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천규진 교수의 올해 한 해는 여느 때와 같이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한 때는 잘 나가는 대학의 교수로서 채용되었을 때 어릴 적의 꿈을 다 이룬 것만 같았지만 인간의 본성이 그렇듯 모두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여전히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지만 이를 따라주는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적어지는 사실에 슬픈 감정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천규진 그는 항상 자신을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다녔다·
그렇기에 자신의 동생과 달리 가족을 만들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가기가 싫어서 이따금씩 랩에서 고생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을 위해 야식을 시켜주며 어울리는 게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인생의 슬럼프라고 하면 슬럼프겠지· 그동안 ‘수많은 슬럼프’를 겪어보았지만 이런 식의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침 내년이 안식년이니 잠시 본업과 거리를 두고 앞으로의 행방에 대해 깊은 고민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웬 수상한 청강생 하나가 자신의 마지막 수업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굳이 소재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상현실에서 지원하는 최소 연령대의 아바타를 착용한 학생·
천재들은 보통 괴짜인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그러한 경향은 외로움 때문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회적으로 어울리고 싶은 욕망은 남들과 똑같은데 사고하는 방식이나 가치관 그리고 언어적 수리적 능력이 달라 의사소통 장애에 가로막힌다·
이들은 결국 일방향적인 것에 몰두하게 된다·
그것이 애니메이션이든 스포츠카든 그러한 오타쿠스러운 것으로·
이 학생도 그런 부류인 걸까· 하지만 그녀의 답변은 언제나 심상치 않았다·
미국과 달리 한국의 학생들은 질문받는 것을 정말 꺼려한다·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지치고 교수는 교수들 나름대로 고립되어 간다·
조금이라도 그 간극을 메워보고자 한국대학교 자연대에서는 자신이 거의 최초로 가상현실 수업이라는 것을 도입하게 되었다·
보다시피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지만 어느날 우연히 들어온 재학생도 아닌 그녀는 천규진 교수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배운 것을 착착 이해하고 응용하는 것도 모자라 역으로 자신에게 고민거리까지 안겨주는 학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라 이 학생은 다르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수식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최속으로 발동시켜도 0·3초라면 굳이 이 연성진이 5서클인 이유가 없어요·]
현장에서 받은 학생의 질문에 다음 시간까지 검토해보겠다고 하고 꼬박 이틀을 밤을 새서 그녀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날 그녀도 자신과 똑같은 수식을 적어 보여주었을 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학생은 진짜 천재다·’
비록 그녀가 연성진에 사용하는 연산자가 다소 특이하여 수식의 모양에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결국 큰 틀에는 동일하였다·
천규진 교수는 그래서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2시간이 되도록 그녀는 강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오지 않는 걸까 생각하던 도중 그녀의 아바타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동안 자신의 동생 계정을 사용해서 들었던 걸까?’
그런데 굳이 그녀가 아니라 동생이 온 이유는 무엇이지?
이곳에 올 만큼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라면 부른 것이 너무 미안해질 것 같아서 교수는 말을 아꼈다· 그런데 아이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새어 나왔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노나메라고 합니다· 연성진 해석학 수업의 성적을 확인하러 왔어요·”
“네가 나메라고?”
“네 무슨 문제라도?”
처음에는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다·
키만 봤을 때는 대여섯 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작은 체구의 아이가 당돌하게 올려다본다·
가상현실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일곱 살부터니까 잘 쳐줘도 일고여덟 살이었다·
나메는 머쓱한지 채점지 옆에 다량으로 구비해놓은 이면지에다가 연성진 수식을 작성하였다·
그녀가 평소에 즐겨쓰는 ‘카이젠 완전변환행렬’이었다·
“필체가 같을 거예요· 한번 확인해보세요·”
천규진 교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녀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답안지를 넘겼다·
[성명: 노나메 (NO Name)]
“···”
그런데 갑자기 나메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천규진 교수는 그것이 성적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195/200]
“어디에 제 잘못이 있는거죠?”
마치 보험사에서 90:10으로 교통사고 과실판결을 내렸더니 자신은 단 10은커녕 1의 잘못도 없다고 조목조목 따지려는 기세였다·
“한번 보자· 여기 이 부분·”
“잘 안 보여요·”
나메는 최대한으로 까치발을 들어 올려보았지만 시야에 닿지 않았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고 교수는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녀에게 직접 답안지를 건네 주었다·
조그마한 손으로 종이를 집어 양팔로 최대한 펼쳐보아야지만 답안지를 가까스로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마냥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많은 학생들이 실수를 범했던 부분인데·”
하지만 나메는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 개소리하지 말아요 이게 왜 틀린데요·”
나메의 얼굴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 * *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일종의 강박 같은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에스타샤 황녀에게 제대로 문책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지엄한 황명을 어기고 북부의 오랑캐들과 어울리는 것을 방치할 것입니까?]
한번의 실수는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야만적인 세상·
[어떡하나··· 그대 하나의 목숨으로는 끝나지 않을 지경까지 와버렸군·]
내 손에는 나 하나의 목숨만 달려있지 않았다·
[황녀님께는 미안하지만 북부 정벌을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을 것 같아·]
이해해·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
너희들도 전부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으니까·
내가 없는 그 세상은 결국 비참한 말로를 겪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얻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이제는 신경쓰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장장 25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혼에 새겨진 습관들은 여전히 나의 큰 부분을 구성했었고 그 성격은 어디 사라지지 않았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고 막 화가 나는 것 같다·
내가 잘못했다고?
진짜?
아니 난 잘못한거 없어·
단 하나도
나는 잘못하지 않아·
나는 잘못할 수 없어·
나는 완벽해야하니까·
“저기 애야 진정을···”
“왜 내 수식이 틀렸다고 한 거야? 경계점들 때문에 라그랑주 승수법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거야?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절대로 틀렸어· 내가 쓴 최적화 조건은 경계점을 포함하는 충분조건이야·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언제까지 내 입으로 나불대야 하냐고!”
눈 앞이 흐릿하다·
지금 나는 뭐하고 있는거지?
정신이 몽롱하고 세상이 파도처럼 요동치며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린다·
세상은 차갑다기에는 너무 뜨거웠고 어둡다기에는 눈이 저릴 정도로 밝았다·
마치 새벽에 잘 자고 있는 사람을 라이트로 비추며 억지로 깨우는 이 불쾌한 기분을 나는 전에도 느껴본 적 있었다·
마나의 금단현상·
마나의 금단현상은 사리분별의 능력을 상실시키고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극심한 불쾌감을 동반하며 의식을 잃곤 했다·
하필 이럴 때···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에 포션을 먹는 걸 까먹었다·
방송 중에 알람이 울려 급하게 나온 탓도 있었다·
맛대가리 없는 역겹기만 한 마나포션이 절실히 필요했다·
* * *
[마나의 금단현상? 폭주가 아니라요? 마나에도 중독이 될 수 있어요?]
응 신기하지?
[그래서 맨날 마물 피를 먹는 거예요?]
그래 나도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야·
[정말 괴로울 것 같아요· 마물들은 피에도 독성 성분이 있다고 배웠는데·]
마기는 별거 아니야· 오히려 마나가 훨씬 위험하면 위험했지·
[처음 듣는 얘기에요· 길드 아저씨들은 마나는 많을수록 좋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볼까?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공기는 사실 종류가 하나가 아니야· 여러 종류의 공기들이 섞여 있는 거지·
[진짜요? 그것도 몰랐어요 저는·]
그중에 산소라는 친구가 있어· 우리가 필요한 건 오로지 산소뿐이야·
우리가 숨을 쉬면 우리 몸이 알아서 산소를 골라가지· 애초부터 그렇게 설계가 돼있는 거야·
[신기하네요· 그럼 다른 공기들은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아니야· 산소만 마시면 사람은 죽어·
호흡이 힘들고 시야가 흐려지고 결국은 의식을 잃어버리지·
생명의 한 가운데서 그냥 그렇게 죽어버리는 거야·
[마나도 마찬가지라는 거네요?]
응·
사람이 9서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
마나를 정제하는 기관이 우리 몸에 없어서 그래·
고위 마법을 쓰면 쓸수록 사람은 망가져·
겉으로는 한없이 강해져보이지만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가는 거야·
[조금 무섭네요· 누나는 그럼 괜찮아요?]
걱정은 참· 난 지금 마왕이랑 싸워도 이길 수 있어·
[누나는 다 괜찮은데 마지막에 항상 이렇게 허풍이 심해요·]
넌 오늘 저녁 없어·
[아아아아아아아 왜 그래요! 취소 취소! 누나 멋있다!]
어쨌든 이 세상에는 필요 없는 게 단 하나도 없어·
공기도 산소만으로 구성되지 않듯이 이 제국도 황실과 귀족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어·
폭우가 내려도 역병이 돌아도 전쟁이 나도 언제나 내일을 바라보는 백성들이 있기에 나라가 있는 거야·
[누나 말을 저기 저 까마득한 윗분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황실이 우리를 이해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요?]
노력해야지·
[뭘 노력한다는 거예요 또· 당장 남작님한테 가서 그 말 똑같이 할 수 있어요? 난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은데·]
할 수 있지·
[또 또 허세 부린다·]
내기할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알고 계셨나요? 마물들의 피는 의외로 빨간색도 초록색도 아닌 오징어 먹물같은 검은색입니다·
마나가 불완전응축되면서 생기는 침전물의 일종인 ‘레지듀’의 구조가 가시광선 및 적외선 영역의 빛을 흡수하는데 최적화되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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