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
쐐애애액-!
공기가 매섭게 잘려나가는 소리.
뒤를 이어 한 자루의 창이 쇄도한다.
직선으로 빠르게 떨어지는 공격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검면을 방패처럼 세운다.
터엉-!
직후 묵직한 충격이 손끝에 전해진다.
자연스럽게 몸이 뒤로 밀려난다.
가녀린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괴력.
짜릿한 감각을 뒤로 자세를 바로 잡고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도발이 날아온다.
“꽤 버티네요? 단번에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사납게 비틀리는 입꼬리.
소녀의 손에는 얼음으로 조형된 창 한 자루가 들려있다.
에밀리아의 능력 [빙결]이었다.
“그래봤자 한 마리 벌레에 불과하지만!!”
쉬이이이익-!
등 뒤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볍게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한다.
콰곽-!
바닥에 박힌 것은 한 발의 화살.
고개를 돌려보니 사각에서 추가로 날아오는 얼음의 파편들이 보인다.
빈틈을 노린 기습이다.
허나 당황하지 않는다.
“이런이런~ 곤란하네요.”
서걱-!
여유롭게 휘두른 검격이 화살을 잘라낸다.
얼음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진다.
“쳇…!”
혀를 차며 물러나는 소녀.
푸른색 눈동자에는 진득한 짜증이 담겨있다.
동요하는 것일까.
쉽게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던 거품 수석.
그런 상대가 아까부터 유연하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싱긋 미소 짓는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만?”
“하…!”
헛웃음을 터트린다.
무시하던 벌레에게 이런 도발을 들을 줄은 몰랐던 걸까.
역시 쉽게 흔들리는 멘탈이었다.
“감히 당신 따위가…!”
“어이쿠.”
채애애앵!!
첨예하게 터져 나오는 파열음.
감정적으로 내지른 창격은 그림자에 먹히고 만다. 우리는 잠시 서로 날을 맞댄 채로 힘 겨루기를 이어간다.
부릅 뜬 눈에는 독살스러운 빛이 가득하다.
카드드득… 터엉!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소녀를 밀어낸다.
반동으로 약간 벌어지는 거리.
“이건 실망인걸요.”
싱글벙글 티배깅을 이어간다.
“나름 자신 있게 말씀하셔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30분이 지나도록 한 대도 스치지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닥쳐요.”
“이래서야 수석은 어렵겠네요.”
“닥치라니까…!”
아 행복해.
이런 게 도파민이지.
반응이 좋으니까 긁는 맛이 일품이었다.
중간중간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창날을 쳐내면서도 나는 싱글벙글 고로시를 이어간다.
“제 발끝이라도 맞춰보시는 게 어떤가요?”
“찢어버리겠어요. 반드시 그 입을…!”
“그거 참 기대되는군요~? 혹시 언제쯤 찢어주실지 여쭈어도 될까요?”
“감히 베니티의 공녀에게…!”
“베니티의 수준도 참으로 알만하네요. 고작 이런 게 후계자라니.”
채앵! 콰득 카그극…!
뾰족한 소음이 이어질수록 소녀는 분위기에 휩쓸린다.
어느새 결투는 일방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하아 하아…!”
어느새 지친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에밀리아.
푸른색 머리칼은 땀으로 젖어있다.
이쯤이면 슬슬 다리에 힘이 풀릴 법도 한데 아직까지 창을 잡고 있는 모습.
역시 독종은 독종이라는 건가.
“하으 허억…!”
“충분히 훌륭한 실력입니다만… 상대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아무리 고로시가 즐겁다고는 할지라도 일부러 상대를 깎아내릴 마음 같은 건 없었으니까.
에밀리아는 분명 이번 세대 중 손에 꼽히는 천재였다.
갖은 노력으로 다져진 탄탄한 기본기.
압도적인 빙결 마법을 뒤로 이어지는 창술 저격 심리전은 이미 학생 수준을 벗어났다.
과장 조금 보태서 에밀리아 두 명이면 샬롯을 당해낼 수 있는 정도.
역사에 남을 재능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고 할까.
소녀에게는 자격이 충분했다.
단지… 상대가 인간이 아니었을 뿐이다.
“하하~ 그런 공격으로는 닿을 수 없답니다?”
채앵-!
사각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다시 한 번 쳐낸다.
맥없이 떨어져 나가는 빙결의 파편.
지켜보는 이들 사이에서도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학생들.
-대 대체…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거야?
-베니티 공녀님께서 아무런 저항도 못하시는데?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건가…?
-거품 수석이 너무 잘 싸우고 있잖아.
-완전 압도하는 것 같아.
-아까부터 일부러 방어만 하고 있어. 마치 베니티 공녀님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에밀리아도 분명 듣고 있겠지.
저들이 수근거리는 반응을.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위상이 무너지고 치밀하게 준비했던 무대는 스스로를 옭아매는 덫이 된다.
열등감에 남아있는 흉터를 잡아뜯는 대목이었다.
“지금이라도 기권하시는 게 어떨까요?”
“….”
결투 시작 전 소녀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이왕 진심으로 임하기로 한 거 누더기가 될 정도로 잘근잘근 밟아줄 생각이었다.
물론 소녀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했다.
잠시 호흡을 다스리던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이쪽을 노려본다.
“…누구 마음대로.”
끈적한 살기가 풍긴다.
지독하기도 하지.
결국 끝을 볼 생각인 모양이었다.
에밀리아는 들고 있던 얼음창을 버리더니 양 손을 모으며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투명했던 벽안은 이미 탁하게 물든다.
“당신 같은 사람에겐 절대로 지지 않아요… 나는 절대로 져서는 안돼.”
파직 파지직-!
푸른빛의 스파크가 튄다.
체내의 마나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충돌시키고 수십 만의 마찰을 통해 임의적으로 일으키는 ‘마나 폭주’ 상태.
어지간한 컨트롤로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미친 활용이었다.
격동하는 흐름 속에서.
붉은 입술이 영창을 읊는다.
“혹한의 겨울이여.”
기록이 세워지기 이전.
무구하던 세계에 서리꽃을 피워냈던 메리벨이여.
설한의 정당한 후계자인 나의 부름을 들으라.
위대했던 그대의 살육을 탐하고.
몰락한 마녀들의 눈물을 모아 비애의 탑을 쌓고자 하니.
“전부 지워라.”
-에밀리아 류 빙결 마법 오의-
‘서릿발’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의 온도는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소녀의 발끝을 중심으로는 새하얀 성에가 끼기 시작했고.
입 밖으로는 맑은 입김이 피어났다.
어느새 에밀리아의 등 뒤로는 거대한 빙하 조각들이 떠올라 있었다.
“하아….”
하늘을 가득 매운 일만 자루의 얼음창.
나는 그 진풍경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어코 궁극기를 꺼내는구나.
항상 게임 너머로만 보다가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까 감회가 새롭잖아.
촤르르륵-!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저절로 압도당하는 느낌.
소란스럽던 관중석의 학생들도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교차한다.
서로의 눈빛에는 패배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자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독기 혹은 확신만이 자리하고 있다.
찰나의 대치.
“겨울아.”
덧없이 깨지는 평화.
붉은 입술은 마지막 문장을 마치고.
“몰아쳐라.”
동시에.
하늘을 수놓고 있던 일만 자루의 창이 일제히 쏟아진다.
마치 연청색으로 이루어진 소나기처럼.
쏴아아아아-!!
거센 빗발이 겨냥한 곳은 당연하게도 내가 서있는 자리였다.
아득한 절망을 선사하는 창의 폭포.
하지만.
“후후.”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웃는다.
너무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멋지네요.”
상대가 먼저 좋은 걸 보여줬으니 이번에는 내가 보여줄 차례인가.
슬며시 손을 뻗는다.
일렁이는 검은색 안개.
차분하게 ‘거짓말’을 응축시킨다.
쐐애애액-!!
주변의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음.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총을 만들어 쏟아지는 빗줄기를 향해 겨눈다.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후후.”
샬롯 때처럼 거창할 필요도 없다.
단순한 격의 차이.
오로지 출력으로 찍어 누른다.
손끝에 모인 힘 방아쇠를 당기듯이 영창을 읊조린다.
“깨져라.”
딸깍.
다음 순간.
경기장 전체가 까맣게 번진다.
***
학생들은 하나같이 흥분에 젖어있었다.
거품 수석과 악역 영애의 결투.
“베니티 공녀님께서 기어코 칼을 뽑으셨구나.”
“그 사람도 참 안됐네.”
“스네이커스 공자… 의외로 실력은 꽤 하는 것 같던데 그래도 수석 자리에 있는 건 좀 아니긴 했어.”
“황녀님을 재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아?”
“그래도 좋은 구경거리 생겼네.”
에밀리아처럼 표현은 하지 않았어도.
내심 반 배정 시험의 결과에 의문을 품고 있던 학생들.
그들로서는 이번 결투가 흥미로울 수 밖에 없었다.
지난 번에는 샤를로테의 결계 때문에 보지 못했던 소년의 실력을 본격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으니.
“누가 이길 것 같냐?”
“그야 당연히 베니티 공녀님 아닌가요?”
“역시 그런가.”
“뛰어나신 분이니까요. 황녀 전하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수석의 자리를 차지하셨겠죠.”
“빙결 마법에 있어서는 따라올 또래가 없다고 하던데.”
딱히 반전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에밀리아’라는 이름의 위상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1분 안에 공녀님께서 승리하신다는 쪽에 걸게.”
“그럼 나는 30초!”
“다들 공녀님을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니야…? 난 5초라고 생각한다.”
관중석의 학생들은 저마다 승패를 점친다.
수석의 패배는 확실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학생들의 예측과는 다르게.
싸움은 치열한 접전으로 이어진다.
《채앵! 카드득…! 터엉!》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분전하는 듯 싶었다.
“뭐야?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데?”
“동작도 깔끔하고 움직임도 나쁘지 않아… 분명 거품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게 수준급이야.”
“결국엔 공녀님께서 이기시겠지만… 어라?”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점점 한쪽으로 치우치는 흐름.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에밀리아는 힘에 부치는 기색이 보이는 반면 소년은 여유롭게 회피를 이어가고 있다.
공격은 한 번도 하지 않은 채로.
“대 대체…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거야?”
“베니티 공녀님께서 아무런 저항도 못하시는데?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건가…?”
“거품 수석이 너무 잘 싸우고 있잖아.”
완전 압도하는 것 같아.
“아까부터 일부러 방어만 하고 있어. 마치 베니티 공녀님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눈에 띄게 밀리는 악역 영애.
관중석이 당황으로 물든다.
에밀리아와 합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놀라왔는데 이제는 그걸 넘어 압도하는 중이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전개를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특별할 것 없는 범재에 불과했다.
허면 현재의 장면은 무엇이란 말인가.
“말도 안돼.”
“공녀님께서 농락 당하신다고…?”
하나의 가정이 뇌리를 스친다.
학원에 큰 반발을 남겼던 반 배정 시험.
기권패를 당했던 샤를로테.
그녀가 경기를 포기했던 것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기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되는 가정이.
“설마 그럴 리가….”
어수선하게 물드는 공기.
바로 그때.
결투는 기어코 극한을 향해 달린다.
《겨울아.》
궁지에 몰린 소녀는 더 없이 위태롭다.
날카로운 선단을 걷는 듯 하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억지로 나머지 마나를 폭발시키며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의 출력을 끌어낸다.
새파란 얼음이 하늘을 덮는다.
“맙소사… 저게 대체 뭐야?”
“손에 꼽히는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의 경지였다고…?”
“경기장 전체가 박살나겠는데.”
“이거 누구 한 명 죽는 거 아니야?”
“관리 담당이 말려야 할 것 같은데…!?”
급하게 교수들을 찾지만 그들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결국.
소녀의 입술이 영창을 마친다.
별처럼 빽빽이 수놓고 있던 일만 자루의 창들이 움직인다.
《몰아쳐라.》
콰아아아아-!
고막을 찌르고 들어오는 굉음.
사납게 몰아치는 겨울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도래한다.
그야말로 한 편의 멸망을 보는 듯 했다.
“꺄아아악!”
“어떡해!”
“아무리 수석이라도 저 창날에 휩쓸리면 최소 중상일 텐데…!”
아이들은 참사를 예상하며 물러난다.
하지만.
소년은 달랐다.
홀로 피식 웃음을 흘리던 뱀은 제자리에 가만히 선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겨눈다.
미친 것일까.
당장 뒷걸음질을 쳐도 모자랄 판에 굳어있다니.
학생들은 비명을 지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입술을 달싹인다.
《깨져라.》
아주 잠깐이지만 닫혀있던 실눈이 뜨인다.
투명하게 빛나는 백색 눈동자.
시간이 정지하는 듯 하다.
직후.
손끝에서 쏘아지는 한 줌의 그림자.
그것은 창들의 소나기를 뚫고 들어가더니 이내 사방으로 빠르게 뻗어나간다.
새까맣게 물드는 하늘.
《쿠득 쿠드득-!》
순식간에 코팅된다.
표면이 칠흑으로 뒤덮인 얼음창들은 허공에서 그대로 멈춰버린다.
뚝뚝 흘러내리는 음영.
따악-!
뒤이어 소년은 손가락을 튕긴다.
우아하게.
다음 순간.
《챙그랑!!》
일만 자루의 얼음.
일제히 깨진다.
표독스러운 겨울이 수많은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잘게 부서지고 부서진다.
휘이이이-.
검은색 눈이 내린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서 흑의 눈꽃들은 유려하게 춤을 춘다.
마치 밤에 젖은 설원처럼.
이질적이되 아름답다.
경기장 바닥으로 소복하게 쌓이는 층에 저절로 시선을 빼앗긴다.
은은하게 빛을 내는 황홀경.
“….”
어느새 적막으로 가득한 관중석.
학생들은 멍하니 그림자에 섞인 겨울을 감상하고 있다.
직전의 혼란마저 잊은 채로.
사박사박-.
한 줌의 꿈결을 닮아있는 장면.
몽환적인 풍경 속에서 홀로 걸음을 밟아가는 한 명의 소년이 있다.
뱀은 너그럽게 묻는다.
《아직도 더 하실 생각이신가요?》
사람을 홀리는 속삭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