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2
나메의 모든 공격은 10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대검을 강탈했다·
검술교관이 휘두른 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나메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반쯤 무너진 자세를 보인 남성을 향해 허리춤에 검을 찔러 넣음으로써 제대로 응징을 가했다·
최소한의 발악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주먹을 그의 턱에 휘두르고 떨어지는 검의 손잡이 부분을 발로 툭 차 다시 공중에 띄웠다·
촤악-!
한차례의 참사를 맛보고도 계속해서 거리를 좁히려는 방패검사의 목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공중에서 검을 잡아채자마자 펼친 기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정교한 검로였다·
방패는 고립된 처지를 타파할 수 있는 좋은 병기였다·
방패 중심에 폭발하는 마나를 실어 날려버림으로써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도 틈새가 만들어졌다·
날아오는 마법과 화살에 대응하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오러 방벽은 무한하지 않으므로 피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피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들은 일일이 파훼술식을 작성해야만 했다·
이때를 대비하여 트리위키에서 찾은 정보들이 도움이 되었다·
“미친···! 마법이 하나도 안 통해!”
상대의 입장에서는 모든 마법이 무효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낄 법도 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향하는 모든 마법을 역시전하는 것도 모자라 시전자의 마나회로에 간섭해 폭주시키기까지 했으니 마법사들은 겁에 질려 지팡이를 거두었다·
[Level: 9]
[Hp: 1832/4050(2400+1650)]
생명의 월계수 덕분에 조금씩 다는 체력들은 감내할 수준이었다·
마나를 소비하면 체력을 채울 수 있다·
반면 마나는 상대 마법사가 시전한 마법들을 파훼함으로써 보충할 수도 있었다·
무한한 자원을 바탕으로 쓰러지지 않는 나메와 포기할 줄을 모르는 아카데미 측의 공방전은 자그마치 한 시간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핏물을 잔뜩 머금은 토지가 달빛에 비춰 붉게 빛났다·
그리고 황금빛 마력을 담은 엘프의 눈은 더욱 불길하게 형형했다·
“악마···”
인파 사이로 누군가가 말했다·
소리의 근원지로 나메의 고개가 돌아갔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특정할 수 없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부대가 다시 무기를 세웠다·
‘이 방법으로는 택도 없나·’
차갑게 식어버린 알페리온을 내려다보고 나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든 루트를 검증해보아도 아델라를 살릴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라면 아델라의 능력은 충분하겠다만 다차례로 쌓인 경험들이 정신과 구조적으로 충돌하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게 문제가 되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알페리온과 시시엘라를 살려 데리고 가는 게 하나의 트리거가 될 줄 알았더니 결국 시청자들의 말대로 이는 함정에 불과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자신의 키보다 한참은 큰 완드를 지닌 붉은 머리 소녀가 소리쳤다·
“월계수를 돌려받으러 왔으니까·”
“이 악마!”
“난 엘프야· 보면 몰라? 예쁘잖아·”
“무슨 멍청이 같은 소리야! 상식적으로 세상에 엘프가 존재할리 없잖아!”
불마법사 지젤의 절규에 몇몇 시청자들이 의문을 품었다·
-갑자기 뭔 개소리래?
-님 앞에 있는 게 엘프에요
-목이 2m인 동물도 있고 비버 몸에 오리 주둥이가 달린 동물도 있는데 뿔 달린 말은 없는 것처럼?
-이딴게 상식···?
-헉 여기서 떡밥이!
-이거 말하면 스포일러인데
-그런데 지젤은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세상에는 엘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버린 지젤 때문에 한차례 채팅창이 술렁였다·
눈을 가늘게 치켜뜬 나메가 설명을 요구했다·
“그럼 ‘나’는 누군데?”
“내가 오히려 묻고 싶을 정도야···! 도대체 넌 정체가 뭐야!”
정체 존재 한 개인을 정의하는 다양한 단어들·
나메는 언제나 그것들과 싸워왔다·
상황을 복잡하게 바라보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월계관을 똑바로 고쳐쓰며 울분을 토하는 소녀 앞에서 선언했다·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희들의 적·”
“···!”
“다음에는 아군으로 만나면 좋겠네·”
“용서할 수 없어!”
-지젤 심기를 건드리면 좋을 게 없는데
-ㅈ됐다!
-폭주한다!
-눈 돌아간 거보소
-하필 루나도 없네;;
-설마 그거 하나 그거?
-ㄴ그게 뭔데?
불사조의 저주를 받고 태어난 렘넌트 아카데미 1학년 지젤 피닉스·
열화의 꽃을 얻지 못하면 불사조의 수많은 예비 육체 중에 하나로 전락해버릴 운명을 가진 그녀는 1학년 중 최고의 마나 보유량을 자랑했다·
루나 파빌리스가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극딜러라면 지젤은 마법사 주제에 탱커와 힐러도 겸할 수 있는 팔방미인격의 존재였다·
하지만 지젤 피닉스가 딱 한번 루나 파빌리스보다 막강한 화력을 자랑할 때가 있었으니·
[절명기: 화신강림]
악마의 육신은 물론이고 혼도 남기지 않고 전부 태워버리는 절명기를 사용할 때였다·
알페리온을 구한다는 선택지가 함정인 이유·
설령 최소 난이도로 때튀(때리고 튀기)를 반복해 수백의 기사단을 전멸시킨다 해도 그 끝에서 기다리는 건 결국 궁극의 화계마도로 단죄하는 지젤 피닉스였다·
나메는 지젤의 완드에서 뻗어나온 마법진을 보고 헛웃음을 삼켰다·
복잡하기로는 7서클의 것과도 맞먹을 수준이었지만 구태여 해석할 것도 없이 들어맞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낙서에 불과한 회로였다·
마치 영화에서 복잡한 천체운동과 상대성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구구단과 근의공식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보고 쩔쩔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순 엉터리라는 소리· 몰입마저 깨진다·
세상에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인위적인 마법 게임 속 세상이기에 가능한 강제 리셋 트리거·
번쩍하고 터져나오는 섬광을 느낄 겨를도 없이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 나메의 주위를 감싸돌았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 존재하지 않기에 파훼도 불가능한 수식을 보고 나메는 짤막한 감상을 남겼다·
“좆망겜이네·”
* * *
[복구할 수 없는 리소스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백업 서버와 동기화 중입니다··· 1%]
타닥-
타다닥-
“제발···!”
아델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시계탑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콰광-!
강렬한 빛이 아침이 도래하지 않은 고요한 도시의 사람들을 일깨운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대지를 울리는 충격음에 아델라의 심장이 덩달아 벌컥 뛰었다·
“안 돼···! 하으···”
주먹을 하도 꽉 쥐어 날카로운 손톱이 살갗을 파고 들어간다·
피가 주르륵 새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아델라의 시선은 성도 한복판에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또··· 또야··· 또 나 때문에··· 아으으으아아악!”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른 아델라는 아카데미 구획을 가르는 담장도 단번에 훌쩍 넘어 아비규환의 장소에 도착했다·
불길은 사그라들 줄을 몰라 건물보다도 높이 솟아올랐다·
보통이라면 그 속에서 노네임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허나
[YOU DIED]
“아아··· 아으으··· 아니야··· 아닐거야···”
월계수에 마나를 흘리니 그제서야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의미 모를 문자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저 아래로 가면 그녀가 애타게 찾는 이를 만나볼 수 있으리라·
[백업 서버와 동기화 중입니다··· 13%]
은빛의 꼬리가 불에 그을려 따끔했지만 신경쓸 겨를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전투복이 찢어진 것도 이제는 전부 상관이 없었다·
“아아···”
아델라는 새까맣게 타버린 숲지기의 시체를 발견하고선 일순 다리에 힘이 풀려 균형을 잃고야 말았다·
“내가 잘못했어···”
아델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다 다 내가 약해서· 나··· 나 때문에···”
수없이 많은 이름이 적힌 돌담에서 불현듯 있어서는 안 될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어떻게 나를 글자도 모르는 거지 부렁뱅이들하고 비교하냥? 히헤헷 봐라 내가 얼마나 잘 쓰는지!]
[여기 이름 틀렸는데·]
[실수다 실수!]
[‘내’가 아니라 ‘네’·]
[글쎄 실수라니까!]
바로 전회차에서 노네임과 비를 피하며 화담을 나눈 기억이
[내가 만나본 그 누구보다도 멋있었어·]
몇 회차인지도 모르는 어느 순간 노네임이 건넸던 칭찬이
[다음엔 꼭 같이 살아남자·]
4회차의
[너의 감각을 믿어·]
6회차의
[고마웠어·]
10회차의
[여기서 다시 만나면 되겠다·]
16회차의
[매번 혼자 내버려둬서 미안해·]
그리고 지금 17회차까지 노네임이 생전 마지막에 했던 말들이 차례대로 아델라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왜··· 도대체 왜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왜!”
신이 농간이라도 부린 듯 세상이 몇 번이나 되돌려졌다·
그러나 아델라가 기억을 되찾는 시점은 언제나 노네임이 죽은 이후였다·
“떠올리라고! 기억하라고! 잊지 말라고! 이것도 못하는 아델라 넌 진짜 흐윽··· 바보 멍청이야···”
기시감을 느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발럼 베나온스에게 배를 얻어맞아 그를 만나기 전 언제나 복부가 시큰거렸고 노네임이 자신을 때려보라 했을 때 심장이 벌렁거렸다·
처음 맛보는 츄르였음에도 그 짭짤함이 하도 익숙하기만 했다·
아델라는 분명 1회차에서 죽었어야 했다·
진 크로니클의 배후에는 악마 숭배자들이 있었고 그는 생명의 월계수에 악마가 부활할 수 있는 초석을 심어 자신에게 빙의시켰다·
원치 않는 죽음이었지만 후회도 없는 죽음이었다·
그렇기에 2회차에서도 그녀는 분명 같은 판단을 했었다·
하지만 3회차부터 모든 게 틀어졌다·
반복되는 윤회 속에서 죽는 건 아델라가 아닌 노네임·
“분명 알고 있었을 거야···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같은··· 흐끅···!”
노네임은 자신과 달리 모든 회차를 기억하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그제서야 그녀가 행했던 모든 기행들이 바닥에 널부러진 퍼즐을 짜맞추듯 이해가 되었다·
노네임은 영영 빠져나갈 수가 없는 지옥에서 홀로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진 크로니클과 싸워서 이길만큼 강해질 때까지·
“제발··· 더··· 더 죽지 말아줘· 날 그냥 거기서 죽게 내버려둬··· 난··· 난 필요 없는 사람이잖아···”
아델라는 진흙바닥에 엎어져 헛구역질을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백업 서버와 동기화 중입니다··· 36%]
한 사람의 죽음에 이토록 슬퍼했던 적이 있었나·
적어도 아델라의 기억 속에는 없었다·
사람의 생명이 길바닥의 지렁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세상이다·
힘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하물며 겨울에 입을 옷이 없어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애도를 표하면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뿐이었다·
아델라와 노네임은 겨우 오늘 처음 만났던 사이였다·
연인도 가족도 친구도 아닌 막장 단체의 동료라는 가느다란 실로 이어진 아무것도 아닌 관계에서 무슨 의미를 찾고 있었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백업 서버와 동기화 중입니다··· 39%]
그 무엇보다 아델라를 두렵게 만든 건 다음번에도 자신이 또 모든 기억을 잃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노네임은 똑같이 자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것이고 아델라는 영원과도 같은 찰나를 보내야만 했다·
모든게 예정된 수순이었다·
입술을 다시 잘근 깨문다· 송곳니가 불쑥 튀어나와 이제 그녀의 입은 너덜너덜해졌다·
그녀는 노네임과 함께한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지고 세상은 다시 처음으로 회귀하리라·
언제부터 잠에 들었는지 경계를 명확히 지을 수 없듯이 세상이 사라지는 기점도 인지하는 게 불가능했다·
‘여기는 처음 노네임에게 투정을 부렸을 때 있던 곳···’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고 수없이 자기비하를 했을 때도 그녀만큼은 아델라를 능력과 상관없이 인정해주었다·
각 회차별로 조금씩 도망쳐온 곳은 달라졌다·
귀족 주택가 앞 슬럼가 입구 트레피스 광장 등등·
점점 의식이 몽롱해졌다·
정처없는 발걸음에 몸을 맡기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어느 길가의 돌담이었다·
슬럼가 아이들이 흔히 하는 이름 낙서·
[노내힏] [아델라]
[노내임] [아델라]
[노네임] [아델라]
[노네임] [아델라]
[노네임] [아델라]
두 번이나 틀리고서야 겨우 세 번째에서 올바른 이름을 적어낼 수 있었다·
괜한 반발심에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더 적게 되어서 돌담은 온통 자신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깐만··· 왜 돌담은 그대로지?’
불규칙적인 숨을 연신 토해낸다·
세상이 돌아갔다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실마리가 잡힐 것도 같았다·
과거로 돌아간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델라가 검으로 새긴 돌담만큼은 그대로였다·
이전 회차에서의 흔적이 분명 남아있다·
이거라면 분명 다음의 ‘나’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으리라·
“도둑고양이가 잘도 숨어있었군·”
“···!”
지이잉-
붉은 광선이 아델라의 몸통을 관통했다·
피를 왈칵 토해낸 아델라의 몸이 차가운 돌바닥 위로 맥없이 쓰러졌다·
“쿨럭···!”
“마침 월계수를 두 개나 가지고 있었구나· 내키지는 않지만 죽기 전에는 한번쯤 칭찬을 해주는 것도·”
꽁꽁 숨겨놓았던 월계관을 술법을 부려 비가시 상태를 해제한 진 크로니클이 조소를 지었다·
“아비로서의 도리겠지·”
온몸이 뜨거웠다·
복부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손을 갖다대보지만 손가락 사이사이로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아으으··· 흐윽··· 흐아아으으으···”
“덕분에 찾는 수고를 덜었어·”
진 크로니클은 신음하는 녀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아델라는 품에서 소중한 단검 하나를 꺼냈다·
노네임이 수도 없이 알려준 올바른 파지법으로 단검을 콰직하고 돌담에 박아넣었다·
끼익- 끼릭-
팔을 움직일 때마다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바닥에 고인 핏웅덩이를 보고 자신의 몸에서 전부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아델라는 멈출 수 없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돌담 가장 아래에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유언을 새겼다·
[돌아가]
“하아··· 하아··· 헤헤· 헤···”
다음 회차에서의 자신이 이 문구를 발견하기를·
[백업 서버와 동기화 중입니다··· 99%]
[!$%!@!로 인해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NoName(NoName)]
[월드 오브 아르세리아 – 사제 나이트메어 10/10/10]
[방송 시간 – 6:47:30]
[시청자 수 – 21185]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짜잔! 에피소드 104는 사실 18회차였습니다· 105~107은 그 이전의 회차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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