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6
오랜 꿈을 꾸었다·
나는 길을 잃어 산을 헤매고 있었다·
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도 땅도 나무도 온통 무채색으로 풍경의 비현실성을 더해준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붉은 보름달이 불길하게 세상을 비추었다· 아니다 빛이 들어오는 건 오로지 내 주위 뿐이었다· 나는 온몸으로 붉은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아내고 있었다·
무작정 산을 달려 내려갔다·
신기하게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했었고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산 정상에 되돌아가 있었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 앉으려고 할 때 산 정상에 돌연 문이 하나 생겼다·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머지 내 손은 자석에 이끌리듯 문고리를 잡았다·
두근거렸던 감정이 무색하게도 달칵하고 쉽게 열려버린 문이었다·
문 너머로 익숙한 정경이 보였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내 방·
아무도 찾아보지 못할 나만의 방이었다·
벽도 창문도 존재하지 않아 한 치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은 내가 있는 장소와 어떠한 문으로 이어졌다·
전기도 마나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이 방 내부를 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잠시 고민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방 한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분명 내 감은 저기에 한 아이가 있다고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아이를 인식한 순간 방이 환하게 밝혀졌다·
하지만 꿈 속의 나는 무심하게도 울고 있는 아이를 매정하게 내버려두고 방 안을 찬찬히 감상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사진이 벽지를 대신하고 있었다·
어지럽게 얽혀 있는 사진 하나를 툭 떼서 물끄러미 살펴봤다·
환하게 웃고 있는 고깔모자를 쓴 붉은 머리 소녀가 하나 그 옆에 있는 순박하게 생긴 갈색머리의 소년에게선 난처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엔 다른 사진첩이 내 손으로 날아왔다· 마치 자신의 것도 봐달라는 것처럼 떼를 쓰는 것 같다·
사진첩이라 말한 이유는 사진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였기 때문이었다·
꽤나 두툼한 두께를 가진 사진첩의 중간장을 아무렇게나 펼쳐보았다·
장인이 날카로운 칼로 한땀한땀 깎아낸 듯한 턱선과 긴 속눈썹 아래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모습의 남성은 실로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왼쪽 엄지로 종이를 넘기면 소년은 점차 어려졌고 오른쪽 엄지로 종이를 넘기면 소년은 나이를 먹으면서 눈매에 깊이가 담겼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가 어릴 때의 사진이었다·
그와 비슷한 곱슬머리의 소녀가 언제나 그의 곁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서로에게 서로가 없으면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탁-
구석에 있던 아이가 별안간 내 손을 잡고 사진첩을 덮어버림으로써 더 이상의 감상을 제지시켰다·
도리도리-
그리고선 고개를 세차게 저었는데 그때마다 흔들리는 금색의 머리칼이 내 팔을 찰싹 때려 따가웠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웃음이 나온 나는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오랜만이야· 나의 질투야·”
끄덕-
그녀는 고개를 위아래로 한번 까닥하는 걸로 인사를 대체했다·
매정하기는·
[시전: 대뇌피질 재구성]
[상위시전: 외측중격(lateral septum) 활성화]
[복호화: 뉴로텐신 수용체1]
[고유마도 – 에스타샤 류 제2식(式) – Schadenfreude]
* * *
“이 더러운 촉수의 정체가 뭔가 했더니 결국 타르 덩어리였잖아?”
괴물의 감정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눈빛에서 당황이라는 감정만큼은 확실히 읽어낼 수 있겠다·
“왜? 네가 쓰던 걸 뺏기니까 기분이 안 좋아? 막 화나고 그래? 난 네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복제: ■■■■■& %^$#$ 진 크로니클]
괴물과 똑같은 검은 촉수들이 내 등에서 뿜어져 나왔다·
팔딱거리는 문어의 다리들을 하나씩 촉수로 지워나갔다·
쾅!
쾅!
그의 무기가 하나씩 땅에 내리꽂힐 때마다 칠판을 긁는 듯한 비명을 내지른다·
“아니면 이건 어떤데?”
[복제: ■■■■■& %^$#$ 진 크로니클]
초침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째깍째깍·
몸을 짓누르는듯한 마류가 거세게 한 점으로 응축되었을 즈음
똑-
딱- 똑딱-
똑딱똑딱똑딱-
위잉-
그가 생전에 시전했던 마법이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되돌아갔다·
푸른 빛의 광선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기둥을 만들어 괴물의 복부를 관통했다·
충격의 여파에 멀리까지 날아가버린 괴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배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모습을 보고 황홀감에 젖을 것만 같다· 들썩이는 어깨가 주체되지 않는다·
“%$@%^$^%$^”
“하아- 그래 더어! 난 네가 더 절망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당장 감정의 편린을 드러내· 네게서 모든 걸 빼앗아가버린 나를 보고 무력감에 빠진 표정을 보여줘!”
부족하다·
감정의 장독대의 밑바닥은 전부 깨져있어서 폭포와도 같은 절망이 필요했다·
[복제: 레밀리아 아세파이트]
[시전: 헬파이어]
[system: 현재 월계수로는 시전할 수 없는 마법입니다· 하위 마법인 열전달로 대체됩니다·]
어두운 하늘에 붉은 꽃이 개화했다·
만개한 꽃잎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려와 불씨를 퍼뜨리고 그 불씨가 다시 촉매제가 되어 대지를 붉게 물들었다·
검은 액체에 불이 옮겨붙자 그제서야 들어줄만한 소리가 나왔다·
“잠깐만···! 필멸자여··· 대화를!”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동안 말을 못하는 척하다가 위기에 몰리니까 기어 오르는 모습을 보아라·
점성이 낮아진 괴물은 엄청난 기세로 검은 구정물을 바닥에 넓게 흐트렸다·
본체마저 바닥과 동화되려고 하는지 발부터 흐물흐물해지며 마치 빠져 들어가는 늪처럼 점차 형체를 잃어간다·
[복제: 클라우스 네스트로 바나포트]
[신체강화술: 가이아의 포용]
[system: 현재 레벨에 부적합한 오러술입니다·]
[system: 현재 월계수로는 시전할 수 없는 오러술입니다· 대체적 수단으로 스탯 보정이 이루어집니다·]
[system: error 0x00f402b4]
시간이 정지한다·
공기에도 끈적거리는 점성이 부여된 듯 움직임이 느려지고 판단이 뇌리에서 보내는 전기신호가 세상 만물이 굼벵이가 되어버린다·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고 육체 능력이 극대화된다·
수천번 아니 수만번을 휘두른 주먹이 괴물의 미간에 직격했다·
뿌드득 소리를 내며 괴물의 육체가 거품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에서 분리되고 구정물이 솟아올랐다·
“커흑!”
“아냐! 부족해! 더!”
아쉽다· 부족하다· 아직도 목말랐다·
멈출줄 모르는 폭주기관차처럼 샤덴프로이데가 끝없이 새로운 마법진을 낳았다·
이번에 재현하려는 건 상당히 위험한 마법인데 뭐 괜찮겠지·
[복제: 히아센 루미노스 데 카이젠]
[시전: 레 카이젠 파밀리아]
[system: 알 수 없는 명령어입니다·]
[Run-time error ‘492 at 0x00f14ec1]
카이젠 제국을 수호했던 88개의 마방진이 병렬로 전개된다·
평소라면 시간적 제약 조건 때문에 혼자서의 힘으로는 동시 캐스팅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마법일지라도 샤덴프로이데는 이를 가능케 해준다·
월계수의 제약이 마법의 전개를 기필코 방해하려 하지만 샤덴프로이데로부터 전개된 ‘레 카이젠 파밀리아’의 영속성과 비분리성이 이와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 순간 제약으로부터 빠져나온 하나의 마방진에서 늑대 신수의 아가리가 소환되어 입을 쩍 벌렸다·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천 개의 뾰족한 이빨들이 진 크로니클의 육체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씹히는 건 육체뿐만이 아니다·
고래가 크릴새우와 플랑크톤을 먹으려고 한번에 7만 리터의 물을 머금듯이 주위의 모든 땅을 통째로 입에 담는다·
땅이 쩌저적 갈라지고 경계선에 있던 나무와 건축물들이 우지끈 부러졌다·
“악마의···! 악마의 강림은 필연적일지어니!”
“하으으··· 그래 이거야! 넘흐 져아··· 전부···!”
잘근잘근 씹혀대기 바쁜 괴물의 괴성소리가 볼륨을 점차 줄여나갔다·
[■■■■■& %^$#$ 진 크로니클의 체력 재생력이 300% 증가합니다·]
[HP: 9471/666666]
[HP: 39720/666666]
[Error]
이따금씩 그는 체력이 회복된 틈을 타 마력폭풍을 일으키며 마법진의 무력화를 노리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촉수가 최후의 저항을 시작했다·
하나의 촉수에서 수천개의 곁가지가 갈라져나와 하늘을 뒤덮었다· 가로등과 달밤의 불빛을 모두 삼켜버릴 기세로 쏘아졌다·
[복제: 발럼 베나온스]
[월하만조]
크로니클의 촉수가 유리창에 부딪힌 비둘기처럼 팍- 하고 튕겨져나갔다·
아무리 두드리고 찔러대도 무형의 원형 돔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날 잡으려고 마음 먹었으면 적어도 그년처럼 처음 보는 마법으로 가져왔어야지·
[■■■■■& %^$#$ 진 크로니클의 체력 재생력이 ??00% 증가합니다·]
[HP: 8293/666666]
[HP: 59281/666666]
[Error]
재생과 파괴를 반복하는 구정물은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형체가 망가져 있었다·
그것이 땅에서 꾸물꾸물 솟아오를 때마다 발로 지그시 밟아주었다·
끈적끈적한 타르가 신발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도 않는다·
육체를 탐하려는 강한 원념에 소름이 끼쳐 순간적으로 고인 웅덩이에 신발을 내던졌다·
보글보글·
격렬한 거품이 일어나며 신발이 산화했다·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최후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죽음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생명의 월계수를 소중히 껴안아 품에서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마지막까지 흘러나오는 감정을 천천히 음미하니 더없는 포만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발악은 언제나 환영이야· 희망이 보일수록 불행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안 그래 노나메?
[■■■■■& %^$#$ 진 크로니클의 체력 재생력이 ????% 뭵뛠먍샭햞·]
···
···
···
[아카데미 부학장 · 진 크로니클을 격파하였습니다·]
[system: 이미 처리된 명령입니다·]
[system: 비정상적인 접근입니다·]
[Error]
···
···
···
[1부: 렘넌트 아카데미 침공 작전 END]
[2부: 영겁의 일도 야상곡의 기담]
[페널티가 초기화되었습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은 왠지 한시간 일찍 문을 열고 싶은 날이네요··!!
샤덴프로이데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카피닌자가 아니라 벤치마킹이라고 불러줬으면 합니다!!
겨우 이런 고유마도가 에피소드 하나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걸 만약 에스타샤가 본다면 어이없어하지 않을까요? 여기선 마치 궁극기처럼 서술되었지만 사실은 그냥 평타처럼 밥 먹듯이 사용했다는 점··!! 전생의 나메는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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