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
“그건 그렇고 의외네요.”
“네?”
“저를 알아보신 것 말입니다. 보통 수인들은 다른 종족에게 무관심하다고 들었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여우들이 제일 심하죠.”
“호오?”
자연스럽게 말을 붙여오는 남자.
아이린은 잠시 미간을 굽히더니 이내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한다.
“저는 스승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스승이라 하심은?”
“검술이죠. 어렸을 적부터 부모처럼 저를 돌봐주셨는데 그분께서 당신의 열렬한 지지자였거든요.”
“이렇게 들으니 괜히 쑥스럽네요. 으하하!”
“지긋지긋했죠.”
소녀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잔잔한 바람을 따라 물결치는 밀밭. 대지는 풍요로움을 증명하듯 황금빛으로 쓸려 나간다.
그리운 풍경에 백발의 노인이 서있다.
-말하지 않았으냐 아이린.
-검이란 무릇 올바른 빛을 담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붉은 검성이 그랬던 것처럼… 쉽게 부러지되 흔들리지 않고 쉽게 넘어지되 드러눕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는 너의 별을 찾거라.
그때는 마냥 잔소리라 생각하며 넘겼는데.
“설교를 당할 때마다 듣는 이름이었으니까요.”
“그것 참 유감입니다.”
“막상 설교의 주인공을 옆에 두고 있으니… 묘하네요 신기하기도 하고.”
“음음!”
검성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짧은 내용으로 툭툭 끊어지는 대화.
잠시 침묵을 머금고 있던 아이린 그녀는 곧 가장 믿기 어려웠던 질문을 꺼낸다.
본격적으로 던지는 직구였다.
“분명 2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요.”
“….”
“어떻게 된 일인가요.”
“….”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일까.
검성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풍기던 유쾌한 분위기마저 지운 채로 서늘한 적막이 주변을 덮어간다.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공기.
‘실수했나.’
반응을 보니 즐거운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데.
조금은 돌려서 질문하는 쪽이 나았을까.
긴장한 소녀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직한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푸흐… 풉 으하하!”
“…?”
“죄송합니다! 너무 굳어 계시는 것 같아서 장난 한 번 쳐봤습니다!”
싸늘한 경계가 풀어진다.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웃고 있는 검성. 영락없는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친근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꺼림칙하다고 해야 할지.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간다.
“사실 별 다른 이야기는 없답니다.”
“….”
“단지 정의라는 이름을 너무 맹신했기에 약간의 대가를 치렀을 뿐이죠.”
장난스러운 말투 치고는 꽤나 뼈가 있는 대목이었다.
탁한 동공으로 찰나의 감정이 스친다.
허나 담담하게 읊조리는 입술이었다.
“본래라면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역사에 남은 기록처럼 허무하게.”
찬란했던 별의 추락.
하지만 그런 절망 속에도 손을 내미는 누군가 있었다.
“단장님께서 저를 거두어주셨습니다.”
“그 음흉한 사람이요…?”
“그야말로 기적이었죠. 이후로는 그분께 충성을 다하며 살고 있답니다.”
검성은 어렴풋이 입꼬리를 올린다.
이전처럼 장난기는 묻어있었지만 결코 가볍게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어른만이 지을 수 있는 마모된 표정이었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랍니다. 하나같이 단장님께 삶을 빚진 녀석들이죠.”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광신도처럼 소년을 섬기던 단원들.
꺼림칙하게만 보였던 그들의 믿음에도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는 듯 했다.
“불쌍한 고아 억울한 사형수 빌어먹을 동냥아치… 마지막으로 떨어진 별까지.”
길거리 폐품이나 다름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분께서는 저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버렸다.
마음이 부서지고 의지는 시들며 희망은 의미를 잃었다.
그렇게 죽어가던 때.
금빛의 뱀이 그들을 찾았다.
“이것이 믿음의 이유.”
“….”
“특히 부단장 직위를 맡고 있는 아이는 각별하죠. 그분께 집착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그건 당사자가 아니라서 말씀 드리기 어렵겠네요.”
“그런가요.”
“아무튼.”
가볍게 대화를 정리하는 남자.
검성은 진지했던 기색을 털어내며 마지막으로 몇 마디를 남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길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습관처럼 입에 담으시던 말씀이죠.
길들지 않은 것에는 고유의 색깔이 없는 법.
오직 무언가에 길든 사람만이 유의미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답니다.
황홀하게 번지는 금빛을.
“부디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
“….”
관계 그리고 길들임.
분명 지난 번에도 들었던 말이지만 여전히 뜻이 가늠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풀리지 않는 물음에 걸린 듯 했다.
적절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한동안 굳어있는 여우.
그녀는 결국 고개만을 조용히 끄덕였다.
***
정신없이 지나가버린 하루.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었기에 기숙사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돌아가야만 했다.
여우는 동생들과 짧은 이별을 나누고 있었다.
“언니이… 벌써 가는 거야”
“그냥 여기 같이 있으면 안돼요? 선생님들 다 착한데….”
“흐잉….”
아쉬운 마음에 울먹이는 아이들.
아이린은 복잡한 미소를 뒤로 하며 어린 여우들을 달랜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꼭 가야 하는 거에요…?”
“약속을 했거든. 친구랑 맺은 약속은 함부로 어기면 안된다고 저번에 언니가 말했지?”
“네에….”
풀이 죽은 채로 돌아오는 대답.
물론 아이들도 진심으로 떼를 쓰거나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다.
소녀가 그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헌신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너무 일찍 철이 든 유년기였다.
오랜 시간 동안 핍박에 눌린 채로 살았으니 어쩌면 세상이 강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을 어린 시절에 망각하도록.
예정보다 일찍 마모된 어른이 되도록 말이다.
“…방학하면 다시 올게.”
소녀는 씁쓸하게 미소 짓는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으면 옆에 있던 소년이 끼어든다.
능글거리는 실눈이었다.
“이런이런~ 멋진 여우들은 고작 이런 일로 슬퍼하지 않는다고요?”
능숙하게 주머니를 뒤적이는 손.
뒤이어 작은 공간에서 수많은 초콜릿과 사탕들이 줄줄이 튀어나온다.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소년은 아이들마다 한 움큼씩 쥐어준다.
살짝 윙크를 곁들이며.
“제가 주는 선물이랍니다.”
“훌쩍 고맙습니다아….”
“크응… 감사합니다.”
“후후 별말씀을.”
소년은 싱긋 웃는다.
역시 능숙하게 아이들을 다루는 모습이었다. 특유의 가벼운 말투는 분위기를 환기한다.
어쩌면 아이린을 위한 배려였을까.
‘대체.’
여우는 복잡한 눈으로 뱀을 응시한다.
속으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 반복되는 의문이 재생되고 있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걸까.’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지옥 같았던 철장에서 자신을 구해주었고 동생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었다.
매번 꺼림칙하게 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히 대하려는 듯 했다.
‘이상해.’
인간은 비열한 족속들이다.
타인의 호의를 악용하고 기만하며 결국 모든 것을 앗아간다.
이 사실을 깨닫는 동안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
-미안하구나 아이린.
-언제까지나 너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기어코 스승을 잃었던 날.
소녀는 맹세했다.
다시는 인간을 믿지 않겠다고.
어떤 간사한 사탕발림이 있어도 코웃음을 치며 조롱해주겠다고.
하지만.
“돌아갈 시간이네요 아이린 양.”
“…응.”
“너무 아쉬워 하지는 말아요. 굳이 방학이 아니더라도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오면 되니까요.”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앙칼지게 밀어내고 있음에도 매번 해맑게 다가오는 실눈을 보고 있으면.
견고했던 벽이 흔들리는 듯 했다.
이토록 무거운 호의는 처음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악착 같았던 지난 2년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자신이 나약해졌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이린은 애써 잡생각을 털어내고는 태연하게 입술을 떼었다.
“…아이들을 당신 단원들이 잘 맡아줄 거라 믿을게.”
“물론이죠. 사실은 아스트라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아시다시피 아직은 눈을 조심해야 하는 시기라서요.”
“보육원? 그런 것도 하고 있어?
“소소한 규모랍니다.”
“그래도 놀라운데….”
나직이 돌아오는 여우의 반응.
소년은 잠시 굳는 듯 싶다가도 곧 차분하게 대답한다.
“그냥 아이들이 혼자 있지 않았으면 했답니다.”
뱀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간다.
“어린 시절의 외로운 기억은… 평생 흉터로 남으니까요.”
담담하게 울리는 목소리.
분명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소년의 표정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마치 머나먼 과거를 암시하는 것처럼.
“…?”
“자자~ 잡소리는 이 정도에서 마칠까요?”
낯선 분위기에 여우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뱀은 출구가 있는 쪽으로 앞서 걸어간다.
지나치는 단원들이랑 인사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 받으며 다음을 기약하는 금빛의 뒷모습.
“….”
멍하니 서있던 아이린은 멈췄던 걸음을 떼어낸다.
길게 이어지는 뱀의 잔상을 따라서.
***
한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한 건물.
어둠과 고요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로브를 쓴 몇 명의 괴한들이 모여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듯한 그들은 원탁을 앞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군.”
가장 중심에 있던 로브가 그리 중얼거린다.
딱히 무엇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나 동료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뿌리를 내릴 때가 왔다.”
새까만 원탁의 중심으로는 금빛의 문양이 존재한다.
거꾸로 뒤집힌 나무를 연상케 하는 그림.
이런 사특한 피륙을 덮어쓰고 다니는 이들은 하나 밖에 없었다.
대륙 최대 규모의 흑마법사 집단 바오브.
지난 몇 년 간 잠잠했던 이단이 다시금 꿈틀거리는 모습이었다.
“바로 2년 전의 오늘. 그토록 우리를 귀찮게 하던 ‘붉은 검성’을 죽였다.”
다소 출혈이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제 대륙에서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강자는 없을 터 이번에야 말로 그분의 의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마침 갈리마르 아카데미에 질 좋은 학생들이 들어왔다고 하는군.”
용을 다루는 소환술사.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는 제국의 1황녀.
베니티 가문의 쌍둥이 남매.
혜성처럼 등장한 스네이커스 가문의 수석까지.
“전부 그분께 바치는 좋은 제물이 되어줄 거야.”
-쾅!!
로브의 등 뒤로는 거대한 철장이 존재한다.
그 안에 갇힌 거대한 무언가 날뛰고 있다. 인간의 살점이 덕지덕지 발려있는 흉측한 조형물.
마치 살육에 목 마른 것처럼 비명을 내지른다.
-끼에에에엑!!
고막을 찢고 들어오는 듯한 소음이었지만 로브들은 인상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다들 준비해라.”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들의 시야에는 벌써 피와 화염으로 뒤덮인 대륙의 풍경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등골을 내달리는 쾌감에 어깨가 떨린다.
“우리가 다시 세상에 나설 때가 되었으니.”
뿌리를 내려라 사특한 나무들아.
“모든 것은 만물의 근원이자 우리의 주인이신… 마신(魔神) 그분을 위하여.”
“그분을 위하여.”
어둠과 고요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위험은 그렇게 모습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린 왕자는 다시 장미들을 찾아가서 말했다.
“너희는 나의 꽃과 하나도 닮지 않았어. 너희는 아무 의미가 없어. 누구도 너희를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도 길들지 않았으니까. 너희는 길들여지기 전의 여우와 같아.”
-어린 왕자와 장미꽃들의 대화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