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7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사람들은 하나둘씩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런 군중들 사이에서 나메는 4월의 날씨치고는 너무 더운 게 아니냐고 속으로 구시렁대며 지하도를 걸었다·
두 갈래로 땋은 긴 머리카락이 이제는 바닥까지 닿을락 말락 할 지경이다·
아역모델 뺨치는 외모와 진귀한 헤어스타일의 소녀가 혼자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이따금씩 흘끔거리는 시선이 쏟아졌지만 나메는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 화면에만 집중했다·
지도앱을 켜서 내려야할 정거장과 출구를 외운 뒤 지하철 구석 빈자리에 몸을 밀착하듯 앉았다·
지하철은 덜컹거리는 소음 없이 조용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다음 정거장에 도달했다·
아직은 내려야 할 때가 아니라는 듯 나메는 눈을 감고 조용히 들려오는 백색소음을 자장가 삼아 아직 가시지 않은 피로를 덜어냈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안내 방송이 나왔음에도 지하철 문은 닫히지 않았다· 환승역이라서 출입문을 드나드는 승객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빈 자리를 하나씩 잡고 앉았고 어느새 나메의 옆자리에도 사람이 앉게 되었다·
“저기···”
곤란한 기색이 담긴 청년의 목소리에 나메가 눈을 떴다· 청년이 가리킨 것은 나메의 옆자리였다·
“죄송해요·”
“아냐 고마워·”
나메는 옆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품에 안았다·
인형 같은 귀여움에 웃음이 나올뻔한 걸 가까스로 참은 청년은 혹시라도 자리를 뺏기랴 서둘러 자리에 앉고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백색소음을 배경삼아 다시 잠을 청하려는 나메였지만 머지않아 옆 칸에서 온 불청객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 육시럴 xx xx들아! xxx이 다 꺼져 이 xx들아!”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온 것처럼 꾀죄죄한 몰골과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누더기를 겹쳐서 입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해진 옷을 입은 노인이 고함을 질러대며 인파 사이를 뚫고 나간다·
지하철의 사람들은 아예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듯 눈을 피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뭐야 정신병자인가봐·”
“쉿 그냥 무시해·”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비틀거리는 남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무사히 지나가나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남성은 나메와 눈이 마주치고 가던 길을 멈춰버렸다·
“뭘 그렇게 꼬라봐 이 xx아? 너도 내가 우스워? 눈깔 확 파버릴라!”
“···”
“너도 북한에서 날 감시하라고 보낸 년이지? 개돼지도 못한 간첩 xx들을 다 잡아 족쳐야 하는데-”
“아니 아저씨! 어린 애한테 무슨 짓거리이에요! 신고하기 전에 빨리 가요 당장!”
나메에게 위협을 주는 남성에 맞서 옆자리 청년이 불쑥 일어나 그를 제지했다·
“이 새파랗게 어린 놈들이 쌍으로···!”
“계속하시면 저도 가만 안 있습니다·”
노인이 손찌검이라도 할 심산이었는지 팔을 높이 들어보지만 청년은 곧바로 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팔뚝에 힘이 들어가자 노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촤르르-
그 와중에 청년이 들고 있던 파일철들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한차례 실랑이가 벌어지나 싶었지만 큰 체격의 청년에게는 차마 대들 수 없었는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떠나는 꼴에 사람들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
“진짜 2호선은 빌런들도 가지가지 한다니까· 저기 애야 괜찮아?”
어느새 파일철들을 줍고 있던 나메는 그것을 한데 모아 그에게 정리해서 돌려주었다·
“네 뭐 고마워요·”
“앗 안 주워줘도 괜찮은데 정말 고마워! 진짜 저런 인간은 태그나 제대로 찍고 들어왔는지 몰라·”
“시위··· 나가시나봐요?”
“아 이거?”
표지가 드러난 파일철 하나를 바라보며 청년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별 건 아니고· 비유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서 주문을 했는데 식당이 음식을 똑바로 안 만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단체로 화났다고 알려주려고 가는 거야· 혹시 월오아라는 게임 아니? 아직 어려서 모르려나?”
“알죠· 잘 알아요·”
“오 알고 있었구나· 사실 이런 자리에 내가 나가는 게 처음이라 조금 떨리네· 급하게 준비했던 대본이라 잘 썼는지도 모르겠고···”
“결국은 진실된 마음을 보여주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어?”
“그 게임 좋아하신다면서요· 솔직하게만 말하면 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전 여기서 내려야해서 가볼게요· 그럼 화이팅·”
“아 그래···! 정말 고맙다 친구야!”
지하철이 멈추고 급정차 과정에서 약간의 쏠림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능숙하게 넘겼다·
지하철의 문이 열리면 수백명의 사람이 나오고 다시 수백명의 사람이 들어온다·
같은 공간이라도 다른 세상이 된 것처럼 새로운 사람들로 붐볐지만 한 펑퍼짐한 옷차림을 한 여성이 손을 번쩍 들어 앉아있던 청년을 불러 세움으로써 다시 익숙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오 7-2칸 제대로 찾아왔다! 안뇽안뇽· 총대진님 이거 준비는 잘 해내셨나 모르겠네? 너 밤 꼴딱 셌다며?”
“아 진짜 말도 마· 방금까지도 그냥 자살할까 생각 중이었음·”
“하핳핳핳· 그럼 지금은?”
“진짜 엄청 귀여운 꼬마 애한테 시위 힘내라고 응원받고 힘이 났다· 너 오면서 혹시 못 봤어? 한 초등학교 1학년쯤처럼 보였는데?”
“글쎄다? 폰만 쳐다보고 오느라·”
“와 네가 꼭 봤어야 했는데 까비네· 진짜 배우 보는 줄? 아 혹시 진짜 아역배우였나? 말하는 것도 엄청 똑부러지던데· 싸인이라도 받아놓을 걸·”
“영화나 드라마도 안 보는 게 싸인 받아봤자 무슨 상관이냐· 걍 우리 귀여운 네임짱이나 같이 덕질하자·”
“귀엽기로는 그 애가 훨씬 더 귀여웠다니까?”
순간 청년은 자신의 표현력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에이 네가 노네임 생방은 안 보고 브이튜브로만 봐서 잘 모르나본데 사실 메인 아바타도 장난 아니게 귀엽거든? 만약 노네임이 더 귀여우면 어쩔래? 내기하실?”
“그래봤자 아바타잖아· 내가 본 건 현실 사람인데? 비교를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가상현실에서 더 오래 사는 사람이 참 까다롭기는···”
“뭐?”
“아무튼 보여줄게· 거기 앉아 있지 말고 와서 봐봐·”
“아니 역 한참 남았는데···!”
* * *
“잘못 찾아왔을리는 없는데·”
서마루가 톡으로 보내온 ‘감골 카페’의 위치는 분명 이곳이 맞았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건 빈 건물과 시멘트 포대가 전부·
건물 한바퀴를 빙 둘러보니 그제서 이 카페가 최근에 다른 곳으로 이전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어디로 옮겼는지에 대한 정보는 바람에 날아가버렸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어 난처했다·
서마루에게 연락을 한번 더 돌리고 그냥 멍하니 서 있기에는 아닌 것 같아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저기 언니 오빠·”
지나가는 커플을 붙잡고 내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감골 카페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최근에 옮긴 것 같은데 지도에 안 떠서 모르겠네요·”
“어머···! 잠깐만 감골 카페가 어디로 갔더라··· 오빠 기억나?”
“아니? 리모델링 한다고는 들었는데 언제 옮겼대?”
“저번에 사장님이 우리한테도 알려줬잖아! 그 선우네한테 한번 전화해보자· 빨리 전화 걸어봐·”
“김선우? 아아 박선우? 맞다 걔네들이랑 같이 갔었지·”
“잠시만 기다려줄래 친구야? 친구한테 바로 물어볼게!”
내가 언니라고 불러서 신이 난 모양인지 여성은 박수를 짝 치며 성심성의껏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통화음이 연결되는 동안 태양 아래에서 우리 셋은 쭈뼛쭈뼛 서 있었다·
“친구야 이름이 뭐야?”
남자쪽이 통화를 하는 동안 검은 롱스커트를 입은 언니가 무릎을 쭈그리고 내게 물었다·
“나메예요·”
“우와 이름도 정말 예쁘다! 몇 살이야 나메는?”
“곧 여덟 살이에요·”
“오오 여덟 살인데 여기 혼자 온 거야? 집이 어디야?”
“멀지는 않아요· 한 두세 정거장 정도·”
“나메는 대단하네! 지하철도 혼자 탈 줄 알고·”
“전화 안 받는데? 유봄한테 걸어봐야 하나· 나메야 조금만 기다려줄래?”
어차피 서마루한테 오는 연락보다는 빠를 것 같으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쪽 언니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는 모양새다·
“얘 속눈썹 진짜 길다· 그치 않아 오빠?”
“나메야 여기 언니가 너 엄청 예쁘대·”
“아하하···”
“예쁘다는 소리 많이 들어서 지겹구나?”
“딱 보면 몰라? 나메는 인기 엄청 많을 것 같잖아! 남자친구 있어?”
“남자친구는 없어요·”
“왜? 나메 좋다는 사람 많을 것 같은데·”
“그건 좀···”
“꺄아악 어떡해 너무 귀여워!”
다행히도 커플들의 주접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건네준 위치 정보를 폰으로 넘겨받은 나는 머리를 꾸벅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그리 멀지는 않았고 바로 다음 블록에 위치해 있었다·
근처가 전부 공사하는 아파트들뿐이라 다 똑같이 생겨서 미로를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도보를 거닐었다·
[감골 카페]
겨우겨우 찾아온 카페의 문을 열고 나니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이마에 스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혀주었다·
“어서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카운터에서 명랑하게 반겨주는 젊은 여성 점원의 인사를 받아주고 가장 구석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몸이 약해 최대한 짐을 덜고 덜었는데도 어깨결림이 있었다·
가방을 옆 의자에 올려놓고 안에서 파일철과 여러 캡슐 녹화 메모리 등을 꺼내 미리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때마침 서마루에게도 연락이 왔다·
[맞다 감골 카페 지금 지도에 업데이트가 안 돼서 위치가 다를 거야! 내가 바로 찍어서 보내줄게· 난 5분 뒤 도착할 듯!]
빨리도 보내준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일철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가장 완벽한 조명 아래서 완벽한 각도로 정렬해놓았다·
[브이튜브 공동 사업 계약서]
“주문하시겠습니까?”
나를 바라보는 점원이 너무 높이 있다· 메뉴판은 그보다 더 높았다·
상체를 쭉 내밀고 고개를 한참 치켜들어야만 전체 메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웃는 낯으로 내 주문을 기다리는 점원에게 고민 끝에 내 메뉴를 먼저 시켰다·
“카라멜 프라푸치노에 통 자바칩 추가해주세요· 에스프레소 휘핑 많이 주시고 모카 시럽과 카라멜 드리즐도 부탁해요· 나머지는 일행 오면 또 시킬게요·”
“아아 네헷? 네네 주문 받았습니다! 자··· 잠시만요!”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이런 날에는 단 게 땡겼다· 굳이 이런 날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지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나메가 단 게 땡기는 정도는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와 비례합니다·
오늘은 나데나데 맛보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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