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나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분명 전생에서도 했었던 고민이었다·
사람의 관점이라는 게 참 신기한게 남자가 죽었다가 여자로 환생했으면 자신을 남성이라 인식하겠지만 여자가 전생에는 남자였음을 깨달으면 여전히 자신을 여성이라 인식할 것이다·
요컨대 입장의 차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딱딱 나누어졌으면 편했겠지만 기억이라는게 그렇게 명확하게 나뉘어지지 않는다·
자아라는건 불완전하고 불명확해서 나의 전생을 나로 인식하기도 하고 아예 타인이라고 인식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전생의 기억은 남아 있을지언정 이런 철학적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가 뉴런 단위부터 모조리 다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전생의 가치관이 계속 영향을 주는 것들도 있었고 전생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노예 제도는 인권 침해라고 생각하는게 전자였고 패배주의적 사고에 틀어박혀 세상 전부를 증오했던게 후자의 케이스였다·
하지만 이 성별에 대한 논의만큼은 너무나 모호하기 그지없었는데 생물학적 성은 여성임을 인정할 수 있어도 사회적 성만큼은 언제나 입장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런 생각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
확실히 남자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히아센 루미너스 카이젠 3 황자는 제국 최고의 미남으로 불렸었는데 신이 빚은 얼굴을 지근거리에서 보고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질투가 난 정도?
그렇다고 여자를 좋아했던 적도 딱히 없었다· 오히려 골칫거리 그녀들을 떠올리고 있으면 머리가 지끈거리기만 했지·
왜 내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질문에 끊임없이 도전하는지 궁금하다면 바로 아린 때문이었다· 또 너야 아린?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이미 길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는데? 보영 언니는 이 길이의 반도 안 된다고·”
일단 의복에 대한 가치관만큼은 난 남성의 것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하게 자부할 수 있다·
“난 바지가 좋아·”
“나메는 치마를 입는 게 더 예뻐! 애들이 여자가 교복바지를 입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란 말이야·”
고등학교 수험생만 되어도 바지를 입는 여학생들이 더 많아질 텐데 역시 초등학생들이라 그런지 사회적 기준이 엄격한 면이 있었다·
8월 15일 안타깝게도 이 세계의 한국은 광복절이 8월 14일 일요일이라서 월요일에 등교를 하게 되었다· 대체공휴일은 또 어디다가 팔아먹었는지 참·
입학절차는 이미 수녀님이 다 끝내 놓으셔서 내가 따로 처리할 일은 없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곧바로 교무실에 들려 담임 선생님과 대동하여 반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해가 내리 쬐는 무더운 여름에 굴복하지도 않고 아린은 열심히 나에게 반 친구들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누구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까지· 참 열성이었다·
확실히 등굣길은 길고 험난했다·
아린의 괴물같은 체력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이런 길을 하루에 한번씩 왔다갔다 하면 누구라도 건강해지겠다·
언덕 정상에 설립된 학교를 속으로 욕하며 오르막길을 주파했다·
“안녕하세요 경비아저씨!”
“그래 안녕! 좋은 아침!”
아린의 90도 인사에 경비아저씨도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우리는 넓은 운동장을 지나 중앙계단을 통해 2층에 있는 1학년 교무실로 찾아갔다·
정중한 세 번의 노크와 함께 교무실 문이 열린다·
“아린이 안녕!”
“안녕하세요!”
“오 아린이구나? 방학 잘 보냈니?”
“네! 잘 보냈어요!”
예상과 달리 의외로 붙임성 있는 그녀의 모습· 알고보니 백아린은 1학년 교무실의 아이돌같은 존재였다·
선생님들이 귀엽다고 서로 쿠키를 하나라도 더 쥐여주려는 판·
짧은 인사말이 오가고 아린의 담임으로 추정되는 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린이 옆에 있는 친구가 나메니?”
“네 맞아요!”
아린이 나와 깍지낀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안녕 나메야? 오늘부터 나메랑 같은 반이 될 1학년 8반 하선화 선생님이라고 해·”
아린과의 깍지를 잠시 풀고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나메 진짜진짜 이쁘죠?”
“응 그런데 나메가 아직 수줍어하는 것 같으니까 오늘은 아린이가 반까지 같이 데려다 줄 수 있을까? 물론 선생님도 지금 반으로 갈 거야·”
“네네!”
하선화 선생님이 앞장서고 그 뒤로 우리 둘이 따라갔다·
ㄷ모양으로 꺾이자마자 1학년 교실임을 알리는 팻말들이 보였다·
“여기가 1학년 8반이란다· 정문에서 조금 머니까 길 안 잃어버리게 잘 찾아와야 돼·”
복도에서까지 초등학생들 특유의 시끌시끌함이 묻어 나온다·
그 와중 아린은 눈을 감고 짧게 심호흡까지 한다·
“안녕! 다들 방학 잘 보냈나요?”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 8반에 새로 오게 된 학생이 있어서 소개할 거니까 다들 자리에 앉아줄래요?”
꽤 젊은 나이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아이들을 다루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이들도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를 찾아가 착석을 마쳤다·
“자 다들 앉은 것 같으니까· 우리 학생 자기소개 해줄래?”
아린은 제일 뒷자리 좌석에서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교탁 앞에 서서 겨우 초등학생들 앞에서 말하는 건데 왜 이리 떨리는 건지·
그냥 간단하게 이름만 알려주고 내려올 생각이었지만 내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
억지로 입을 열어보려고 해도 심장이 떨려오고 식은땀이 났다·
갑자기 아이들의 모습이 나를 잡아먹으려는 대신들과 겹쳐보인다·
[마녀]
[마왕의 씨앗]
[저주받은 것]
[죽어]
[죽어]
호흡이 가빠진다·
[왜 네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턱
하선화 선생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려주니 주변 풍경이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우리 친구가 학교는 처음이라 당황한 것 같아요·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대신 소개해줘도 될까요?”
나이스 바통터치· 역시 이 사람 프로페셔널하다·
“친구 이름은 노나메예요· 몸이 아파서 1학기에는 학교를 못 나왔으니까 반 여러분들이 잘 챙겨줘야 돼요 알았죠?
아린이가 나메랑 제일 친한 친구니까 혹시 나메에 대해 알고 싶으면 아린이에게도 물어보면 알려줄거예요·
나메는 저기 맨 뒷자리 아린이 옆에 앉을까?”
아린이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도 이럴줄 몰랐는걸· 그동안 아린이하고 잘 대화해서 함구증이 고쳐진 줄 알았더니 영 쉽지 않다·
그 뒤로는 아침 조회시간이 쭉 이어졌다·
나도 초등 공교육은 처음 받아보는지라 꽤 신기하기도 했다·
반 출석을 부르고 방학 동안 각자 한 일에 대해서 대화를 주고 받는다·
이를 틈타 방학 숙제를 걷기도 하고 2학기 교과서를 나누어주며 앞으로 배울 것들을 소개해주는 시간도 가졌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탓에 이 시간은 1교시까지 쭉 이어졌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그제야 아이들이 숨을 고른다·
아이들이 친한 이들끼리 제각기 모이며 수다를 나눈다·
대부분이 대화를 나누다 말고 나와 아린이 쪽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제 딴에는 몰래 보는 것이겠지만 그래봤자 1학년 수준· 사실 너무 노골적인 편이었다·
그들 중 한명이 우리쪽으로 와서 물어본다·
“이름이 노나메라고 했나?”
내가 대답이 없자 아린이 대신 긍정해준다·
“아 응···! 맞아·”
“혹시 쟤도 메를린 보육원에서 왔어?”
“그게··· 어··· 아··· 아니···?”
“맞아·”
물론 저 남자아이한테 한 말은 아니었다· 아린한테 한 말이지·
아린은 내가 출신을 밝히지 않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꼬마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자기 무리로 돌아갔다·
“나메 왜 그랬어?”
“뭐가·”
“그게··· 애들은 메를린에서 왔다고 하면 싫어한단 말이야·”
“싫어하라 해·”
“에?”
이 나잇대 애들은 이해하지 못 하겠지만 나를 싫어하는 이들을 억지로 좋아하게 만드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이 없다·
저 애들 중에선 메를린 보육원 출신들과 엮일까봐 두려워서 피하는 자도 있을 테고 그냥 친구들이 싫어하니까 따라 싫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학교가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만큼 친구가 없다는 건 치명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결국 인간관계도 하나의 기브앤테이크라는 걸 이해했으면 좋겠다·
재밌으니까 잘생겨서 운동을 잘해서 등등·
결국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으면 아린의 매력이 결코 메를린 출신이라는 점에 가려지지 않음을 보이면 된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중에는 우리들의 친구가 되지 못한걸 분명 후회할 테니까·”
* * *
초등학교 수업은 대체로 지루했다·
흥미로운 것도 처음이라 그랬지 이미 다 아는 내용을 듣는 것만큼 고문인 게 없었다·
다같이 81 82 따라 부르면서 숫자 외우는 것도 담임 선생님의 말을 받아쓰기 하는 것도 포함됐다·
“나메는 벌써 다 끝냈어?!”
수학 선생님이 급한 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고 우리들은 51부터 100까지 룬어로 쓰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다들 교과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따라쓴다· 그 와중 아린은 A4를 다 채운 내 종이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아린도 질 수 없다며 속도를 한층 올린다·
나는 그동안 아린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게 있었는데 아린은 생각보다 똑똑한 편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30까지 쓸 줄 모르는 아이도 있는 반면 아린은 적어도 80까지는 헷갈리지 않고 쓸 줄 아니까 말이다·
그녀는 승부욕이나 근성이 뛰어났는데 이러한 기질이 학업 성취에까지 자연스레 반영되고 있었다·
“아린이도 하나 빼고 다 맞았네· 여기 79에 점 빼먹었어·”
“응? 벌써 다 검사한 거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아?”
그녀가 서둘러 문자 위에 점을 찍는다·
차라리 아린이 백과사전을 주었을 때가 더 나았던 것 같다·
심심할 때면 계속 교과서 뒷장을 보곤 하는데 초등학교 교육과정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많겠는가· 일주일을 정독하니 이제는 모르는 내용이 없을 정도였다·
내가 창문을 바라보며 심심함을 달래고 있자니 내 앞자리에 남자 아이가 뒤돌아 내게 말을 걸어온다·
“혹시 내것도 좀 봐줄 수 있어?”
아린이 내게 검사받는게 부러웠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의 종이를 대충 살펴보고 연필 뒷부분으로 틀린 곳 세 군데를 가리켰다·
“고마워!”
확실히 룬문자는 고대 60진법과 근대 16진법의 혼합 체계에 맞추어진 터라 아이들이 특히나 헷갈릴만한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78을 쓸 때 60 10 8을 병렬로 적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들이 자주 나왔다·
물론 몇진법이니 하는 원리는 모르고 가르치는 거라 대부분은 그냥 쌩으로 외우는 편이었다·
“나도 나메처럼 똑똑해지고 싶당···”
요즘들어 아린의 투정이 나날이 심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귀여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릴 때마다 햄스터가 생각나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콕 찔러보니 자그마한 입술 사이로 바람이 츄하고 빠졌다·
“아린이도 충분히 똑똑해·”
“그치만 나메만큼은 아니잖아·”
“그럼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게·”
호기심 많은 아이에게는 예습만큼 흥미로운 게 없는 걸 알기에 나는 A4 뒷면에다가 몇가지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다·
“뭐 그리는 거야? 이건 마법진 아니야?”
“마법진이랑은 달라· 이건 연성진이야·”
직접적으로 마법을 발생시키는 마법진과 달리 마법 발동에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이 연성진이었다·
복잡한 문양이 연필 끝에서 수없이 교차한다· 나도 최대한 빨리 그려본다고 해도 2분이 조금 넘었다·
“숨은 그림 찾기야· 룬문자로 1부터 100까지의 숫자 중 10개의 문자를 넣어놨어· 한번 찾아볼래?”
“알겠어!”
그녀는 제일 먼저 가장 쉬운 문자인 ‘1’부터 찾아낸다·
그 뒤로 한 3분 가량 끙끙대며 종이랑 씨름하더니 아린이 배운 문자들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눈썰미가 좋다·
“다했는데?”
“그럼 이제 숫자가 낮은 순대로 쭉 이어봐·”
“어디보자··· 1 2 3 5 8 13 21··· 또 어딨더라 34 55 89· 오? 이거 별모양이잖아! 짱 신기해!”
“이제 봐봐·”
나는 연필을 수평으로 눕혀서 일직선상에 있는 4개의 숫자들을 가리켰다·
“어때 여기있는 문자들은 모두 오른쪽에 긴 세로점이 있지?”
“오 맞아맞아 그러네·”
연필을 36도가량 돌려 다른 직선을 가리킨다·
“이번엔 왼쪽 아래에 동그란점이 있고·”
“우와우와 내가 해봐도 돼?”
“자·”
아린이 흥미를 보이며 각 문자들의 공통점들을 찾아낸다· 내가 보여준 건 ‘아라베스크의 연성식’·
수학 분야에서는 피보나치 수열이라는 비교적 쉬운 개념에 대응되지만 마법에 한정해서는 꽤 어려운 분야였다
룬문자는 알파벳이나 한자처럼 사회적 약속 따위로 생긴 문자가 아니다·
마나의 흐름과 법칙을 가장 단순화시켜 새겨놓은 일종의 주술 개념이기에 문자 자체로 법칙을 뒤트는 잠재력이 있다·
물론 룬문자 사이에서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단순화시켰는지에 따라 A형 B형 오메가형이 있었지만 만국 공통으로 배우는 문자는 단연 가장 쉬운 A형 문자였다·
하지만 어느 룬문자를 사용하든 이 연성식의 법칙을 만족한다·
예를 들어 1 13 2 3은 모두 대지를 뜻하는 형태소를 내포한다·
땅 속성 즉 지계에 속하는 마법들은 모두 2배 3배 13배와 같은 배수로 증폭시켰을 때 최고 효율을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까지 아린이 알기에는 시기상조였으므로 그저 룬문자들이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 * *
“우와 요즘 애들은 진짜 빠른 것 같아요· 누가 낙서로 연성식까지 그려놨네·”
“그거 하선생님네 반 숙제였나? 아이고 내가 하필 오후에 일이 터져가지고 대충 숙제로 때워가지고 말이야· 이면지로 쓸 거 아니면 거기에 버려주라·”
“근데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쓰으읍· 뭐더라? 기억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강철민 선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차를 홀짝였다·
“저번에 6학년들 연성식 발표 대회 때 나온 거 말하는 거야?”
“아뇨 더 한참 전에 봤던 것 같은데· 뭐지··· 예전에 저 한창 로스쿨 준비했을 때 형사집행법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다음에는 물을 적게 타야겠어요·
우리 나메는 대체 전생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걸까요?
다음화 보기
![Arcane Sniper [Matan’s Shooter]](https://cpunovel.b-cdn.net/wp-content/uploads/2024/04/arcane-sniper.jpg "Arcane Sniper [Matan’s Shoo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