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 본 에피소드는 외전입니다·
“일이 복잡해졌어· 자네도 알고 있겠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히아센과 조세핀은?”
“두분 모두 병동에 누워 계십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끈질기게 추격하여 국경을 넘기 전에 마족 테네브레이아를 사살시킨 것까지는 좋았다·
이보다 어려운 임무는 제국 역사상에도 손에 꼽을 수준이었으니까 자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딸 ‘에스타샤’의 존재가 외부로 유출되었다는 소식은 아이로겐 황제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하필 이를 목격한 것도 히아센과 조세핀·
히아센은 아직 어리니까 어떻게든 타일러본다 쳐도
입이 방정인 조세핀까지는 함구명령이 쓸모 없으리라는걸 그의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원칙대로하지·”
“예···? 워··· 원칙대로 말입니까?”
“테네브레이아의 사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화형식을 진행한다·”
“그럼 그녀의 딸도 똑같이···”
“자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이로겐의 눈이 싸늘하게 희번덕거렸다·
겁에 질린 바르고 집사장의 어깨에 손을 툭 올렸다·
“테네브레이아의 화형식은 사흘이 아닌 일주일간 하거라· 감히 마족 따위가 고귀한 카이젠의 황녀를 건드렸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겠지?”
“예···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에스타샤 황녀의 건강이 심히 걱정되는구나· 빠른 시일 내에 쾌차할 수 있게 전력을 기울이도록·”
“그럼 제4황녀님의 성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름· 그래 이름이라·”
아이로겐 황제가 말을 한차례 끊었다가 대답을 해주었다·
“에스타샤 라티아스(Lax’tias) 카이젠·”
테네브레이아(Tenebreja)가 그림자였다면 그녀에게는 빛이 있으라·
* * *
카이젠 황실의 정당한 승계자라 함은 모두 아이로겐 황제의 친자들을 일컬었다·
황후의 자녀들인 제이드 황태자와 조세핀 제2황녀가 대표적이었다·
자카리오 공작가라는 강력한 외척을 등에 업은 안젤리나 제1황녀와 페이란 제2황자도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이에 비해 히아센 제3황자나 니오베 제3황녀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어머니가 아리아 백작가라는 다소 위상이 떨어지는 가문이었기에 계승 순위에서는 거의 배제되다시피했다·
그래서 다른 형제 자매들이 히아센과 니오베를 편히 대하는 것도 정치적 사정과 동떨어져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현 아이로겐 황제에게 다른 친자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와 같은 금발이었어·”
조세핀의 목소리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카이젠에서 금발이라 함은 그냥 황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로지 황제와 전대 황제들의 친자식 그리고 현재의 정당한 승계자들 뿐이다·
애초에 황제의 모든 권리는 ‘옥새’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설령 어떤 아이가 황제의 친아들이라 해도 만약 황제가 되기 이전에 태어났다면 승계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세핀과 히아센이 목격했던 십자가의 아이는 분명 자신들과 쏙 빼닮은 아름다운 금발과 금안을 지니고 있었다·
히아센은 여전히 그 충격에서 깨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체를 본 격·
그 무엇을 상상하든 어린 아이의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이었으리라·
“우리도 그렇게 되는걸까?”
“우리도라니?”
안젤리나가 되물었다·
“난 지금까지 제이드 오빠가 황제가 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황제가 되어서도 우리를 지켜줄까?”
혹여나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들도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무슨 걱정을 참· 제이드는 적어도 네 친오빠잖아· 애초에 걱정해야할 사람이라면 오히려 히아센이겠지·”
물론 제이드가 그런 잔악무도한 성격도 아니고 말이야·
오히려 범생이 타입에 가까우면 가까웠지·
“베르스타펜 밖에 있어?”
“예 황녀님·”
“혹시 아바마마께서는 아직까지 아무 말씀 없으셔?”
“저에게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셨습니다·”
황제는 말을 아끼고 있고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애초에 평상시라면 휴화산 원칙을 준수하던 ‘암성’들이 황궁 한복판에 활개를 치고 다니니 귀족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촉을 곤두세웠다·
또 한번의 대규모 숙청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도래한 것인가·
모두가 황제의 발언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황제의 호위기사인 베르스타펜이 전언을 들고 왔다·
“명일 정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화형식이 열린답니다·”
“”화형식?””
“예 암성에서 고위 마족 한명을 잡아온 것 같습니다· 자세한건 모르겠지만 마족의 악랄한 소행을 낱낱이 까발릴 것이니 내일 시민들을 광장으로 모으라는 지시가 저희에게 내려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족이 있어?”
“히아센!”
히아센이 머리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본느 궁의 참사도 마족의 소행이었단 말인가?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광경이었지만 히아센은 그보다 그녀의 안위가 궁금했다·
“그럼 그 애는 괜찮은거야? 안 죽었어?”
“거기까지는 잘···”
자신이 보았을 때는 이미 그녀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어깨는 진작에 탈골되었을테고 숨을 헐떡거리는 것 조차 힘들어했으니·
특히나 대못 위로 살이 아무는 광경은 떠올리기도 끔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아센은 그녀에게 데려다주기를 요구했다·
“그 아이에게 데려다 줘· 어디 있는지 모르면 집사장한테 물어봐서라도·”
* * *
사실 히아센은 소녀가 어디에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조세핀과 자신이 이 병동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은 더 큰 병동의 자리가 이미 찼다는 걸 방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베르스타펜이 집사장으로부터 허가를 받자마자 히아센은 그녀가 있는 병동으로 달려갔다·
이미 로비홀에는 그 수를 셀 수 없을만큼의 의사와 성직자들로 복작거렸다·
지금도 그녀를 치유하기 위해 교대로 근무하는 듯 보였다·
히아센은 사람이 저리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실력있는 이들이 제발 그녀를 살려낼 수 있도록 히아센은 대기실에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몇분이고
몇시간이고·
“히아센 여기 있었나·”
그러는 와중 제이드 황태자의 목소리가 히아센의 귀에 스쳤다·
“형님?”
“얘기는 들었다· 곧 황제폐하께서도 여기로 오실 것이다·”
“마족도 그렇고 황녀도 그렇고·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차차 알게 될 거야· 너무 성급해질 필요 없어·”
“페이란 형님은 같이 안 오신건가요?”
“남부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바로 올라오는 중이겠지· 시간은 좀 걸릴 것 같다·”
황태자의 말대로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먼발치에서부터 들려온다·
히아센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같이 많았다·
소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지·
왜 마족이 황궁에 있던건지·
그러나 중앙병동이 위치한 제니스 궁의 대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황제는 내부로 좀처럼 발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그는 대신들과 밖에서 여러 의사소통을 나누는 듯 보였다·
그렇게 아이로겐 황제는 훌쩍 떠나버렸고 이는 제이드도 예상치 못한 바였다·
“바르고 집사장!”
히아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르고를 불러 세웠다·
목소리가 묻힐뻔 했지만 다행히도 제이드가 불러준 덕분에 그는 집사장과 독대할 수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저 애··· 이름이 뭐야?”
히아센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환자분의 성함을 알고 싶으셨군요· 에스타샤입니다·”
“그게 끝?”
“에스타샤 라티아스 데 카이젠 카이젠 제국의 제4황녀님이십니다· 일이 바쁘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바르고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그는 궁을 떠나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의 사생아는 곧 황제의 치부였다·
무결점의 황제라고도 불리는 아이로겐 황제의 이번 결정은 바르고로서도 다소 의아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결정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는법·
그것이 아이로겐 황제의 고집이기도 했다·
아이로겐은 자신의 치부를 인정하면서까지 사생아와 마족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었다·
그녀를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은 것은 어떤 연유 때문인걸까·
바르고는 그저 앞으로 황제의 사생아로서 살아가야 할 그녀의 운명이 너무나도 가엾다고 여길 뿐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 고통을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 * *
“뭐라···? 어쨌다고?”
“저··· 그···”
“떨지 말고 똑바로 말해보라니까!!!”
“테···테··· 테네브레이아님께 연···연락이 끊겨서! 아마도 국경 직전에 사로잡힌··· 으아악!”
옆에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석고 조각상이 단번에 폭발했다·
마족은 지금 숨 한번을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눈 앞의 사내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가는 자신의 목이 도축장의 돼지보다도 쉽게 날아갈 판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테네브레이아는 사내가 가장 아끼는 막내 딸이었다·
사내는 화가 너무 머리 끝까지 솟구친 나머지 도리어 차분해진 모습을 보였다·
마족은 저 모습이야말로 사내가 가장 위험한 상태가 되었을 직감했다·
“별동대를 파견하여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되었다· 자네도 최선을 다 했겠지·”
“아닙니다! 제발 한번만 기회를! 제발!”
마왕의 손가락이 까딱하고 움직인다·
외뿔의 마족은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자신의 목 주위로 새겨지는 가는 실선·
그 선은 붉은색이었다·
세상이 곧이어 기울어지고 그는 단말마의 비명도 내질러보지 못한채 추한 몸뚱이가 고꾸라진다·
“내가 직접 가도록 하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새끼가 작살에 꽂혀 쓰러지면 어미는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유명한 고래사냥법이죠·
테네브레이아가 과연 수도를 떠나면서 단 한번도 뒤를 안 돌아봤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앞으로도 연재 아닌 날 종종 이렇게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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