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게임을 좋아했던 적은 분명 있었다·
생활 반경이 제한된 신체로 바깥 세상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경로였으니 말이다·
공평한 세상· 욕이 난무해도 대부분 나를 향하는 욕들이 아니었다·
모든 비속어들은 나의 캐릭터가 흡수하여주었기에 나는 게임이 마냥 좋았다·
그때는 공부가 죽을만큼 싫었는데 말이야· 웃기는 일이지·
정작 게임은 몇 판 해보지도 못하고 첫 인생에서는 공부가 내 삶의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죽기 싫으면 게임을 해야만하는 상황에 처하니 이제 게임은커녕 아바타들만 보아도 치가 떨렸다·
오히려 공부가 재밌을 정도다·
참으로 나라는 인간은 변덕스러운 존재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과거의 기억은 미화되고 시간은 고통을 해결해준다·
하지만 적어도 게임만큼은 업으로 삼을만큼 나의 상처가 아물어지지 않았으니까 방송에서도 게임을 할 계획은 없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죠?”
“그냥 들어와봤어요· 여기 있어도 되나요?”
“아··· 뭐··· 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가상현실에서 게임 말고 무엇을 즐기는지 도통 모르겠다·
단순히 짝짜꿍 모여 수다나 떨지는 않을 테고· 그래서 사전답사겸 아무 채널이나 들어가서 참고해보기로 했다·
대학교 강의실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
방송의 호스트로 추정되는 이 사람도 50대 후반쯤으로 추정되는 노교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 교수님 죄송합니다! 비번을 걸어놓는걸 깜빡해서요· 저분은 어떻게 할까요?”
“이왕 온 청강생인가본데 쫓아내는 것도 모양새 빠지지 않나? 때 되면 알아서 가겠지· 별로 재미있는 시간도 아닐텐데 말이야·”
내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착석하는 동안 그는 칠판에 방제와 똑같은 내용을 적었다·
[Micro-Nano Transmutation Circle Hermeneutics Make-up Class #2]
요즘은 개인 방송이 사교육에도 손을 뻗을 정도로 영향이 큰가?
아니면 반대일 수도 있고·
노교수가 헛기침을 하는 동안 조교는 열심히 ppt 자료를 프린트하여 각 자리에 배부한다·
그리고 아까 설정이라는 창을 몇 번 매만지더니 다수의 아바타들이 허공에서 뿅하고 나타난다·
게임에서의 제각기 독특한 아바타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다들 20대 청년의 모습을 한 수수한 차림이었다·
도리어 내 모습을 그대로 본뜬 나의 아바타가 이 방에 어색함을 더할 정도였다·
시청자들끼리는 이미 서로 친목을 다졌는지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교는 친절하게도 내 자리에까지 프린트를 배부해주었다·
나는 키가 작았기에 적당히 앞자리에 안착했다·
노교수의 출석을 배경음 삼아 프린트물을 펄럭이며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미시적 관점에서의 연성진 해석학이라·
반도체 분야에서 쓰이는 리소그래피 공정을 연성진에 적용하였을 때의 이점을 소개하는 내용이 오늘 수업의 주였다·
리소그래피라는 말 자체는 오늘 처음 접해보지만 연성진의 고질적인 문제인 해상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어 나로서는 꽤 흥미가 가는 내용이었다·
역시 이정도 컨텐츠는 내놓을 수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는걸까·
사회는 여전히 각박하다·
게다가 이 방도 나름 잘 꾸민 티가 나는게 프로 방송인의 자태가 났다·
그런데 돈은 어떻게 버는거지? 여전히 이 방의 수익 모델은 알 방법이 없었다· 후원도 막혀있고···
노교수가 수업을 진행한다·
헛기침은 그만의 습관인 것인지 가상현실임에도 말 중간중간에 약간 거슬릴 정도였다·
하지만 내용은 예상보다도 훨씬 알찼다·
오히려 프린트물이 이 내용을 담지 못한게 흠이라면 흠이라 할 정도로·
다른 시청자들의 고개는 이미 저 바닥을 향해 내려갔지만 애초에 보강수업이니 다 아는 내용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게 새로웠던 나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연성진을 새겨보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는 인터넷의 도움을 받으며 알아나갔다·
이런 인재가 인터넷 방송인으로 썩고 있다니 전생에 태어났으면 마탑주는 따놓은 당상이었을텐데·
“결국 언제나 우리 과학자들 그리고 공학자들은 소재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터널링 효과가 일정 확률을 넘어서면 연성진의 효율은커녕 작동 그 자체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를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기 친구 이름은 뭐죠?”
“저요?”
“네 귀여운 꼬마 아가씨 아바타를 한 학생분·”
교수가 예고도 없이 나를 가리킨다·
“나메입니다·”
“남희? 좋은 이름이네요·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길래 한번 물어봤어요·
그럼 남희 학생은 오늘 소개한 소재 중에서 어떠한 소재의 연성진이 가장 높은 분해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꾸벅꾸벅 졸던 이들까지 덩달아 깨며 나에게 이목이 집중된다·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은 익숙치 않은데·
교수가 했던 내용을 복기해본다·
이전 세상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있었던가? 분해능을 높이려는 노력은 분명히 있었다·
그에 있어서 리소그래피 공법은 정말 특이했지·
“굳이 소재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효율을 전부 무시하고 단순히 분해능을 높이는 데에만 목적이 있다면 교수님이 설명하신 간섭파를 활용하는게 현재로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테니까요·”
“혹시 나와서 설명해볼래요?”
내 손에 분필이 쥐어졌다· 분필 촉감도 그대로 재현하는게 신기하구나·
나는 가장 간단한 입사파와 반사파를 생성하는 이중 연성진을 그려 각 꼭짓점에 약간의 수식을 변형시켰다·
“간섭파를 생성하는 이중 연성진을 리소그래피 연성진에 이런 식으로 병렬로 연결하면 위상적으로 같은 상태라서 여전히 안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그러면 현실 세계에서 소재를 찾는 것보다 이 공란에 들어갈 연성진 소재에 대한 상수값을 시행착오법으로 찾는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네요·”
간단한 이야기다· 시간적으로는 비슷하지만 한번의 시행에서 들이는 노력이 다른 것이다·
전자는 지구의 온 물질을 다 뒤지는 것을 넘어 화합물까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문제지만 후자는 컴퓨터로 주르륵 계산하면 언젠가는 나오는 값이니까·
게임도 비슷한 면이 있다·
나에게 맞는 챔피언을 수백개 중에 찾기보다는 하나를 제대로 잡아서 수백번 연습하는게 훨씬 나은 것처럼 말이다·
괜히 또 생각이 게임으로 흘러갔네· 나는 교수에게 분필을 되돌려주고 방을 나갈 준비를 했다·
PC방 시간이 어느덧 종료 5분전 메시지를 알리고 있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좋은 강의도 들었는데 돈은 못 드려서 죄송하네요·”
“돈이라니···? 혹시 이 학교 학생이 아닌가요?”
* * *
‘비번은 SatireV321이에요· 매주 이 시간에 강의를 하니 종종 들렸으면 좋겠네요·’
수업을 들으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는 다소 맥빠졌다·
설마했는데 진짜로 대학 강의였다니·
대체 그러한 강의를 왜 트위시 플랫폼에서 진행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트위시와 브이튜브가 가상현실 플랫폼을 독점했기 때문일까·
국립학교의 열악한 인프라가 심히 안타깝다·
조교가 방을 설정하는 도중 내가 그 틈새에 들어온 모양·
교수는 다음주 수요일에도 보자고 희망했지만 나는 차차 생각해보기로 했다·
돈을 준다면 모를까 결국 내가 목표로 했던 사전답사는 원대하게 실패했다·
여름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해는 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찬찬히 감상하며 아린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왜 이제야 온 거야···?”
“백아린?”
가뜩이나 지친 몸이었데 아린이 또다시 내게 덮쳐온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달래다가 떼어낼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 울먹거림이 가득하다·
“난 나메랑 헤어지기 싫어·”
“무슨 일 있었어?”
어느새 눈물을 가득 품은 그녀의 눈을 닦아주었다·
“나 내일부터 입양된대··· 저번에 민우 오빠 데려갔던 그분한테·”
“좋은 일 아니야?”
“나메가 없잖아! 난 가도 나메랑 함께 가고 싶었어! 그런데··· 그런데 아저씨가 두명은··· 두명은 안 된다고 흐윽··· 흐아아아앙··· 나 그냥 안 갈래· 평생 여기 있을 거야·”
“고집 부리지 마·”
“왜 말을 그렇게 해···”
“메를린 보육원을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몰라· 나랑 헤어지는건 잠시 뿐이잖아·”
가뜩이라 아린은 학교에서도 보육원에서도 외톨이다·
이렇게 예쁘고 착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아이가 이런 구석에서 썩는건 너무 아깝다·
백조는 오리들 사이에 있으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법이고·
“아저씨는 분명 부자라 했는데··· 나보다 나메가 더 예쁘고 똑똑한데 왜 나만 데려가려 하는거야···”
“어디로 가는 건지는 알아?”
도리도리·
“아린아 잘 들어· 어차피 나는 보육원에서 나갈 생각이었어· 학교도 나오지 않을 거고·”
“응···? 아니 왜?”
“몸이 약해서 의사 선생님이 집에서 오래 쉬어야 한댔어·”
“역시 많이 아픈거 맞았지?”
“난 그동안 아린이가 좋은 집에서 밥도 잘 먹고 학교도 잘 다녔으면 좋겠어· 나중에 내가 다시 학교에 오게 되면 이번에는 아린이가 내가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
“내 걱정은 너무 하지 마· 나도 갈 데가 있으니까·”
“그치만··· 연락은 어떻게 할건데···”
“아저씨가 부자라 했지? 분명 집에 우리 아린이 전용 캡슐도 있을 거야· 나중에 서로 시간이 나면 거기서 만나자·”
“약속할거지?”
“응·”
“약속 안 지키면 번개 천번 맞을 거야·”
“당연하지·”
뭐 진짜로 번개만 천번 맞은 적이 있지만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니까 되도록 지킬 것이다·
저녁 시간이 되어 우리들의 수다는 잠시 여기서 끊어졌다·
아린은 마음이 싱숭생숭한지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였다·
보기에도 안쓰러워 그녀에게 억지로 바나나를 내밀어주었다·
다행히 내가 주면 척하고 받아먹는 모습이 천성 강아지가 따로없다·
어쩌다보니 오늘이 아린과 함께하는 마지막 과외시간이 되었다·
나름 가르치는 맛이 있었는데 나도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오늘 트위시에서 재밌는걸 배웠어·”
“뭐야 PC방에 들려가지고 늦게 온 거였어?!”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간신히 그녀를 진정시키고 예전에 직업체험박람회에서 몰래 가져온 석판을 꺼내왔다·
내가 그녀에게 가르쳐줄 마지막 강의니까 나도 오랜만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지·
“넌 마나를 본 적이 있어?”
“마나? 가끔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마법 쓸 때 파란색 공기는 봤었어·”
“마류를 말하는게 아니야· 정확히는 마나 입자 말이지· 오늘은 내가 마나를 보여줄게·”
석판에 대원(大圓)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성진이 아닌 마법진을 그리는 작업이니까 신중에 또 신중을 가해야 한다·
나도 가끔은 계산 실수를 할 때가 있으니까·
“마나는 원래 눈으로 볼 수 없어· 단순히 작기 때문이 아니야· 마나 자체는 입자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파동의 형태도 아니지·”
어차피 그녀의 나잇대에서는 입자와 파동의 차이도 잘 가늠되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설명을 계속하였다·
석판에 룬어를 가득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나는 그래 가능성이야· 다른 말로는 확률이라고도 하지· 예를 들어 아린이가 나를 좋아하는 그 마음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지?”
“음···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그래 결국 비슷한 개념에 치환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어· 시간 공간 그리고 성질 등등··· 너는 마음에 ‘크기’라는 속성을 부여했고 그 속성과 가장 걸맞는 ‘개념’을 꺼내온 거야·”
“잘 이해를 못하겠어·”
“아린이는 그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나랑 손을 잡기도 하고 나를 안아주기도 하지?
마나도 마찬가지야· 마나를 보고 싶으면 일단 마나가 그곳에 확실하게 있어야 돼·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마나의 손을 잡아주는 거야·”
석판에 차원을 더한다·
이것을 연구해보면서 신기한 성질을 알 수 있었는데 필요하다면 바로 3차원 마법진을 전개할 수 있도록 자체적으로 기능이 부여되어 있었다·
현재 내 마나량으로 동시에 전개할 수 있는 다중 마법진은 4개가 한계 마침 필요한 개수도 딱 4개였다·
“이런 모양을 정사면체라고 해· 정삼각형 4개를 합쳐서 만든 도형이지· 맨 아래는 마나를 관측하기 위해 만든 리소그래피 연성진이야 그리고 이 3개의 옆면이 각각 마법진에 해당하는 거고·”
여기서부터는 내가 아는 마법이니까 재빠르게 수식을 적어나간다·
“첫번째 마법진은 마나를 정제해줘· 마나를 모이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마나의 성질이 비슷해야하거든·”
“두번째는 마나를 응집시켜주지· 마나가 네세시테 임계점을 넘으면 확률이 1에 가까워져 입자로 변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
“마지막은 비밀· 다 알려주면 재미 없잖아?”
정사면체의 꼭짓점으로부터 내가 흘려보낸 마나가 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붉은색 노란색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색으로 변하면서 작지만 강력한 빛을 발광하는 입자가 탄생한다·
나는 리소그래피 연성진에 광도를 조절하는 변수를 추가해 빛을 일부 차단시켰다·
어떻게 보면 우박과 비슷해보이는 푸른색의 정이십면체 입자가 허공을 거닐었다·
아린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마나 입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입자는 우리 머리카락 두께보다도 1만배가 더 작아· 신기하지?”
“응···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 같아·”
“시전자의 감정에 따라서 모양이 다르게 나와· 이렇게 면이 많이 나온 경우라면··· 응 그래 나도 그만큼 아린이랑 헤어져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런거야?”
“응 그런거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zakuti님이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주말에도 찾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댓글 하나하나가 작가에게 크나큰 힘이 되어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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