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1
하루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유나와 단둘이 ‘겨울왕국 4’를 시청하기로 했다·
“하루는 괜찮을까···?”
영화를 보면서도 유나는 치료를 마친 하루가 걱정스러웠는지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약도 생각보다 많이 먹지는 않았던 모양이니까·”
“하루는 진짜 머리가 좋아지는 약을 먹고 있던 거야?”
“사고 가속이 꼭 머리가 좋아지고 공부를 잘해지는 마법은 아니야·”
“그래?”
하루는 후두엽쪽에 사고 가속이 걸려있었다·
뭐 그러면 마법진의 구조를 파악하기 쉬워지는 면은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마법진을 잘 볼 수 있다는 거지 그걸 해석하는 건 전두엽의 영역이다·
아마도 뇌가 과도하게 사용된 나머지 시신경의 문제로 이어졌고 이는 최종적으로 하루가 전색맹에 이르기까지 한 결과를 일으켰다·
“하지만 하루의 어머니는 하루가 공부를 더 잘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네·”
“너무해· 그래서 하루 눈이 다쳤잖아···”
“그정도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나보지·”
“우리 엄마는 좋은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하루한테 사실대로 다 말해줄 거야?”
“그게 조금 고민이 돼·”
무엇보다 하루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많이 남아있을뿐더러 학업과 관련해서도 유나처럼 상당히 프라이드가 강한 아이였다·
만약 그녀의 어머니가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불법 약물을 먹기를 종용했고 그 덕분에 자신의 눈이 상해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녀에게 득이 될 게 뭐가 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하루의 언니한테 먼저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언니가 있었어?”
“응· 근데 하루가 언니 얘기 하면 엄청 싫어할 걸?”
음···
만약 아카데미에서 높은 학업 성취도를 위해 먹은 거라면 그녀의 언니도 먹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하루를 통해서 연락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근데 왠지 뿌듯한 거 있지?”
“왜?”
유나의 입이 귀에 걸릴 때까지 히죽 웃었다·
“내가 하루보다 훠얼씬 똑똑하다는 거잖아· 나는 그런 약 같은 거 하나도 안 먹고 시험을 봤는데!”
“그래 너 잘났다·”
“아아아 왜 맞잖아···! 맞다고 해줘!”
“영화 안 볼 거야?”
“응 영화 별로 재미 없어· 그냥 과자나 먹으면서 너랑 얘기하는 게 더 좋아·”
내용만 보면 생각보다 재밌어보이던데· 태어났을 때부터 얼음 마법만을 배워왔던 엘사 여왕의 딸 레사가 우연히 화염 마법을 접하며 벌어지는 스토리였다·
어머니의 높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자존감이 떨어진 주인공의 사소한 일탈 화염 마법을 알려준 장본인이 알고보니 적국의 왕자였다는 설정까지·
공주를 좋아하는 유나라도 취향은 타나보다·
“지금 졸리지는 않지?”
“응· 아직 쌩쌩해!”
“어쩌냐 난 벌써 피곤한데·”
“안 돼···! 나메 너 아까도 몰래 잤었잖아· 지금 자버리면 나 삐질거야·”
“하암-”
“진짜 삐질 거야! 나 삐진다?”
아무리 완드를 사용해서 마법을 쓴 거라고 했어도 알케미스트는 나름 5서클 마법이었다·
기력의 소모가 상당하다는 점을 공감해주었으면 좋았겠건만 혈기왕성한 아이는 지칠 줄을 몰라한다·
하루 옆에 재워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팔다리를 만지작거리는 유나에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럼 무서운 이야기라도 해줄까?”
“무··· 무서운 이야기···? 나 무서운 거 들으면 진짜 잠 못 잔단 말이야!”
“쉬잇· 하루 깨잖아·”
“싫어 절대로 안 들을 거야!”
“그럼 더더욱 해야겠네·”
나는 곧바로 유나의 뒤로 자리를 옮겨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자고로 무서운 이야기는 이렇게 가까이서 해야 실감나는 법이었다·
중간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유나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린 유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안 무서운 걸로 해줘···”
유나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당길 기세로 손에 꽉 쥐었다·
“무려 내가 저번 주에 실제로 겪은 일이었어· 잘 들어봐·
서울에 살다보면 밤에도 시끄러울 때가 많잖아? 자동차 경적소리에 내가 잠에서 깨버렸어· 시계를 보니까 딱 새벽 4시 44분이었던 거야· 물을 마시려고 부엌에 갔는데 이상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왜 하필 4시 44분이야···! 그래서 뭐였는데?”
“운동화· 현관문에 있어야 할 운동화가 식탁 위에 있었어·
이상하게 생각해가지고 불을 켜려고 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내 입을 막은 거야 이렇게!”
“읍! 으읍!”
손으로 유나의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유나가 깜짝 놀라 팔을 바둥거렸다· 귀엽기도 해라·
“야 이제부터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다 먹어· 귀신인지 강도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냉장고를 열어보니 사과도 있었고 배도 있었고 또 무도 있었지· 그래서 할 수 없이 껍질도 안 깐 채로 억지로 과일들을 먹을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를 먹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내 목을 졸라왔어·”
“으으읍!”
“기관지가 서서히 막혀와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야· 무는 맛 없으니까 먹지마!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무가 왜 자신은 안 먹어주냐고 섭섭해했어·”
유나의 입에서 손을 치웠다· 손바닥과 그녀의 입 사이로 침인지 뭔지 모를 액체가 호선을 그리며 주욱 늘어지다가 이내 끊겼다·
“쓰읍· 그게 끝이야···? 뒤에 더 없어?”
뭔가 이상하게 끝맺은 결말에 유나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무가 서운했다잖아·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
“······”
“진짜 무서운 이야기였는데·”
“그게 뭐야! 하나도 아니잖아!”
“헿·”
“나메가 이상해졌어!”
생각보다 별로였는지 유나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딸꾹-
“흐익!”
우리 옆에서 딸국질 소리가 갑자기 들려와서 나와 유나가 거의 동시에 놀라 자빠질 뻔 했다·
이제보니 쿨쿨 잠들어있던 하루가 우리쪽을 향해 빼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 * *
하루는 내가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즈음부터 깨어났다고 전했다·
“재밌었어!”
“이게 재밌다고? 이하루 너 머리가 돌아버린 거 아니야?”
“무가 서운한 이야기·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 히힛· 나메 넌 천재야·”
하루가 킥킥 웃었다· 한층 밝아보이는 표정에 나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봐봐 유나야 재밌었다잖아·”
“무서운 이야기가 안 무섭고 재밌으면 어쩌자는 건데?”
“하지만 너도 침 질질 흘리면서 무서워했잖아·”
“아··· 아니거든?”
“그럼 내 손에 묻은 이건 물이야?”
“씨이···”
유나를 놀리는 건 이쯤으로 하고 이제 깨어난 하루의 상태를 살필 차례였다·
“이제 색깔은 잘 보여?”
“응· 저기 빨간색 불도 잘 보여·”
빔프로젝터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한 장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인공 레사가 각성하여 급기야 얼음 위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무슨 가스 하이드레이트도 아니고 물리법칙을 무시한 초능력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세계관 최강자 자리는 네가 먹어라·
“다행이야· 한번에 오러를 많이 받아들여서 피곤할 텐데 다시 자도 돼·”
진단마법을 통해 하루의 몸 상태를 점검했고 딱히 추가적인 문제는 없었다·
우리 몸은 다시 최적상태로 회귀하려는 항상성을 지니고 있어서 인위적인 각인술식이 깨진 이상 하루의 몸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루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나 눈은 괜찮아진 거야?”
“응· 원래도 문제는 없었으니까·”
“진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하루는 여전히 사방을 둘러보며 신기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보고 어떻게 했냐는 물음에 나는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하루에게 약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주어야 할 것 같아 그녀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하루야 너희 어머니가 주신 약 말이야· 그거 아직도 남았어?”
“아니· 엄마가 가지고 있던 게 다야· 그나마 있던 것도 우리 언니가 다 버려버려서 없을 걸·”
“몸에 정말 안 좋은 약이니까 혹시라도 비슷한 게 있으면 먹으면 안 돼· 꼭 약속할 거지?”
“응··· 근데 그냥 영양제 아니야?”
“누가 먹느냐에 따라서 독이 될 수도 있는 게 약이야· 아마 너희 어머니께서 잘 모르시고 주신 것 같아·”
“그래도 엄마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고마워··· 그리고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
하루는 이번에 유나를 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유나·”
“왜?”
“네 머리··· 다시 보니까 예쁘네···”
특히나 유나의 원색에 가까운 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느닷없는 칭찬을 날렸다·
“아 그래··· 고마워·”
당연히 유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를 계속 메만지는 걸 보면 그리 싫은 기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맞다 유나야 이거 연주해보고 싶다고 그랬지?”
아까 유나가 화장실에서 나를 부른 건 하루가 깨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내가 예전에 언급한 오타마톤을 자신도 연주해볼 수 있냐고 물어왔던 것·
중간에 얘기가 산으로 가버려서 까먹고 있다가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에 생각이 나서 유나에게 일러주었다·
책상 맨 아래쪽 서랍에 넣어 놓은 오타마톤을 꺼냈다·
“우와! 대박 신기해!”
자기도 한번 만져보겠다고 기를 쓰고 내게 달려든다·
그러지 않아도 줄 생각이었는데 괜히 저러니까 더 안 주고 싶어진다·
“와 이거 오타마톤 아니야? 예전에 틱톡에서 엄청 유행했던 건데!”
하루도 알고 있었던 악기였나보다· 나만 문찐이었던 거네?
“나메야 그럼 곡 하나만 연주해줘!”
“잠깐만 기다려· 혹시 이거 동영상으로 촬영해도 돼?”
유나가 보채고 하루는 아예 핸드폰까지 꺼내 내 앞에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도대체 카메라 렌즈가 몇 개야· 하나 둘··· 다섯? 파리 눈도 아니고 보고 있자니 징그럽다·
“그래·”
“틱톡에 올리는 건?”
“그럼 얼굴만 안 나오게 찍어줘·”
“헤에 잠깐만 기다려봐· 자아 됐다· 삼이일 하면 시작이야· 자 삼 이 일·”
* * *
나메가 친구들에게 연주해준 곡은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이었다·
평소에 그녀가 선호하는 곡들은 느린 템포의 클래식 곡이었지만 아이들은 기교가 많고 빠른 곡을 대체로 좋아하기 때문에 선택하게 된 것이다·
빠른 아르페지오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카프리스 24번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었을 때도 열광할 요소가 충분했다·
나메의 선곡이 끝나고 유나도 호기롭게 연주를 시도해보았지만 나메만큼 멋들어지게 나오지 않는 소리에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똑똑-
세 소녀의 파자마 파티가 무르익었을 때쯤 노크소리와 함께 천교수가 얼굴을 내비쳤다·
“애들아 잘 놀고 있니?”
““네에!””
나메의 양옆에 사이좋게 앉은 두 소녀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껌딱지처럼 딱 달라붙은 모습에서 이전보다 더 친밀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노는데 방해해서 아저씨가 정말 미안한데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방금 연락이 왔단다· 밤이니까 조금만 조용히 놀아주면 좋을 것 같은데·”
“유나야 잘 알아 들었지? 이제 조용히 놀자·”
“엑? 왜 나만···? 나메 너도 똑같이 연주했었잖아!”
“내가 언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유나의 항변에도 나메는 시치미를 뚝 떼며 꼬리를 잘랐다·
“진짜예요! 이거 나메가 먼저 시작했다니까요?”
“친구들은 제가 책임지고 조용히 시킬게요· 천교수님도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읍읍···!”
유나의 입을 가로막는 것도 모자라 아예 이불로 꽁꽁 싸메버리는 나메의 모습을 보고 천교수의 입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럴 때 보면 나메도 영락없는 어린아이였을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무서운 이야기: 사실 나메는 ‘무서운 이야기’로 6행시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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