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5
캡슐에 갇혀있을 때도 음악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수면제였다·
특히나 브람스의 작품은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음악은 뇌를 자극하여 우리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 준다·
조화로운 선율은 여러 이미지를 자아내는데
뱀이 움직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소리
연상된 모든 감각적 이미지에서 연주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연주자의 ‘의도’만이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이런 간단한 진리를 깨닫게 된 건 내가 전생에 열세 살이었을 때였다·
어머니 ‘테네브레이아’의 화형식이 진행되었던 아크로폴리스 광장·
거기에는 추악한 몰골을 한 음유시인이 분수 앞에서 ‘만돌린’이라는 기타처럼 생긴 악기를 연주하며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연주를 다 들은 나는 그 장님에게 금화 하나를 쥐여주며 상당히 실례되는 질문을 했었다·
어째서 당신 같은 이를 보고 사람들이 이토록 좋아하고 열광할 수 있는 거냐고·
그는 누런 뻐드렁니를 훤히 보이며 답해주었다·
[즐거운 음악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해주지요·]
실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말이었다·
아니 실제로 대중들 사이에서 날아온 돌에 머리를 얻어맞기도 했었지··· 왜 연주를 방해하냐면서·
남성의 말은 훗날 질투의 침식을 잠재울 실마리를 제공했다·
사례를 하기 위해 음유시인을 다시 만나보려고 애썼지만 그는 카이젠의 수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잡념이 길었다·
연주는 나도 모르게 끝나 있었다·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그때 그 데뷔탕트처럼·
심장이 너무나도 세게 뛰어서 진정되지 않는다·
이젠 겨우 이런 거에도 긴장하는구나 나도·
* * *
클래식 음악 예능을 주력 컨텐츠로 내세우는 ‘바크(바보들의 크레센도)’·
“진짜 대박이다· 이건 편집 하나도 필요 없겠는데?”
“그냥 아예 교수님들 반응 보여주는 컨텐츠로 방향을 틀어도 될 듯?”
“또 몰카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대학생 PD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메의 바이올린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아도 1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세 살 때부터 바이올린 활을 잡아 온 어린 천재들도 저 나이 때 완주하기조차 버거운 곡이다·
그걸 몸에 맞지도 않는 바이올린으로 이 정도의 기교를 펼쳐낸다?
“근데 몰카라고 오해하시면 더 좋은 거 아냐?”
음대 교수들에게 그만큼의 반응을 끌어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오히려 그들이 교수들로부터 원하는 반응이 딱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교수님! 저희 또 왔어요!”
“엥? 너희들 바이올린 돌려주고 온다면서?”
“하루만 더 빌리기로 했거든요·”
교수의 동그란 안경에서 의문스러운 시선이 쏘아지기도 전에 그들은 방금 연못 앞에서 갓 찍어온 영상을 틀어서 보여주었다·
30년 넘는 경력답게 교수는 첫 음을 듣자마자 나메가 무슨 곡을 연주하려는지 알아차렸다·
‘6분 30초?’
그런데 영상이 조금 길었다·
나메의 ‘카프리스 24번’은 조금 느리게 연주된 편이었다·
일단 교수는 턱을 매만지며 말 하나 없이 카메라가 담은 율조에 귀를 기울였다·
한 마디에 18개의 음표가 연달아서 나오는 아르페지오 그리고 피카르디 3도의 코다(Coda)로 막을 내린 곡을 전부 듣고서는 침음성을 삼켰다·
바로 직후에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작은 웃음이었다·
“···?”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교수의 평가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음대생들이 전부 물음표를 띄웠다·
“언제 또 이런 걸 준비해 왔어?”
“네?”
“이거도 자동 바이올린 아니야? 근데 진짜 감쪽같다· 여기 듣는 사람들 중에 한 명도 눈치 못 챘다는 거네?”
“···!”
“에이 그래도 내가 두 번은 안 속지·”
교수는 두 달 전 자동으로 연주되는 바이올린 몰카 컨텐츠로 바크 친구들에게 된통 당한 기억을 되새겼다·
마치 대학생이 연주하는 것처럼 연기해 놓고선 사실 옆 방에서 진짜 바이올리니스트가 원격으로 대신 연주를 해서 교수들이 평가해주는 컨텐츠를 기획한 것이다·
이런 브이튜브 각에 미쳐있는 아이들 상대로는 언제나 말조심이 필수라는 걸 잊지 않았다·
반면 바크 PD들은 쾌재를 불렀다·
남자 한 명이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교수님! 그러면 저희 영상 소스가 안 나오잖아요· 그냥 평소대로 평가를 해주셔야죠!”
“아아 미안! 지금 이거 편집해 줄 거지? 음 어디보자···”
교수는 책상에 놓인 마이크를 잡았다·
평가자의 위치로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음악 너무 잘 들었어요· 잘 들었고요· 듣는 내내 귀가 즐거웠다고 해야 할까요· 그만큼 이 아이가 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다루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특히 아티큘레이션이 들어가야 할 부분에 제대로 들어가서 곡 전체에 에너제틱한 그런 활기가 넘치는 느낌이었어요· 활도 크게크게 잘 쓰고·”
“혹시 더 개선해야 할 부분은 없을까요 교수님?”
“야 너희들 나한테 왜 그러니!”
일부러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
교수도 웃음으로 맞받아치며 나름대로 생각한 바를 읊었다·
“으음··· 제가 가장 큰 위화감을 느꼈던 부분이 어디냐면···”
“오오··· 네네!”
“더블스탑 나오는 파트 바로 직전 있죠?”
“당나귀 소리 나오는 부분 이전이요?”
“맞아요· 다른 부분은 괜찮았는데 유독 거기만 속도를 많이 늦춘 감이 없지 않아 있고··· 그다음에 빠르게 올라가는 아르페지오 부분 있잖아요? 거기도 뭔가 자연스럽게 올라가야 하는데 약간 음이 불안정하게 떨린다고 해야 하나· 혹시 영상 다시 한번 돌려볼 수 있을까요?”
“네네!”
5분 45초로 이동하였다·
“맞네요· 바이올린 턱받침이 흔들리고 있죠? 지금 어깨에도 힘이 조금 들어갔고 고정이 제대로 안 돼서 나오는 소리예요 이게·”
“우와···!”
소리만 듣고서 사소한 디테일까지 바로 알아차려 버리는 교수의 위대함을 다시금 되새기는 학생들·
“그런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게 곡을 끝냈어요 이 아이는· 옥타브 처리 트리플 스타핑 모두 두말할 것도 없이 퍼펙트했고요·”
“퍼펙트···”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약간··· 어른이 와서 아기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느낌? 그거 있잖아요 학생들도 장난감 바이올린 처음에 켜보면 생각처럼 잘 안되는 거· 무슨 말인지 알죠?”
“이거 마테오 고프릴러 바이올린인데요 교수님?”
“그니까 바이올린이 체형에 안 맞았을 때 나올 수 있는 실수들까지 뒤에 누군지는 몰라도 명확하게 캐치를 하신 것 같다· 아 미안···! 내가 말실수 했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나?”
“아녜요! 편하게 계속하셔도 돼요!”
“아하하 뭔가 나 때문에 컨텐츠가 망해버린 것 같은데 어떡하지···! 어쨌든 정말로 아이···?가 바이올린에 조예가 깊다는 걸 느꼈고 또 신기했던 게 정말 애답지 않기도 하고·”
“어떤 점이 애답지 않아요?”
“원래 아이들은 음을 다 맞게 연주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보여줘야 할 디테일들을 놓치기 쉬운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노련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이건 교수의 진심이었다·
곡 전체에서 아이와 어른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어른이 아이 흉내를 내면 저런 식으로 곡 해석이 나오는 걸까? 그녀도 해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정말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영상을 같이 안 봤다면 저랑 나이가 비슷한 분이 연주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감정을 풍부하게 담은 게 신기했어요· 흰 머리 나신 거장들이 일부러 못 하는 척해도 실력이 훤히 드러난다는 게 딱 이런 느낌일까요? 근데 여러분 왜 웃어요?”
‘설마 실제 연주자분이 흰머리가 아니라 대머리이신가?’
교수가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복기했다·
말실수는 분명히 없었다·
물론 거짓 하나 보탠 것 없이 모두 진실만을 말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었다·
뒤이어 학생들의 입에서 충격적인 진실이 튀어나왔다·
“짜잔! 사실 몰카가 아니라는 게 몰카였습니다!”
“뭐···?”
사실 자동 바이올린 같은 건 없었다·
노나메는 8세의 나이에 조금 느릴 템포일지언정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을 완벽하게 연주했다·
즉 어른이 아이 흉내를 내는 게 아닌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고 있었다·
“잠깐만 영상 다시 한번 처음부터 보여줘 볼래요?”
교수는 일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 * *
자하연에서 즉흥 연주회를 끝마치고 서둘러 세피론 재단 사람들과 미리 만나기로 했던 강의동으로 이동했다·
바이올린 자체만 봐서는 카이젠의 것이 조금 더 우수했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온다면 또 뒤집힐 수도 있겠다·
하긴 뭐 17세기의 명품들보다는 미국이 최신 기술을 총망라해 제작한 고가의 바이올린이 더 좋은 음질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니까·
가격이 언제나 품질을 대변하지는 않는 법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늘한 공기가 화악 몰려와서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2 3백명이 앉아도 충분할 정도로 넓은 대형 강의실은 전체적으로 깜깜했다·
맨 앞에만 조명이 환하게 나 있어 그쪽으로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노나메 양 맞나요?”
실시간 번역 마법으로 어색한 한국어가 뇌리에 박혔다·
“MIT에서 정수론을 가르치는 교수를 가르치는 로버트 퓰러입니다· 이쪽은 제 수제자 에밀리 마야코브스키예요·”
“수제자가 아니라 그냥 부하 직원입니다· 퓰러 박사님은 교수들을 가르치지도 않고요· 아무튼 저도 매우 반가워요 노나메 양·”
“아 네에··· 반갑습니다···”
캐릭터가 정말 독특하시네···
미국 대기업 회장처럼 생긴 대머리 아저씨는 자신을 로버트 퓰러라고 소개했다·
금발머리를 한 에밀리 마야코브스키는 전형적인 슬라브계 사람 느낌이 풀풀 났다·
간단하게 악수를 나누고는 강당 맨 앞 의자에 나란히 다소곳이 앉아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어후 한국대에서 28동을 빌려준다길래 우릴 뭐로 생각하고 그런 쓰레기 같은 건물을 내어주나 싶었는데 작년에 리모델링했다지 뭐예요· 하하하! 30년이나 됐으면 허물고 새로 만들지 뭘 또 리모델링을 하고 그러나· 안 그래요?”
“아 네··· 근데 왜 이렇게 넓은 강의실을 빌리셨나요?”
여긴 넓어도 너무 넓지 않은가?
그냥 조그마한 초등학교 교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건 확실히 과했다·
“사람이 많아질 걸 대비했습니다· 라고 퓰러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아 조금 4차원이구나· 이해가 간다· 부하 직원의 다크서클이 훤하게 나타나 있네·
“듣던 대로 나메 양은 정말 총명한 것 같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렇게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여기서 만나서 증명에 대한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대체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으신 건데요?”
“많아요· 아주아주아주 많아요! 사실 오늘은 질문 리스트를 정리해놓지 않아서 다음에 한번 봐야겠지만 딱 하나만 먼저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어요·”
“네 말씀하세요·”
“이 한국 알파벳은 무슨 의미인가요?”
그가 폰을 내 앞으로 내밀어서 내 논문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ㅁㅊㄱㅈㄹ]
“논문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정체 모를 문자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이것 말고도 몇십 개가 더 있죠·”
“이건 저도 궁금하네요 나메 양· MCGJR이 무슨 뜻이에요?”
“마찬가지로·”
“네?”
“영어로는 WLOG· Without Loss of Generality· 일반성을 잃지 않고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마찬가지로’라고 썼고요·”
“오 신이시여·”
대머리 아저씨가 이마를 짚었다·
뭐··· 이때는 내가 논문을 쓰게 될 줄 알았나·
막 휘갈겨서 쓰다시피 한 게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어휘까지 모조리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럼 이것도 설마···?”
아무래도 한국대학교에 방문해야 하는 횟수가 두세 번으로는 끝나지 않을 듯싶었다·
그나저나 한글도 대단한데 왜 영어 약자만 쓰는 거야·
대한민국 만세·
* * *
한국대학교 자연대대형강의동 약칭 28동·
엘리베이터 안에서 3층을 누르려는 두 여성의 손가락이 우연히 겹쳤다·
“혹시 힉스 스튜디오 PD 아니세요? 어쩐 일로···?”
등에 바이올린 가방을 멘 여성이 물었다· 아까 나메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시킨 학생 중 한명이었다·
“바크 부원이 여긴 웬일로?”
눈을 찌릿 흘기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여성은 힉스 스튜디오 물리학 부문 컨텐츠 PD 우다연이었다·
“제가 먼저 물었어요·”
“저도 물리천문학부인데 같은 자연대 건물에 있는 게 뭐가 어때서요?”
우다연이 팔짱을 끼며 받아치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여기 1학년들 교양만 열리는 건물이거든요? 그쪽은 생김새만 봐도 4학년처럼 보이는데·”
“뭐라고? 너 말 다했어? 그럼 넌 음대생이 왜 여기 있는데?”
“저야 교양 들으러 왔죠·”
“아하? 현악 전공이신 분이 뜬금없이 생물학을 들으러 왔어요 후배님?”
“···”
150만 구독자의 과학·마법학 채널 ‘힉스 스튜디오’·
150만 구독자의 클래식 음악 채널 ‘바크’·
나메를 영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불이 붙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자동 연주 바이올린 저도 꼭 갖고 싶네요···
음대 교수들의 눈썰미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나메의 정신연령까지 바로 간파해버리네요!!
그리고 나메의 증명을 알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공부해야만 하는 로버트 퓰러 박사에게 미리 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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