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9
작은 파도들이 꼬리를 흔들며 돌담에 몸을 부딪친다·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햇살을 받은 작은 물방울들이 튀어올라 해안가에 소금기를 더했다·
정자에 앉아서 1년 365일 변하지 않는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풍경을 감상하는 백봉곤 훈장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실례하겠습니다·”
중후한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식혜 한잔 하시겠습니까?”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식혜병을 건네는 천규진·
“그럼 자네는 나와 바둑 한판 두겠나?”
“좋죠·”
백봉곤 훈장은 한쪽 구석에 있던 바둑판을 끌고 왔다·
기둥에 듬성듬성 달라붙은 거미줄을 손으로 치워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시험이 추가된 겁니까?”
그렇게 천규진이 흑돌을 우상귀 화점에 두면서 대국이 시작되었다·
한 차례 기침을 한 백 훈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백돌을 쥐었다·
“사실 이 다음 시험같은 건 없어· 그냥 이 늙은이가 오기를 한번 부려본 거지·”
두 남성의 시선이 바둑판에서 시골집으로 옮겨갔다·
아이들이 툇마루 위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오러를 외부로 발현시키는 것·
모든 단계를 무시하고 백 훈장은 바로 마지막 시험으로 건너뛰었고 나메는 또 이를 보란 듯이 성공해보였다·
“그럼 시험은···?”
“이 대국이 끝나기 전까지 차차 생각해봐야지·”
그래서 백훈장은 당돌한 꼬마 때문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천규진은 미소를 머금고 다음 수를 생각해냈다·
“오래 전에 은퇴하셨다더니 이런 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 많이 달라지셔서 처음에 알아보지도 못 했었죠·”
“피차 마찬가지지· 30년만인가? 자네도 많이 늙었구만 그래· 어떻게 세월이라는 파도 앞에서 마음이 조금 무뎌지던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게 바로 늙었다는 거야! 이 늙은이 대열에 합류해도 손색이 없겠어·”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고 사활이 걸린 문제에 다다르자 천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도 지금도 대관절 이런 시험은 왜 내는 겁니까?”
논어를 통째로 암기하게 시킨다던가 피스톨 스쿼트 자세를 1시간 동안 유지한다던가·
그의 질문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백봉곤 훈장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유형의 인간이었다·
탁-
백 훈장은 자신있게 돌을 내려놓았다·
“공피고아(攻彼顧我) 상대를 공격하려 할 때는 천천히 들어가라· 피강자보(彼强自保) 상대가 강한 곳에는 내 돌을 잘 보살펴라· 입계의완(入界宜緩) 경계를 넘어갈 때는 천천히 들어가라· 보았나? 이렇게 단순한 바둑에도 심오한 인생철학을 담을 수 있지·”
천교수가 깊이 생각에 빠지는 걸 보고 그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바둑이 하나의 작은 세상인 것처럼 ‘나’라는 존재도 또 하나의 세상이지· 결국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이 ‘논어’와 ‘마보’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고 생각하네·”
“결국 모든 과정이 오러를 제대로 다루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양의학에서는 이를 뉴로트랜스미터 슈도 인터로킹이라고 부른다지? 따지고 보면 그리 새로운 이론도 아니야·”
오러는 의지의 발현이다·
언제나 백 훈장이 강조했던 말이었다·
뇌파가 오러하트를 거치면 오러하트는 마나를 오러로 변환해준다·
그리고 생성된 오러는 사용자의 요구대로 영향을 발휘한다·
“아주 똑같은 뇌파라도 오러하트가 다르면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그럼 도대체 이걸 누가 알려줄까? 가르쳐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어· 80억의 인구가 있으면 80억 개의 오러하트가 존재하기에 80억 개의 방법이 존재한다· 아(我)를 깨닫는 건 그토록 까다로운 일이야·”
“어렵군요·”
“어렵지· 그래서 저 아이가 더욱 특별한 거고·”
빛나는 재능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노나메는 이미 처음부터 완벽하게 태어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 탁구 쳐본적은 있나?”
“아 예전에 가끔·”
“네트쪽으로 급하게 달려가면서 공을 받을 때 대부분은 공이 높이 뜨거나 네트에 걸린다네· 그 이유를 아나?”
“왜 그런 겁니까?”
“자신이 앞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찰나에 망각하기 때문이야· 선수들이야 어련히 알아서 잘 치겠지만 일반인들은 신체의 속도가 탁구채에 더해진다는 걸 모르지·”
그가 하는 말들인 주체의 객관화 선험적 자아· 임마누엘 칸트의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비로소 천교수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으니 백훈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조금 감이 잡히나?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자왈 기소불욕에 물시어인이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나에 대한 이해는 이타성의 뿌리가 되어주지·”
“그건 좋은 일 아닙니까?”
“그렇지··· 좋지· 좋고 말고· 하지만 나를 아끼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이기심도 필요하다네·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이고도 검증되지 않은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만약 객관성의 개념에 궁극적으로 다가간 인간은 어떤 존재일지 생각해보았나?”
“상상이 잘 안 되는군요·”
“역설적이게도 이 또한 아(我)를 잃어버리게 된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잘 이해한 나머지 육체가 독립된 개체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거지·”
“그 즉슨?”
“사실 나도 이 섬에서 할 짓이 없어서 생각해본 공상일 뿐이니까 그냥 흘려 듣게· 뭐 요즘 아그들이 좋아하는 게임이 있지 않나?”
천교수의 눈에 순간 불길한 빛이 감돌았다·
“대충 현실의 육체가 마치 자기가 조종하는 게임 캐릭터처럼 느껴지지 않겠나? 죽음에 초연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타인을 위한 희생에도 망설임이 없는 인간이지만 인간답지 않은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노인은 백돌을 빈 공간 아무데나 찾아 던져댔다·
“생각한다네·”
대국은 천교수의 불계승·
백훈장의 불계패였다·
“아따 거시기 참말로 더럽게 두는구마잉· 쯧!”
“감사합니다···”
* * *
백봉곤 훈장이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며 아린이와 민우는 뜻밖의 자유시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완벽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나는 이를 빌미로 그의 방에 있는 캡슐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눈치챘다고 생각한건지 아니면 정말 시험에 통과해서 기특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는 손쉽게 내 제안을 승인해주었다·
“우와와아 캡슐이다 캡슐!”
“저번에 이걸로 나한테 연락한 거 아니었어?”
“그때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단 말이야!”
백봉곤 훈장은 유나의 어머니가 사용하시는 치료 목적의 메디컬 캡슐과 같은 제품 라인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좋은 걸 쓰고 계셨다·
앞에서는 하늘 천 땅 지를 외치면서 뒤에서는 아이들 몰래 현대의 첨단문물을 누리고 있으니 이렇게 사람이 이중적일 수가 없었다·
그래 사람이 살아야지·
“이건 뭐지?”
백호찬이 전등 불을 켜다가 발견한 액자를 가리켰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증서]
[성명: 백봉곤]
[생년월일: 1966· 08· 25]
[귀하는 우리 선조들이 간직해 온 국가무형문화재 마공품 보전 및 진흥에 공헌하여 대한민국 전통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므로 이에 이 증서를 드립니다·]
[마공장 백봉곤]
“에엥? 마공장? 우리 할아버지가 인간문화재라고?”
“삼촌 마공장이 뭐야?”
“으음···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국 전통의 완드? 그니까 간이 연성진 작성기 만드는 사람?”
“완드는 또 뭐지?”
“이게 완드야 아린아·”
내가 주머니에서 ‘IWC 회상’을 꺼내 보여주었다·
“오오! 하··· 한번만 만져봐도 돼?”
아린이 눈으로 빛을 내며 보이지도 않는 꼬리를 연신 흔드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마공장이라니·
이 시대에서 전통 마공품을 실제로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들도 대부분 사치재 장식품에 해당했고 실제로 그 쓰임은 매우 한정적이거나 없는 경우도 있었고·
생각해보니까 그의 오른팔에는 근육이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많이 붙어있었다·
어쩐지 오러를 두르는 숙련도도 심상치 않다 했더니 이런 재주를 숨기고 있을 줄이야·
“근데 캡슐이 하나밖에 없어서 누구 먼저 쓰지?”
“난 안 써도 돼· 너희들끼리 알아서 정해·”
“민우 오빠 먼저 쓸래? 아 근데 나도 쓰고 싶은데 어쩌지 으으!”
백민우는 별로 생각이 없어보이던데·
반면 먼저 쓰기에는 눈치 보이고 나중에 쓰자니 인내심이 견디지 못하는 아린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나메··· 라고 했나?”
백민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응·”
“아린이한테 많이 들었어· 아니 맨날 들었어· 나메라면 한번에 다 했다 나메라면 한번에 다 외웠다 나메라면··· 근데 진짜 그 말이 사실이었네?”
“아 뭐· 응·”
“···”
“···”
그리고 불편한 침묵이 도래했다·
아니 가뜩이나 나처럼 사교성 없는 사람에게 사교성 없는 사람이 말을 걸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도 남자답게 책임을 지려는지 민우가 내 머리띠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메는 머리끈 어디서 샀어?”
“집 앞에 다이소에서 샀어·”
“근데 왜 아직도 트윈테일을 하는 거야? 그것도 이렇게 아래쪽에 묶어서·”
“그래서 별로야? 아니면 시비 걸고 싶은 거야?”
“아냐! 예뻐서!”
“아아 예뻐? 그래 고맙다?”
거의 뭐 엎드려 절받기네·
한국에는 이상하게 트윈테일을 경시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때문에 중학생 이후 나잇대에는 체육대회나 할로윈 말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보다 조금 풀어진 머리를 다시 제대로 꽉 묶고 헤어스타일에 담긴 심오한 이유를 낱낱이 설명해주었다·
“잘 봐봐·”
내가 무릎을 구부려 상체를 확 낮추었다·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요동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다음에는 좌우로도 움직여보았다가 몸을 한바퀴 빙글 돌려보기도 했다·
“어때 알겠어?”
“아니?”
“모든 움직임마다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양이 다르잖아· 이건 내 움직임을 객관화하기 위한 일종의 단서야·”
급박한 전투시에는 내가 어디로 얼마나 이동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엄청난 반탄력에 의해 내 몸이 저 멀리 뒤로 날아간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는지 알아야 이에 적절한 대비를 할 수 있었다·
중력은 언제나 일정하므로 머리카락이 이루는 각도는 수평속력에 비례한다·
이처럼 사소한 단서는 언제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를 간편하게 만들어준다·
“개또라이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 하는 게 당연한 거야· 민우 오빠도 트윈테일을 하면 다 알 수 있어·”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안 되겠다! 나 먼저 캡슐 쓸게! 미안해 민우 오빠!”
수건으로 대충 흐르는 땀을 닦고 푹신푹신한 캡슐 시트에 누운 아린·
“꺄! 시원해!”
문이 서서히 닫히고 아린이가 조작하는 인터페이스 화면이 그 위에 홀로그램으로 송출되었다·
[보이드 스페이스에 접속합니다·]
[User Name: 나메는너무귀여워님 환영합니다·]
순간 아린의 닉네임이 ‘노네임은아가야지켜줘야해’라는 닉네임을 단 우리 방 악질 시청자와 겹쳐보여서 식겁했다·
맞아 아린이도 저런 닉네임을 쓰고 있었지·
나중에 바꾸라고 해야겠다·
“롤 할 거야?”
“아린이가 롤을 한다고?”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을 걸?”
“응! 나 유미 잘해!”
호기롭게 시작한 롤·
계정에 로그인하고 게임시작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녀는 전장이 아닌 하얀 사이트 화면으로 이동하였다·
[안녕하세요 레거시 오브 레전드입니다·]
“게임시작이 클릭이 안 돼!”
[게임산업진흥법에 따른 영업정지 일수: 10일]
피와 땀이 흐르는 전장은 어디가고 대충 죄송하다는 구슬픈 사과문이 우리를 반겨줄 뿐이었다·
“그러면 혹시 괜찮다면 월오아라도 해볼래 아린아?”
그래 로라도 분명 좋아했던 게임이니까·
월오아는 나이트메어만 아니면 전연령 게임이라 부담도 없다·
[안녕하세요 월드 오브 아르세리아입니다·]
[게임산업진흥법에 따른 영업정지 일수: 1개월]
한국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삼국지 무쌍을 펼치던 두 국가가 한낱 한시에 멸망했다·
눈물겨운 도원결의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본가에 내려왔습니다!! 이제 진짜 만두만 먹으면서 소설을 쓸 생각에 행복하네요!!
도대체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게임사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라기에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른 것 같네요!!
인방 컨텐츠가 꼭 롤하고 월오아만 있으라는 법은 없죠· 뭐 다른 게임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게임이 아니어도 되고··· ‘방종 지뢰찾기’는 아무래도 조금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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