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0
한번 흘러간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난 십수년간 방송국의 천재 PD들이 아무리 기발한 프로그램을 만들지라도 인터넷 방송으로 넘어간 시청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시장 자체를 키우기 위해 방송국들은 역으로 트위시와 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인터넷 방송인들의 시청자들을 흡수하겠다는 그들의 전략은 유효했다·
그래서 10월 이맘때쯤이면 트위시에서는 새로운 방송 카테고리가 생긴다·
‘#KBS #중계 #대항전’ 등의 해시태그가 달린 중계방송이 하나둘씩 열리면서 수상할 정도로 가방끈이 긴 스트리머들이 대거 등장했다·
[혜밤님의 방송국]
[애들아 포기하지마! 맞서 싸워!]
[세피론 아카데미(강남) vs 알테어 아카데미(강북)]
[시청자 수: 1895]
여성 롤 챌린저이자 따갚대 우승자로 유명해진 스트리머 ‘혜지면밤이된다’ 유시아·
그녀는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자신의 학력 덕을 볼 수 있었다·
-방장님 미리내 아카데미 출신이셨음?
-고등부에서 쿰라우데 졸업자라니 갑자기 사람이 확 달라보이네요·
-어떻게 혜밤이 미리내 아카데미 졸업생ㅋㅋㅋㅋㅋㅋ
-어떻게 아카데미 이름이 미리내 ㅋㅋㅋ
└ 우리 킹갓 세종 무시하지 마라!
“나메가 올해 초등부 2학년이었던가? 그럼 첫 번째 경기겠네?”
-ㅇㅇ
-8살이니까 2학년 맞지·
-근데 중3으로 출전한다는 소식 들었음?
“중3 그게 무슨 소리예요?”
듀얼 모니터로 빠르게 방금 내용을 검색해본 유시아·
정말로 중등부 출전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이게 무슨···”
-ㅋㅋㅋㅋㅋㅋㅋㅋ
-초등부 다 건너뛰고 중등부 이게 말이 되냐ㅋㅋ
-선생님 얘 혼자 치트 써요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대단한 일임? 대항전 한번도 안 봐서 잘 이해가 안 됨·
“대항전 참가하는 애들은 그냥 한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괴물이야· 특히 중등부 정도만 가면 다들 싸우기 위해 태어난 친구들이라니까? 쓰읍 상대가 아예 안 될 텐데···”
유시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과거의 기억을 회상했다·
나메가 과연 얼마나 활약을 펼칠 수 있을지 시청자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이던 도중 트위시 전체 공지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카데미 대항전 인기 급상승 스트리머: NoName]
“노네임···? 얘는 왜 지금 이 시간에 방송하냐?”
대회 참가자가 중계방송을 겸하는 어이없는 경우는 난생 처음보는 유시아였다·
[NoName]
[KBS 서울지역 아카데미 대항전 – 아버지와 함께 아카데미 대항전 편파중계합니다·]
[방송 시간 – 0:06:39]
[시청자 수 – 28302]
시청자가 자그마치 10배가 넘게 차이났다·
‘궁금하니까 잠깐 가서 확인해보자·’
그리고 시아는 심연을 맛보았다·
-시청자 수 레전드 ㄷㄷ
-방장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3만 명 찍겠네·
-이 오타쿠 일본 노래는 대체 무엇입니까? 귀가 너무 어지럽습니다·
-양놈들 이제야 정신이 들어?ㅋㅋㅋㅋ
-나메 아버지 등장 예정?
-그분 왕년에 종군마도사였다는데
루틴을 중시하는 나메는 평소처럼 어두컴컴한 배경에 카리리의 노래 2곡을 랜덤으로 틀었다·
알고리즘으로 새로 유입된 시청자들이 두통을 호소하는 것도 몰라주고 그녀는 곡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영상송출을 시작했다·
첫 화면부터 나메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볼살이 반겨주었다·
[아 근데 야외촬영은 익숙지가 않아서 카메라를 어떻게 놔야 할지 모르겠네요· 교수님 이거 소형드론 어떻게 쓰는 건지 아세요?]
-???
-나메 ㄱㅇㅇ~
-드디어 시작시작!
-와캬퍄헉볼따구ㅋㅋㅋㅋ
-노네임님 대회장임?
[아 그럼 하나는 대련장 전체 나오게 띄워주고 하나는 제 얼굴이 나오게· 네네 감사합니다·]
카메라가 다시 그녀의 얼굴로부터 멀어졌다·
관람객들의 대화소리 해설자의 마이크 에코소리 등의 잡음이 잦아들자 나메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오늘 세피론 아카데미와 알테어 아카데미의 편파적인 중계를 맡게 될 노네임 아니 노나메라고 합니다· 모두 잘 부탁드립니다·]
* * *
구온유 교장의 인맥찬스를 쓴 덕분에 우리 초등부 2학년 친구들과 가족들은 대련장 정중앙 1열부터 3열까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다만 내 친구들은 바로 첫 번째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대기실로 가버려서 옆자리가 휑했다·
“난 방송같은 건 할 줄 모르는데 괜찮겠니 나메야?”
천교수의 물음에 나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대학생들한테 강연하는 것처럼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돼요·”
“허허 그게 어떻게 같을까·”
“하다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어색해하는 교수에게 초소형 마이크를 옷깃에 달아주었다·
[‘ray0405’님이 10000원 후원!]
-Hoxy 옆에 계신 분은 미래의 장인어른 되십니까?
“장인어른···?”
“아 그게 그러니까 제가 다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잠시 한눈판 사이에 후원이 터져나오고 천교수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부정했다·
-당 장 밴 때 려!
-선을 넘어서 부숴버리네ㅋㅋㅋ
-따님을 10년 뒤에 제게 주십시오!
└ 10년 뒤라도 고3이라 미성년자야ㅋㅋㅋㅋ
└ 어질어질하네ㅋㅋㅋㅋ
-차라리 지금이라도 아들을 낳아서 결혼시키는 게 더 킹능성 있겠음·
└ 그럼 장인어른이 아니라 사돈이라 불러야 함?
-매니저! 매니저ㅓㅓㅓㅓㅓ!
-(매니저1): 24시간 밴 때렸습니다·
“에휴···”
해명하는 건 포기하고 카메라 각도를 살짝 틀어 천교수를 스크린에 포함시켰다·
그러다가 문득 방송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게 생각나 귓속말로 그에게 속삭였다·
‘방송 도중에는 그냥 아버지라고 부를게요·’
‘···?’
‘계속 교수님이라 부르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잖아요·’
별로 안 내키시는 건가?
그래도 눈이 활짝 웃는 걸 보면 그리 싫어하시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예전에 방송에서도 몇 번 출연하셔서 눈에 익은 분들이 계실 텐데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반가워요 시청자 여러분· 우리 칠칠치 못한 나메를 챙겨주시느라 항상 감사드립니다·”
-중년간지 멋져요 아버님!
-포스가 ㄷㄷ 호랑이도 때려잡으실 듯
-티비에서는 선해보이게 나오셨는데 실물은 좀 무섭네요
-우리 나메가 예의가 바를 수밖에 없는 이유·
└ 노네임이 예의가 발랐던가···?
└ 조오금 애매하긴 해ㅋㅋㅋㅋ
-사춘기가 오면 절대 안 되는 집안 ㄷㄷ
[‘노네임은아가야지켜줘야해’님이 1000000원 후원!]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나메님을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항전 끝나고 맛있는 거 사주세요!
“아 노네임···줘야해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아 이게 뭐냐면 방금 시청자 한 분이 저희 저녁값으로 백만 원을 후원해주셨다는 뜻이에요·”
“뭐라? 백만 원? 저 사람은 집에 돈이 썩어 남아 도나?”
천교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뭐 세상은 넓고 부자들은 많으니까·
천교수가 인방 생태계에 적응하는 동안 빠르게 흘러가는 채팅창을 쭉 훑었다·
“아직 시작까지는 몇 분 남았으니까 저희 아버지께 궁금하신 질문들 있으시면 지금 빨리 받을게요·”
[‘hells몬스터’님이 50000원 후원!]
-나메는 편식하나요?
우리 방 매니저가 첫 질문의 타석을 끊었다·
나는 고개를 슬쩍 들어 천교수를 바라보았다·
“저는 편식 거의 안 하는 편이지 않아요 아버지?”
그러자 천교수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마치 버퍼링에 걸린 듯 했다·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니 그제야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인다·
“피망이나 파프리카 같은 채소는 아예 입에도 안 대지· 고추잡채나 해물파전도 거의 안 먹는 편이고· 굴이나 조개도 잘 안 먹었던가?”
“어패류는 아무래도 좀 그래요·”
옛날에 비슷하게 생긴 마물에게 먹힌 트라우마가 있어서 아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꺼려지긴 한다·
질문은 그 뒤로도 쭉 이어졌다·
[‘나메없는세상은지옥이다’님이 30000원 후원!]
-따님이 집에서 어리광 자주 부리나요? 애교 부린 적은 있나요?
“하나도 없지요· 여러분들이 보시는 모습이랑 똑같을 겁니다·”
[‘honoka’님이 1000원 후원!]
-지금 인기 많아진 나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메가 큰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항상 마음 졸이면서 살고 있어요·”
[‘월요일의노나메’님이 5000원 후원!]
-나메에게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어떠실 것 같나요?
“···”
“응?”
갑자기 차가운 한기가 휘몰아쳐 팔에 닭살이 돋았다·
천교수의 감정변화에 주변 마나가 동화되고 있었다·
-와 ㅈㄴ 무서워ㅋㅋㅋㅋㅋ
-ㅎㅎ;; 나메는 평생 혼자 사는 걸로~
-미래의 남친분께 미리 묵념···
-솔로로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아 나메야!
질문이 너무 나에게로 편중되어 있어서 잠시 들뜬 열기를 잠재웠다·
“오늘 아버지랑 같이 중계 해설을 맡기로 했는데 이쯤에서 약력이라도 소개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다른 개인 중계방송을 보면 전직 아카데미 교사 대형 학원 강사 현직 조교수급 사람들이 나오곤 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세피론 아카데미의 학생일뿐이니 스펙이 화려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천교수를 내세웠다·
미리 준비해놓은 홀로그램을 작동시켜 천교수의 개인 웹사이트에 기재된 스펙을 보여주었다·
현재 그는 한국대학교 소재공학과 정교수부터 시작해서 마학대학 교무부학장 이론연성연구소 소장에 여러 대기업의 사외이사까지 겸하고 있다·
그뿐인가 미국에서도 여러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국가방위연성진을 설계하였고 젊은 시절에는 중동전쟁까지 참전하였다·
초인적인 스펙에 혀를 내두르는 시청자들·
솔직히 내가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그의 하루는 48시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와닿는 건 이쪽일 것이다·
고개를 살짝 돌려 천교수와 눈을 마주보고 무언의 허락을 구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나는 한국인들이라면 바로 반응이 올 수밖에 없는 브이튜브 영상 하나를 틀어주었다·
[(2013) 제4회 전국체술대회 고등부 준결승: 함초롱 vs 천병호]
“함초롱 다들 아시죠? 그 분 상대로 30분 경기 풀타임을 채운 유일한 분이 바로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마치 내 자랑이라도 되는 양 나는 콧김을 내뿜으며 자랑스럽게 천교수를 소개했다·
오늘 방송 역사상 최대 시청자를 찍을 것만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나메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응원의 말을 건네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천교수는 방금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진심으로 건넨 말은 아니었겠지만··· 역시 기쁘네·’
어떻게 ‘아버지’라는 그 한 단어에 심장이 그리도 철렁할 수 있는지·
그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괜히 넥타이를 풀었다가 다시 올바르게 매었다·
친구들에게 한번씩 포옹을 해주는 나메가 멀리서 보였다·
유나와 지혜 하루 한결 시후까지· 하도 많이 말해주어 이제는 천교수도 그들의 이름을 외울 수 있었다·
10명의 학생들이 대련장 안으로 입성하는 동안 나메는 대련장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올라왔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고 각 모서리에 심판진들이 배치되었다·
“우리 아이가 첫 번째로 나가나봅니다·”
천교수의 바로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풍채 있는 남성은 마범일 형사였다·
“지혜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하아아 우리 딸이 잘할 수 있을까요? 나메 아버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다시 대련장쪽을 바라보니 마지혜와 이하루가 대련장 정중앙에 서서 결연한 표정으로 상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원래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고 하지 않습니까· 분명 지혜 아버님이 생각하신 것보다 훨씬 대단한 성취를 보여줄 겁니다·”
“되도록 싸우게 시키는 쪽은 피하고 싶었건만··· 지혜가 속은 여려도 누굴 닮아서인지 참···”
“부모의 역할은 자식을 이끌어주는 게 아니라 그저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받쳐줄 뿐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러니 저희도 한번 믿고 기다려봅시다·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천교수님 저 왔어요· 빨리 방송부터 켜요 대련 바로 시작하겠다·”
허겁지겁 카메라부터 확인하는 나메를 보고선 천교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
나메가 고개를 갸웃거려본다·
천교수는 별 거 아니라는 등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의자에 푹신한 방석을 깔아주었다·
“우리 후배들이 과연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지켜보자꾸나·”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거예요· 하루이틀 굴린 게 아니거든요·”
“음? 굴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카데미 대항전은 대충 2vs2 포켓몬 배틀이라고 생각하시면 규칙 이해가 편하실 거예요··!! 반면 전국체술대회는 그런 거 없고 토너먼트 형식의 일대일입니다!!
이런··!! 나메는 평생 모솔로 살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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