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3
스토커와 엇갈리지 않게 엘리베이터 작동을 중지시킨 나메는 13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열려있던 현관문을 보고 윤슬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메의 시선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집 안이 난장판이었다·
고급 아파트인만큼 화계마도를 써도 불에 타지는 않았지만 가구 곳곳에 그을린 자국들이 허다했다·
“하아··· 하아··· 이럴 거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올 걸 그랬네·”
전보다 체력이 붙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힘든 것은 매한가지였다·
“뭐하냐? 너 왜 아직도 윤슬의 집에 있는 거지?”
조용하기 그지없는 공간에 대고 말했다·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안방에서 코트를 입은 남성이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초여름에는 맞지 않는 복장이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 며칠은 깎지 않고 내버련듯한 수염이 남성의 초췌한 인상을 가중시켰다·
“넌 또 뭐야···? 리카 동생이냐?”
다만 괴한도 적잖이 당황에 찬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 아이의 몸집이 너무 작아 나름 위협해본다고 하는 말조차 무해하게 들릴 뿐이었다·
나메의 시선을 한참이나 받은 남성이 무언가 떠올렸는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만 너 노네임 아니야? 네가 어떻게···?”
남성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카리리의 합방에서 몇 번이나 같이 나온 노네임의 아바타이다·
순간 괴한은 자신이 가상현실에 접속해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럼 잘 알겠네·”
나메의 입에서 노기가 담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경찰이 오기 전까지 넌 나한테 죽을만큼 처맞을 거라는 거·”
섬뜩한 말을 내뱉는 소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경찰들이 빨리 오는 걸 빌어야 할 거야·”
나메가 내뱉은 단어에 남성이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경찰? 내가 뭘 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해!”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이 지랄을 해놨는데·”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에도 나메는 남성을 어떻게 제압할지 머리를 굴렸다·
남성은 화계마도를 사용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체격은 평범한 성인 남성이지만 위력을 보았을 때 결코 수준이 낮은 편은 아니었다·
‘대략 3서클 아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4서클까지 사용할 줄 안다고 가정하자·’
나메는 어디까지나 일고여덟 살에 지나지 않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게임에서의 경험을 생각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방금 전까지 범시전으로 아라베스크의 매듭을 사용한 걸 생각하면 더욱 마나를 아껴서 사용해야했다·
싸움이 길어질 것을 대비해 최대한 마나가 적게 들어가는 마법을 고안해냈다·
[연성: 무스시몰-이보텐산 합성]
[3서클 시전: 환각(hallucination)]
“너··· 너도 날 죽이려고 체나가 보낸 거구나! 내가 시전하게 놔둘 줄 알고!”
남성이 헛숨을 삼켰다· 설마했는데 소녀는 마법을 다룰 줄 알았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뇌에서 잠시 지워버리기로 했다· 본능이 판단하건대 이건 명백한 전투개시의 신호였다·
마법을 저지하기 위해 남성이 악을 쓰며 나메에게 달려들었다·
발밑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씨를 주먹에 옮겨 붙여 인정사정없이 그녀가 있던 곳을 향해 휘둘렀다·
부웅-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주먹이 닿으려는 순간 인영이 흐릿해지더니 나메가 있던 자리에는 뿌연 연기가 대신했다·
“그렇게 느리게 휘둘러서야 맞출 수 있겠어?”
남성의 뒤에서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꼬마아이는 어디가고 이번에는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여성이 안방 침대 위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있었다·
“누··· 누구···?”
“이 모습이 더 낯이 익을 텐데 이상하다·”
길쭉하게 늘어진 팔다리 허리까지 내려오는 고운 금발 머리에 이글거리는 호박색 눈동자까지· 남성도 익히 본 인물이었다·
나메의 월드 오브 아르세리아 캐릭터·
“하! 아까가 환각이었고 이게 본모습이란 말이지? 그래 차라리 이쪽이 더 현실감있네·”
남성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어린 아이가 이런 마법이라니 말이 안 되지·
그 모습은 처음부터 자신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남성이 이번에는 양 주먹에 불을 붙여 더욱 출력온도를 높였다·
푸른색으로 이글거리는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안방의 벽지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글쎄 어느쪽이 진짜일까? 원래는 이쪽이 더 편하긴 한데 요 근래에 어린 아이쪽도 많이 적응했거든·”
“말장난은···!”
남성이 다시금 나메쪽으로 뛰어들었다·
눈높이가 맞아서 더욱 얼굴을 조준하고 주먹을 내지르기 간편했다·
확신을 가지고 턱뼈를 으깨버리려는 움직임에도 여성은 여전히 태평해보였다·
‘왜 안 움직이는 거지?’
머릿 속에서 그러한 의문이 함께 피어올랐다· 어쩌면 숨겨둔 속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생각이 복잡해진다·
탁-!
다만 혼신을 다한 일격이 겨우 여성의 고운 손에 이리 간단히 막혀버릴 줄은 몰랐는지 남성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약하네· 괜히 걱정했어·”
“뭐라고? 약해?”
나메가 남성의 역린을 건드렸다·
어디가서 약하다는 소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남성이다·
“응 너무 약해· 옛날 우리 집에 살던 열댓살 시녀가 너보다 더 강할 정도로·”
“그 입 안 닥쳐!”
“힘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야· 자 꿇어·”
나메가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명령했다·
“뭐라고···?”
남성의 표정이 극심하게 일그러졌다·
다만 곧바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공포감에 눈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숨이 가빠지고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거대한 어둠에게 잡아먹힐 듯한 공포감이 몸을 지배한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에 남성의 무릎이 천천히 굽혀졌다·
“그래 얼마나 좋아· 올려다보려니까 힘들었잖아· 이제 엎드려·”
“크으으윽!”
거구의 몸집이 바닥에 내팽개치듯 쓰러졌다·
그 위에 앉은 나메는 안방에 나뒹굴고 있던 윤슬의 머리끈을 주워긴 황금빛의 머리를 한 갈래로 묶었다·
“내가 말했지? 경찰이 빨리 오기를 빌어야 할 거라고· 시간이 오래 걸리나보네·”
나메는 바닥에 엎드려 꼼짝 못하는 남성의 뒷목을 손으로 잡아챘다·
“아니면 네 스스로의 힘으로 환각에서 벗어나보던가·”
남성이 눈을 한번 깜빡거린 그 사이에 방의 풍경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 이건 마법도 뭐도 아니잖아···!”
남성의 의혹은 타당했다·
나메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리라는 명령을 하였을 때 그 어떤 마법진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씨이··· 설마 나··· 아직도 환각이···”
뒤늦게서야 환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깨달은 남성은 발버둥을 쳐본다·
“내가 무슨 마법을 시전하는지만 알면 빠져나올 수 있다니까?”
[고유마도 – 에스타샤 류 제4식(式) – Medusa]
환각마법 자체는 대체적으로 실용성이 없다·
상대가 환상 안에서 시전하는 마법이 어떤 것인지 개략적으로 알기만 해도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이는 실제로 마법을 시전하는 게 아닌 허수공간에서의 ‘가시전’의 원리를 차용하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오러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기만 해도 몸 전체에 방벽을 둘러 환각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자세부터 보고 알았어· 어디서 전문적으로 싸워본 경험이 없어보였거든·”
반대로 두가지 모두 충족하지 않은 사람에게 환각마법은 무척이나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나메의 탁월한 마법선정에 괴한은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그의 목이 돌처럼 변하더니 그 범위가 서서히 넓혀져갔다·
몸통 팔 다리 그리고 발끝까지·
머리만 남기고 모두 석화가 되어버린 자신의 몸을 남성은 두 눈을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 일어서·”
“으으읍! 으읍! 으으으읍!”
머리로는 일어나라는 명령이 주입된다·
그러나 완벽하게 굳어버린 몸은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페널티로 극심한 공포감이 남성을 지배했다·
눈이 충혈되다 못해 실핏줄이 터진 남성을 보고 나메가 조소를 지었다·
“딱 좋네· 그대로 듣고 있으면 되겠다· 간간이 내 질문에 답도 해주고·”
“끄으으윽···! 제발··· 살려만···”
“당연히 살려줄 거야· 죗값은 받아야 하니까·”
“아··· 아니···”
“설윤슬의 집에는 무슨 목적으로 찾아온 거야?”
“···”
남성이 계속 몸을 벌벌 떨기만 했다·
그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메는 벌떡 일어서서 남성의 오른쪽 팔을 걷어찼다·
후두둑-
“···! 끄아아아아아아악!”
돌로 변해버린 팔이 산산조각 나버리고 그 잔해 위로 남성의 몸이 기울어졌다·
“아파?”
“끄으으··· 흐으윽··· 끄으으으으으윽!”
여전히 온몸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음에도 절단의 고통만큼은 온전히 전해졌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입이 열리지 않는다·
허용치를 넘은 고통에 안면근육이 격하게 일그러지며 남성은 이를 꽉 깨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맞아 아프지··· 아프겠지· 나도 알아 이게 어떤 고통인지· 그러니까 제때 대답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그렇지 않아?”
“죄··· 죄송··· 제발 살려만··· 끄으으윽···!”
“죄송은 나한테 할 게 아니고 윤슬이한테 가서 해야지· 너 살인미수범이야· 마법도 못 쓰는 여자애를 13층에서 떨어뜨린 거라고· 그래서 왜 찾아왔다고?”
“끄으으읍! 흐으 체나가··· 체나가 와서 리카를 죽이라고··· 계속···”
“흐음· 잘 안 들리는데 반대쪽도 균형을 맞춰줘야 하나· 그럼 말하기 편하겠지?”
나메가 발끝으로 뻣뻣하게 굳은 다른 쪽 팔을 건드렸다·
남성은 고통을 애써 인내하여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사실을 토로했다·
지옥같은 경험을 두 번 다시 할 수는 없다는 심정이었다·
“다··· 다 말할게요··· 다 말할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경찰선생님··· 아으으윽···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체나가 디··· 디엠으로··· 밤마다 디엠으로 연락해서 리카를 죽여달라고· 마··· 맞아 여기도 체나가 제 몸을 조종해서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전 진짜 그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하도 부탁하니까··· 부산역에서 출발해서 왔는데 부산역은 1953년 대화재로 불타버렸다가 2003년에 증개축돼서 무사히 찾아올 수 있었 끄아아아악···!”
“뭐?”
“그·· 그래 CCTV! 집에 CCTV가 있어···! 189개 CCTV가 저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감시해가지고 정말 어쩔 수 없었다니까요··· 안 그러면 체나가 저와 제 가족을 죽여버리겠다고··· 끄아아아악아으으읍-!”
“그만 말해도 될 것 같아·”
“읍··· 읍···!”
나메는 남성을 목 위까지 완벽하게 석화시켜버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렸다· 창문 밖으로 경찰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고는 바닥을 뒹구는 남성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쳤다·
“네까짓 머리가 만들어내는 그 어떤 망상보다 내가 더 무서우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참으로 간단한 일이야·”
스스슥-
“죽음이라는 게 몇 번이나 경험해도 익숙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발전하는 건 하나 있어· 그게 뭔지 알아?”
처음에는 입이 그 다음에는 눈이 최후에는 정수리에 있는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전부 굳어버린 남성에게 나메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바로 주마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거· 어떻게 하는지 못 알려줘서 참으로 아쉽네· 한번 요령껏 해봐·”
남성은 그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메가 남성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활짝 펴서 갖다 대었다·
마치 시간이 영원히 흐르는 것만 같은 환상 속에서 그녀의 손 주위로 마나가 회오리치듯 모였다·
마나가 응축되어 마치 빗물처럼 돌덩어리 속으로 스미어든다·
차가운 응축액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개미굴처럼 뻗어나갔을 때 그녀가 주먹을 빠르게 쥐었다·
[4서클 시전: 급속냉각]
‘주··· 죽는다···!’
급속도로 냉각된 액체가 바위에 균열을 일으킨다·
온몸 구석구석이 바스러지는 고통에 남성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야만 했다·
* * *
“여기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방호복으로 똘똘 무장한 경찰들이 윤슬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안방까지 확인해봤어? 여기 없으면 아파트 계단 타고 옥상으로 도망쳤다는 건데?”
“여기 찾았어요 반장님! 어라? 쓰러져있는데 이 사람 맞나···?”
안방에서 발견한 괴한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이를 미심쩍게 생각한 순경은 서둘러 팔에 수갑을 채웠다·
여성이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보내 들 것을 보내달라는 요구를 하던 중에 그녀의 뒤에서 옷장이 끼익하고 열렸다·
“현행범 현장 체포했습니다· 여기 들 것 하나 지원 부탁- 꺄아앗!”
화들짝 놀라 손이 반사적으로 테이저건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에게 다가온 건 예닐곱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조르르 달려와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겨서 얼굴을 파묻었다·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서 계속 숨어있었어요! 경찰 언니 구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콜록·”
아이의 입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애야 너 피가···!”
가슴을 꾹 눌러 입 안 가득 밀려 올라온 핏물을 삼킨 소녀는 말끝을 흘리며 해명했다·
“아··· 저 사람이 때렸어요!”
소녀가 가리킨 곳은 당연하게도 쓰러져 있는 괴한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나메는 아가야··!! 나메는 아무것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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