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5
윤슬이 캡슐에서 나온 건 늦은 밤이었다·
커뮤니티를 확인할 여력도 없이 그녀는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재밌었어···’
얼마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는가·
여전히 생각한 것만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스스로 자책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델라와 나메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을 더듬더라도 확실하게 끝맺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다들 착한 친구들이었다·
[난 그거면 충분하다고 봐· 언니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메는 소문처럼 어른스럽고 똑똑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윤슬은 다시 우울감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만 갔다·
잘못한 게 없다는 말에는 공감해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체나 언니는 결국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유가족들이 건네준 유서를 떨리는 손으로 펼쳐든다·
일부러 자신을 위해 대중들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윤슬아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네가 성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했어·
기획사에서 혼자 비겁하게 도망친 너를 향해 몇 번이나 저주했는지 몰라·
그런데 오랜만에 만나보게 된 너는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밝게 빛나 보여서 그동안 너를 뒤에서 욕하기만 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초라해지더라·
만나줘서 고마웠어· 나같은 안티팬마저 팬으로 만들었으니 너는 앞으로도 뭐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내 몫까지도 꼭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
어쩌면 체나가 자신을 보고 느꼈던 감정이 마치 윤슬이 나메와 아델라를 향해 품었던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밝게 빛나는 별은 주위의 별을 모두 침묵시킨다·
그리고 윤슬에게 있어서 나메와 아델라는 그러한 존재였다·
특히나 카리리의 말투를 아델라와 비슷하게 만든 이유도 예전에 한창 월오아 나이트메어 스토리를 시청하면서 그녀의 행동거지를 따라해보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도 서로를 아껴주는 두 소녀의 관계가 너무 애틋하고 부러웠다·
‘왜 나만 이런 가족 사이에서 태어나가지고···’
윤슬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따갚대도 윤슬이 스스로 변화를 주기 위해 큰 마음을 먹고 참가한 대회였다·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는 매끄러웠고 병세도 차차 나아지는 듯 싶었다·
그래서 나메에게까지 합방을 제안해 트라우마를 떨쳐내려고 해보지만 공황발작은 쉬이 예측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대회까지만··· 대회까지만 버티자···”
팀원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으니 최선을 다하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 뒤에는···”
윤슬은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역시나 체나처럼 다 내려놓고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충동적으로 들 뿐이었다·
* * *
“체육대회인데 병원을 간다고? 왜?”
“아까도 말했지만 건강검진 때문이라니까·”
“왜 하필 그게 오늘 체육대회 날인 건데!”
“우천 때문에 체육대회가 일주일 뒤로 미뤄졌잖아· 이미 있던 건강검진 일정에 우연히 겹친 거야·”
“안 가면 안 돼? 힝···”
5월 중순에 있을 체육대회가 때 아닌 장마로 취소되었다·
그래서 한 주 미루게 된 게 하필 몇 달 전부터 잡은 건강검진 일정이랑 겹쳐서 불가피하게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열심히 설명해보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체육대회는 내년에도 있고 내후년에도 있잖아· 체육대회 말고도 재밌는 행사가 얼마나 많은데·”
결석계를 제출하러 아침에 잠깐 학교에 들른다는 게 아이들의 만류로 스케줄이 계속 지체되고 있었다·
“맞아 유나야· 나메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선생님 도와드리러 가자·”
“씨이··· 내가 얼마나 오늘만 기다렸는데··· 흐잉···”
“윤시후 네가 유나 잘 챙겨줘· 혹시라도 유나 오늘 다치기라도 하면 내일 나한테 죽는다?”
“왜 내가···?”
재클린 선생님께 결석계를 드리고 조심히 잘 갔다오라는 말을 들었다·
뭐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아카데미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요즘 계속해서 집-학교-집-학교 생활패턴만 반복되니 조금만 길을 벗어나도 펼쳐지는 풍경이 새롭기 그지없다·
이게 설마 뉴스에서 말하는 심각한 수준의 VR중독이라는 걸까?
VR 세상에 너무 빠진 나머지 현실과의 지나친 괴리감을 못 이겨 우울증에 빠진다는 환자가 날로 증가한다는 뉴스가 일종의 분량 떼우기인지 계속해서 나왔다·
난 내 본모습 그대로 아바타를 사용하고 있으니 해당사항은 없겠지만·
팔랑-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를 미리 병원에 제출하고 기다렸다·
그 뒤로는 무료한 검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풀코스라서 더욱 자비없다·
CT를 찍고 원리가 궁금해지는 마나공명장치 안에 누워보기도 하고 피도 뽑았다· 다행히도 빨간색이다·
“신발 완전 뽀짝뽀짝거리는 거 봐요···!”
“그르게 나도 저런 손녀 딸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
“아! 결과는 이메일로 보내줄게! 수고했어요!”
까꿍하는 표정으로 간호사들이 나를 배웅했다· 내가 아기냐?
하도 호들갑을 떠는지라 여기저기서 쏘아보는 시선이 늘어나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에는 카리리에 대한 정보를 계속 읽어나갔다·
특히나 윤슬이 계속 마음에 담고 있던 건 아무래도 ‘아이돌 체나 사망 사건’·
지나친 스케줄 일정과 소속사의 갑질에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의 인생을 끊은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정말 옥외광고판이며 뉴스며 전부 체나를 추모하는 내용으로 도배된 기억이 난다·
유서가 늦게 공개된 이유는 유가족들이 연습생 시절 체나에게 성접대를 강요한 소속사를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치열한 법적 공방이 오가는 실정이었다·
혐의에 같이 묶인 서울시장은 뇌물수수 건이 인정되어 사퇴하였지만 여전히 본인은 미성년자와의 신체적 접촉은 일절 없었다며 강력히 부인하고 있었다·
참으로 복잡하고 더러운 세상이다·
트리위키라는 미궁 속에 더 빠져버리기 전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카리리가 그녀와 엮인 부분은 아무래도 합방했던 당시가 사망일 바로 전날이라는 점 추가로 같은 소속사 연습생이었다는 점까지·
윤슬이 소속사에서 나와 버튜버를 시작할 때 체나는 열여덟의 나이로 4인조 아이돌 그룹 ‘엔비’에 데뷔했다·
그냥저냥 저조한 성과를 내다가 체나가 혼자 낸 솔로곡이 전 세계적으로 대박을 터뜨리니 소속사에서 계속 밀어준 케이스였다·
[체나 April 2049 월드투어 일정·jpg]
한 팬이 정리한 일정표를 보면 확실히 살인적인 스케줄인지라 절로 고개가 끄덕였다·
이런 걸 쉬지도 않고 2년 넘게 했으니 어린 아이가 버티기에는 무리였겠지·
[카리리/논란 및 사건 사고
2·15· 아이돌 체나 사망사건 관련]
이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던 요소도 전부 체나의 자살 징후만 나열했을뿐이었다·
매사 의욕이 없었던 점 방송 도중 가슴통증을 언급했던 점 카리리의 노래 제안을 거절했다던가 카리리가 부른 노래 중 자신도 ‘들국화’처럼 되고 싶다는 언급 등이 있었다·
‘어이가 없네· 이런 걸 가지고 윤슬이 어떻게 알아·’
특히나 카리리의 방송 스타일상 속마음을 털어놓는 코너에서 체나의 자살충동을 부추겼을 거라는 추측성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화가 났었다·
이런 하나하나가 모두 카리리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들일 텐데·
방송을 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려는 와중에 천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메야 아직도 밖이니? 건강검진은 잘 받았고?]
“아 네 곧 집 앞이에요· 결과는 나중에 이메일로 받을 수 있다네요·”
[그럼 빨리 집으로 와주겠니? 우리 둘이서 할 얘기가 있구나·]
“아 지금 집이세요? 네 금방 들어갈게요·”
오늘도 아침 일찍 출근하신 걸로 아는데 이 시간에 웬일로 집에 다 계시지·
벌써 치매이시면 안 될 텐데· 괜히 걱정돼서 오는 길에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다드리기로 했다·
절대로 내가 먹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집에 돌아오니 두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참으로 애매한 게 조금만 더 일찍 끝났더라면 체육대회도 구경하러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아카데미 체육대회 경험은 내년으로 다시 미루어야 할 듯싶었다· 우리 반은 이겼으려나?
“다녀왔습니다·”
정말로 집에 오셨네?
신발장에는 천교수의 검은색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오면서 호두과자 사왔어요· 좋아하시려나 모르겠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안방에 계시나보다·
일부러 뒤를 돌아 신발을 벗었다·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는 최적의 움직임을 위해서였다·
신발과 신발 사이에 내 작은 구두가 가지런히 주차된 것까지 확인한 후 미닫이문을 확실하게 닫았다·
“왔니?”
현관쪽에서 벌써 천교수의 뒷모습이 반쯤 보였다·
“아 부엌에 계셨네요? 뭐 하시느라 대답도 없으신-”
천교수의 맞은편에는 남성 한 명이 더 앉아 있었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보이는 인물은 나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하··· 안녕···”
“천세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 * *
“천세민씨가 조카라고요?”
아니 악센트가 세게 나가서 괜히 욕처럼 들릴 것 같아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조카라고요?”
당황한 기색으로 천세민이 벌떡 일어나 답을 내주었다·
“어어 아아 맞아! 이쪽이 우리 큰아버지 맞으셔!”
“내가 불렀다·”
왜?
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조금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천교수에게 의절한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그쪽 가족사항이야 솔직히 내가 궁금할 이유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 갑자기 천세민이 그의 조카를 자처하니 당혹감이 절로 들었다·
천교수가 묵묵히 편지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서울 중대범죄수사청
제 2051-00628호
수신: 천세민 노나메 귀하
제목: 재수사요청처리결과통지서]
“이게 뭐니?”
그의 말에서 절제된 감정이 엿보였다·
나는 세민쪽을 바라보더니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입모양으로는 대충 ‘난 아무것도 안 말했어·’라고 한다·
“나메한테 직접 들었으면 좋겠구나·”
오늘 하루는 정말 길어질 것 같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결과통지서는 문자뿐만 아니라 우편으로도 송달된다는 사실을 나메는 모르고 있었나 보네요··!! 소설에서는 생략된 내용이지만 나메와 세민이 저걸 작성한 시점은 월오아 스토리모드 클리어 직후랍니다··!! (140화 141화 사이)
천세민도 나메를 실제로 만나보는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메가 누구한테 입양되었는지 알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베른슈타인님 1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나메를 너무 세게 안으면 안 돼요!! 살살 아기처럼··!!
술냥이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아플 때마다 후원을 받게 되는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고 또 너무 고맙기도 합니다··!! 좋은 이야기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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