말이야… 내가 머리가 나빠서 흐름을 못 따라간 건가?”
“에? 그 그럼 저 저도 머리가 나쁜가 봐요….”
당황한 것은 여우와 조종수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가만히 꿇고 있던 나는 곧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름 새로운 등장인물을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는데 감동을 느끼기도 전에 떠나버리다니.
“뭐… 이런 모습이 매력인 거지만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주변에서 힐끗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대충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이만 갈까요.”
나는 조용히 걸음을 떼어낸다.
그러자 의문에 잠겨있던 두 사람도 정신을 차리며 뒤를 따라온다.
‘그건 그렇고.’
샬롯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무언가 궁금하다고 했는데… 정확히 들은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이왕이면 끝까지 말해주지.
나는 싱거운 질문을 곱씹으며 걸었다.
***
아카데미 마차를 타고 도착한 기숙사 건물.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웬만한 저택에 준하는… 아니 어쩌면 더 거대할 지도 모르는 건물들의 나열이었다.
일반 학원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퀄리티의 시설.
다들 갈리마르가 처음이라서 그런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레지아는 대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었고 아이린도 아닌 척 하지만 주변 풍경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래 이런 진풍경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지.
무려 최대 5000명의 인원까지 수용이 가능한 준도시급 학원인데.
‘가슴이 웅장해진다.’
물론 나도 다를 건 없었다.
게임에서 몇 번이고 봤었던 배경이지만 실제로 보는 감동은 차원이 다르다고 할까.
저절로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덜컹덜컹-.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더 달리고 나서야 우리는 배정 받은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아이린이 머물 공간이었다.
레지아가 배정 받은 건물은 다소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먼저 마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한다.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레지아 양.”
“저도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입학식에서 혼자 외로웠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후후…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리죠.”
나는 가볍게 거짓말을 입에 담는다.
“다시 만나도록 해요. 나의 친구.”
“친 친구…?”
“그래요. 친구.”
우리는 입학 시험부터 함께한 둘도 없는 친구잖아요?
느긋하게 그런 말을 속삭이자 처음에는 멍하던 레지아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진다.
호감작을 위한 대사였는데 다행히도 성공인 모양이었다.
레지아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며 끄덕였다.
“네! 다음에 뵐게요…!”
이히히힝-!
소녀의 인사와 동시에 마차는 다시금 출발한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으면 옆에서 쿡쿡 찌르는 시선이 느껴진다.
“왜 그렇게 보시나요? 아이린 양.”
“아니… 뭔가 유독 불길하게 웃는다 싶어서. 무슨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건가 싶었지.”
“대체 저를 뭐로 보시는 건가요.”
“믿을 수 없는 사람.”
“이것 참. 서러워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나는 눈가를 훔치며 우는 척을 연기를 펼쳤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더라.
“그건 그렇고… 어땠나요?”
“뭘 말하는 거야?”
“레지아 양 말이에요. 사람이 참 괜찮지 않나요?”
“어리숙해 보이던데.”
“아직 어려서 그렇죠. 속내를 숨기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순진한 면이 투명하게 비치는 거고….”
“당신도 어리잖아.”
툭 한마디를 던지는 아이린. 나는 그런 여우를 향해서 답한다.
“어리긴 하지만… 제가 순진해 보이진 않잖아요?”
비틀어진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만이 자리하고 있다.
소녀는 내 얼굴을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것처럼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확실히 아니긴 하네.”
뭐지. 이거 은근히 상처 받네.
물론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던진 말이긴 한데 그래도 막상 답이 돌아오니 마음이 아팠다.
사람을 생긴 거로 뭐라 하는 게 어디 있어.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세상.
언젠간 전부 엎어버려야지.
그렇게 잠시 슬픔을 곱씹고 있으면 별안간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방금 생각난 게 있습니다.”
“뭔데.”
“제가 배정 받는 방은 아마 학원에서 가장 넓을 겁니다.”
갈리마르 아카데미는 기본적으로 등수 별 분배 시스템이다.
높은 등수에 위치할수록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넓어지며 생활의 질 또한 향상된다.
기숙사 또한 마찬가지다.
“수석의 방인 만큼 엄청나게 넓겠죠. 그래서 장점이 있습니다!”
“장점?”
“앞으로 청소할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부분이죠. 앞으로 아이린 양이 전부 혼자서 열정적으로 처리해주셔야 하는 업무랍니다.”
“…그게 도대체 어디가 좋은 부분인데?”
“저야 상관 없죠. 제가 청소하는 것도 아닌 걸요.”
“….”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시전하는 티배깅.
아이린의 표정이 썩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한동안 티격태격하며 걸음을 밟았다.
***
시끌벅적했던 입학식이 끝나고 일주일의 여유가 생겼다.
학원의 모든 일정이 시작되는 것은 반 배정 시험 이후. 한마디로 며칠 동안은 별다른 스케줄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직 아카데미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생들.
가볍게 적응의 기간을 가지라는 학원 측의 배려였다.
나는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카데미를 둘러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으니까.
지난 3년의 세월 동안 가장 갈망했던 공간.
드디어 염원을 이루겠다는 생각에 설렘이 몰아친다.
그렇게 소풍을 나온 마음으로 학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는데….
“당신! 제 말 이해했나요?”
“….”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수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만하게 굴지 말라는 거에요!”
얘는 또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