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
《쐐애애액-!》
굉음을 뒤로 강철의 파편들이 쏟아진다.
수백 자루의 검은 폭풍처럼 몰아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외감이 들도록 만드는 풍경이었다.
마치 절대 닿을 수 없는 재능의 벽을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재앙에도 주눅 들지 않는 소년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서 휘날리는 금발.
그는 사납게 돌진하는 파도를 향해서 팔을 뻗었다. 막아 보이겠다는 것처럼.
《깨져라.》
모두가 소년을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의 입술이 영창을 읊는 순간. 시시하게 흘러가던 판국이 뒤집힌다.
《콰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흔들린다.
거칠게 번쩍이는 장면 너머로 보이는 것은 주변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칠흑색 그림자.
불길하게 일렁이는 어둠이었다.
《챙그랑-!》
직후 원형 경기장을 덮고 있던 결계가 깨진다.
방금까지만 해도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재능의 벽이 한낱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어진다.
조금씩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3초도 안되는 찰나의 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후우.》
금발의 소년은 무심하게 숨을 고른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손끝으로 잔류해있는 마나를 털어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장면이 정지한다.
“….”
교직원들은 말 없이 화면을 응시한다.
아까부터 몇 번이고 해당 부분을 돌려보고 있었지만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첨예하게 요동치는 살기.
극한까지 뻗어나가는 마나의 파동.
위험한 상황에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배짱까지.
전부 학생의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저마다 복잡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으면 무심코 튀어나오는 중얼거림이 있다.
“…이게 정말 아카데미에 막 입학한 학생이라고?”
멍한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묻어있다.
어쩌면 현재 대기실에 앉아있는 모든 교직원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 했다.
그들은 오류가 발생한 마력 장치처럼 잠깐 버벅거리더니 이내 폭주하기 시작한다.
“내가 방금 대체 뭘 본 거지?”
“빨리 아까 장면으로 돌려보십쇼! 뭔가 잘못 찍힌 것 아닙니까?”
“말도 안돼.”
“이게 학생의 수준에서 가능한 마법이라고…?”
“적은 마나를 역으로 활용해서 분산을 일으킨 건가? 학생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아닌데 엄청나잖아!”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이 튀어나온 거죠?”
잔뜩 흥분한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본다.
압도적으로 패배할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었기 때문인지 교직원 일동이 보내는 반응은 더 없이 뜨거웠다.
그야말로 시대에 이름을 남길 원석의 등장이었으니.
“뱀의 아들이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건만… 흥미로운 재능이군.”
“설마 황녀 전하를 뛰어넘는 천재가 있을 줄이야.”
“이건 졸업생 수준마저 한참을 넘어섰잖아?”
“못해도 조교급… 조금 무리하면 교수급으로 쳐줘도 될 것 같은데요?”
“에이~ 그건 너무 갔죠.”
“역시 그렇죠?”
젊은 교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아무래도 과도한 평가를 내린 모양이었다.
갈리마르 아카데미의 교수진은 한 명 한 명이 천외천으로 이루어진 괴물들이었으니 비교 대상 자체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이는 소년이 의도한 부분이었다.
결계를 부수는 과정에서 교묘하게 힘을 조절했고 일정한 경지 이상으로 본인을 드러내지 않았다.
타인의 눈에 소년은 그저 ‘엄청난 재능의 원석’ 정도로 비칠 것이다.
“그래도 대단하네요.”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죠. 당장 수업을 보조하는 조교들보다도 실력이 좋은데요.”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경지라니… 미래가 기대되네요.”
교직원들은 알지 못했다.
소년이 마음만 먹으면 교직원 전원을 가볍게 몰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때로는 무지가 목숨을 살리는 법이다.
무지한 교수들은 한동안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정숙하도록 하지.”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정리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학장.
백발의 노인은 담담하게 반응한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동공에서 연륜을 엿볼 수 있었다.
“셀레나.”
“네 스승님.”
“아무래도 반 배정 시험의 수석이 정해진 것 같구나.”
“그렇네요.”
셀레나는 미적지근한 대답을 흘린다.
피로에 젖은 붉은색 눈동자가 깜빡거린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뒤로 가녀린 손에는 언제나처럼 독한 술병이 들려있다.
명백한 취객의 모습이었다.
“….”
학장은 애써 한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그녀에게 빚을 진 상황이었으니까.
마지 못해 타이르는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실수를 했구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입생 수석에 관한 건 말이다. 네가 승인한 서류를 의심하고 조건까지 걸어가며 몰아세우지 않았느냐.”
“아… 네 뭐.”
여인은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인다.
애초부터 신경 쓰지 않았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학장으로서는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너라면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만… 혹시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원하는 것이라 하심은…?”
“내 선에서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주마.”
“흠.”
셀레나는 그제서야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흐릿한 미소와 함께 입술을 떼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기수에서 제가….”
뒤로 이어지는 제자의 요청.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에 다른 교직원들의 동공이 커진다.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는 동료 교수들.
그러거나 말거나 셀레나는 들고 있던 술병을 입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
계획이 완벽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원래는 시험에서 화려하게 패배하고 수석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었는데… 상황이 너무 꼬여서 어쩔 수 없었다.
샬롯의 넘치는 배려심을 고려하지 않았던 나의 패착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절망적인 흐름은 아니었다.
이번 기회로 어린 왕자와 제대로 안면을 트기도 했고 잠깐이지만 잡담도 몇 마디 나누었으니까.
반응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경계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샬롯의 성격을 생각하면 따로 나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지도 않을 것 같고.’
어차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사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한데… 그 양반과는 되도록이면 엮이고 싶지 않았다.
대충 이 정도에서 만족하자.
나는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로 가장 먼저 비치는 것은 다름 아닌 원형 경기장.
“흐음.”
나는 대기석에 앉은 채로 시험을 관전 중이었다.
현재 경기장 위로 서있는 것은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 그리고 푸른색 롤빵 머리의 악역 영애.
나는 슬그머니 대진표를 확인한다.
[제 23시험]
[레지아 파일러츠 vs 에밀리아 베니티]
‘주인공과 악녀의 대결인가….’
원작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가만히 해당 부분을 떠올린다.
[EP1. 이방인]
레지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학원에 입성한다.
그런 그녀를 기다리는 하나의 이벤트가 있었으니… 바로 반 배정 시험.
최상위권 학생으로서 부담감은 있었지만 그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욱 컸다.
이번 기회에 학생들과 안면을 터둘 생각이었다.
-나도 친구를 만드는 거야.
-으으… 조금 긴장되지만 그래도 잘 해보자!
방랑하는 삶으로 인해 평생 친구 한 명 없었던 레지아.
그녀는 다짐한다.
이번에는 기필코 좋은 인연을 쌓겠다고.
그렇게 자신 있는 걸음으로 나아간 경기장에서….
-볼 품 없네요.
소녀는 너덜너덜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상대가 좋지 않았다.
샤를로테 다음 가는 천재로 불리던 베니티 공녀였으니까.
-본인의 주제를 자각할 필요가 있어요.
-이곳은 자격 있는 이들을 위한 장소… 한낱 평민 따위가 넘봐도 괜찮은 곳이 아니에요.
평민의 신분으로 입학한 주인공.
당연하게도 악역 영애는 그녀를 눈엣가시 취급한다.
그러던 중 반 배정 시험이라는 기회가 찾아왔고 에밀리아는 상대를 철저하게 실력으로 굴복시킨다.
가녀린 마음까지 전부.
-떠나세요 이방인.
차갑게 소녀를 겨누는 목소리.
가혹한 한마디는 오래도록 마음의 상처가 되어 남는다.
그렇게 시작부터 구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첫 번째 에피소드의 대강적인 줄거리다.
“…걱정이네요.”
무심코 튀어나오는 혼잣말.
성장에는 시련이 따른다.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착잡한 눈으로 시험을 지켜보고 있던 때.
“진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긴 하네.”
“아이린 양.”
옆에 앉아있던 여우가 중얼거린다.
등받이에 기댄 채로 시험을 관전하고 있는 메이드 복 차림의 소녀. 아이린은 곧 갸웃하며 질문한다.
“그런데 저 분홍 머리… 지난번에 소환술사라고 하지 않았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소환은 안하고 맨몸으로 싸우고 있는 거야?”
“아.”
아이린의 말대로였다.
원형 경기장 안으로는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니까.
입학식 때 보여주었던 늠름한 자태의 와이번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가녀린 소녀만이 자리에서 떨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쓰게 웃는다.
“사정이 있어서요.”
“사정?”
“레지아 양의 약점… 이라고 해야 할까요.”
레지아는 패닉에 빠지면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
소환 의식에 최우선으로 필요한 정신력 해당 부분이 평균보다 압도적으로 부족한 사람이었기에.
급박한 상황에는 소환이 불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원작 게임에서는 ‘혼란’ 효과에 걸릴 시 모든 스킬 사용 불가 판정에 걸리기도 했다.
강력하지만 그만큼 캐어가 필요한 캐릭터.
‘후반부에는 결국 약점을 극복하긴 하지만….’
지금은 튜토리얼에 가까운 시점이었으니까.
시험의 양상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타깝네.”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레지아 양의 매력이죠.”
“그런데 당신은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분홍 머리가 그런 이야기를 해줬을 리도 없고….”
“후후… 정말 알고 싶으신가요?”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실눈을 뒤로 불길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 오싹한 분위기가 맴도는 웃음이었다.
“…아니 사양할게.”
“다행이네요. 어떻게 대답해드려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들 내가 이렇게 웃으면 시선을 피하더라.
덕분에 곤란한 질문이 들어오거나 대답을 피하고 싶을 때.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아이린은 슬쩍 대화 주제를 틀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저러다가 다치는 거 아니야? 분홍 머리는 기초 마법 밖에 못 쓰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을 겁니다.”
“무슨 근거로?”
“글쎄요.”
비록 악역 영애로 등장하는 엑스트라지만.
에밀리아는 자신이 정한 선을 철저하게 지키는 인물이었다.
정신적으로는 레지아를 여러 번 무너지게 만들었지만 진심으로 그녀가 다치도록 만드는 성격은 아니었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저도 속으로는 걱정하게 되네요.”
“의외네.”
“흠?”
“당신이 누군가를 걱정하는 것 말이야. 아무도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하하 어찌 그럴 수 있을까요. 저도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인데.”
“…정말 사람이 맞긴 해?”
“아니 그러면 저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키메라?”
“…그만두죠.”
분명 전에도 여러 번 비슷한 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싸이코패스 괴물 이번에는 키메라인가.
다음에는 또 어떤 기상천외한 답변이 돌아올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속으로는 나를 에드워드 오빠 취급하고 있었다니.’
통탄스러운 사실이었다.
서러운 마음을 담아서 여우의 꼬리를 움켜쥔다.
“히약?!”
“벌입니다.”
“자 잠깐만…! 꼬 꼬리는 안돼!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 흐힉!?”
“달게 받으세요.”
부드러운 털뭉치를 마구 쓰다듬는다.
그렇게 한동안 괘씸한 여우를 교육하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다.
시험 종료를 알리는 목소리였다.
《제 23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학생들은 교직원의 안내에 따라 퇴장해주시기 바랍니다.》
경기장에는 두 명의 소녀가 서있다.
싸늘한 분위기로 등을 돌리는 악역 영애. 그 뒤로 무릎을 꿇고 있는 주인공.
《레지아 파일러츠의 기권. 승자는 에밀리아 베니티입니다.》
이변은 없었다.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는 한동안 굳어있더니 이내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떨리는 걸음으로 경기장을 벗어난다.
유독 외롭게 비치는 뒷모습이었다.
“그럼… 저희도 슬슬 일어나볼까요?”
“벌써? 아직 10팀 정도 남아있는데.”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친구라면 힘들 때 곁을 지켜줘야 하니까요.”
“또 무슨 생각이야…?”
“후후.”
나는 대답 대신 미소 짓는다.
올려다본 하늘이 유독 흐렸다. 먹구름이 잔뜩 낀 게 아무래도 비가 올 모양이었다.
여우를 향해 넌지시 묻는다.
“아이린 양.”
“왜.”
“비가 올 것 같군요.”
“우산이라면 챙겨왔어… 사람은 두 명 밖에 없는데 왜 굳이 3개나 준비하라고 한 거야?”
“씌워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나는 간단히 답한다.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면 어디.
우리 주인공 나데나데 좀 해주러 가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