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7
전생에서 머리와 관련된 트라우마는 수도 없이 많았다·
어릴 적에는 툭하면 황제직속 특수부대 단원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뿔이 잘렸다·
콧대 높은 공작가 영애들에게 와인 싸대기를 맞고 머리끄덩이를 휘어잡히곤 했다·
남자라고 다를 것 같은가·
제일 치사하게 싸우는 인간들은 언제나 암살자들이었다·
생사를 건 승부와 정정당당이라는 단어는 양립할 수 없으므로·
하지만 유사시에 사용할 마력을 비축해놓기 위해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스승님은 어쩔 땐 머리를 묶고 어쩔 땐 풀고 다니네요· 안 불편해요?]
트윈테일을 고수하는 건 일종의 징크스였다·
첫 암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을 때 우연히도 나는 그날 니오베가 만들어준 트윈테일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 덕분에 살아남은 경험은 이후로도 계속 족쇄가 되어 불안을 야기했다·
전투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트윈테일을 하는 게 아니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트윈테일을 하다보니 전투에도 유용하게 쓰는 법을 알아서 깨우쳤을 뿐이다·
공중전을 펼칠 때는 때때로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그것이 승패와 극적으로 연결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가 이번 팬미팅 때 일종의 보답 차원으로 머리를 풀기로 결심했다·
마침 뒤에서는 천교수가 든든하게 지켜보고 있고 팬들의 열렬한 환호로 마음도 조금 안정되었으니까·
팬들이 이러한 뒷사정까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다들 바뀐 헤어스타일도 꽤나 좋아해주는 모양이다·
“나메야 귀여워!”
“머리 푼 것도 예쁘다!”
환호성이 일었다·
하긴 달라진 거 없어라고 물어봤을 때 99%는 머리를 뜻한다·
가장 극적인 변화라서 상대방이 알아채주었으면 하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저는 노나메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세피론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고 다음 달에 3학년으로 올라가요·”
“꺄아아아악!”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익룡 한 마리가 뜬금없이 울부짖었다·
“아하하· 사실 올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여러분들을 보니까 상상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어요· 팬미팅은 총 3시간으로 기획되어 있는데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고요· 사인회는 중간에 브레이크타임을 가졌다가 2부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스태프들이 전달해준 공지사항을 쭉 읊어주고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건넸다·
“여러분께도 양해드리고 싶은 사항이 하나 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사회자를 봐주기로 신청한 분이 계셨어요·”
조명이 좌석 하나를 비춘다·
팬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외국인 남성에게 시선을 쏟아부었다·
“이 분 사회자 시켜도 괜찮을까요?”
“네!”
“우와아아아!”
“캐넌! 캐넌! 캐넌! 캐넌!”
“노나메 폼 미쳤다!”
“그럼 캐넌씨 앞으로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양복을 잘 갖추어 입고 촐싹촐싹 뛰어오는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덩치에서 오는 위압감을 지우기 위함일까·
얼굴이 큰 편이라서 방송으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키가 거의 2미터에 가까웠다·
“잠깐만요 자리 비켜드릴게요·”
“오··· 네?”
“여기 앉으시면 돼요·”
어린이용 의자를 그에게 양보하고 나는 휘황찬란한 옥좌 위로 올라가 앉았다·
“여기요?”
“네·”
“오우 좋네요! 딱 제 사이즈에 맞는 크기예요!”
대화를 할 때 서로 눈높이가 맞는 건 중요하니까·
캐넌이 엉거주춤하게 의자에 엉덩이를 대자 다리에서 삐그덕 소리가 났다·
그래도 내구성은 좋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혹시 불편하지는 않으시죠?”
“그럼요! 우리 스튜디오보다 편안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캐넌 씨· 오늘 진행도 잘 부탁드릴게요·”
* * *
-캐넌킹이랑 나메랑 자리가 뒤바뀐 것 같은데ㅋㅋㅋ
-나메 팬미팅이니까 나메가 상석에 앉는 게 맞지
-특별대우 따위는 안 하겠다는 의지···!
1단계 알아가기·
온라인으로 아는 것과 오프라인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나메와 팬들의 간극을 좁혀주기 위해 주최측은 트리위키 읽기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였다·
“노나메님의 키는 1미터 13센티미터· 맞아요?”
“네· 아카데미 대항전 때 인터뷰 바탕으로 작성된 것 같은데 지금은 더 컸을 수도 있어요·”
“그럴 줄 알고 저희가 신장계를 준비해봤습니다! 나와주세요!”
“예?”
남성 둘이서 커다란 기계를 낑낑대며 무대 중앙까지 옮겼다·
캐넌이 히죽 웃으며 팬들을 바라보았다·
“저는 사회자니까 논외로 하고 나메의 키 측정을 도와줄 사람 한 분을 모시려고 하는데요·”
객석과 채팅창이 동시에 술렁였다·
-나메신 바로 앞에서 영접 가능?
-와ㅋㅋㅋㅋ
-뒤꿈치 들면 나메 정수리 꾹꾸욱꾹 눌러도 되냐?
└ 아버지한테 끔살당할 듯
-팬미팅 개부러워 팬미팅 개부러워 팬미팅 개부러워
“그 자격은 여러분 스스로 쟁취해내세요! 그럼 첫 번째 퀴즈 나갑니다! 나메가 월드 오브 아르세리아에서 처음으로 쓴 마법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순서대로 맞추셔야 합니다· 구호는 나메사랑해로 통일하실게요·”
매니저의 도움으로 작성된 질문의 난이도는 하늘을 뚫었다·
-이걸 어케 알아ㅋㅋㅋㅋ
-튜토리얼 방송이면 대체 언제임?
-작년 1월 20일이니까 정확히 1년 하고 하루 전이네ㅋㅋㅋㅋㅋ
-질문 누가 만듦!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 중에는 진지하게 맞춰보려고 옆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보였다·
“정답! 아니 나메사랑해!”
남성이 팔을 들고 큰 목소리로 자신있게 외쳤다·
“예스 미스터?”
“마찰계수조정··· 그리고 극좌표계 부여?”
“흐음··· 놉!”
남성의 말을 듣자마자 반대편에 앉은 여성팬이 소리쳤다·
“나메사랑해!”
“레이디의 답은?”
“회로 재구성 마찰계수조정!”
“정답! 이리 올라오세요!”
“꺄아아아악 엄마 나 해냈어!”
-와 미친ㅋㅋㅋㅋㅋㅋ
-이걸 맞추넼ㅋㅋㅋ
-2트만에 실화냐?
-극성팬 아니냐고 이 정도면ㅋㅋㅋ
나메는 신발을 벗고 신장계 위로 올라갔다·
“우와 나메님··· 너무 작고 소중해···!”
“하하 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똑바로 서야지! 에잇에잇!”
두 손으로 나메의 발뒤꿈치를 잡아 바닥에 꾹 누른다·
온 힘을 다해 목을 뻣뻣하게 세우는 나메·
캐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작년 10월에 측정했으면 지금은 그보다 훨씬 커지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때도 살짝 올려서 말한 지라···”
“지금 딱 됐다! 버튼 누를게요 나메님!”
하이힐을 신으면 180까지 치솟는 전생과는 다르다·
1mm라도 소중한 지금 이 순간 기계가 정수리에 부딪히는 순간 나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보자 113·9···”
“쓰읍···!”
“어이쿠 114cm! 우와 나메님 봐요! 1cm나 컸어!”
“114라고 합니다! 모두 큰 박수 주세요! 에브리바디 스탠드업!”
캐넌이 흥분한 어조로 팬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건 걍 단체 고로시잖아ㅋㅋㅋㅋㅋ
-누가 노나메 113이래! 114야 114!
-깨알상식) 초등학생 1학년 평균 키는 122cm이다·
└ 캐넌 옆에 있으니까 우리 나메 소멸 직전임ㅠㅠㅠ
-졸커엽네 미친ㅋㅋㅋ
-‘노나메’ 트리위키 실시간 검색량 5위 달★성
“또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가 엄격한 관리자?”
“네 ESTJ 맞아요·”
“나메님이 별명이 참 많은데요! 노넴넴 나메나노요 예스나메 얼법시치 기계소녀 DMZ? 이건 무슨 뜻일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13) DMZ: 다이브에 미친 자식 혹은 다이브에 미친 존재·]
“여기 설명으로는 롤을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타워 다이브를 했을 때 달린 댓글들이라고 나와있네요·”
-아스테리아는 진짜 악몽이다···
-나메 앞에서는 안전지대가 없지ㅋㅋㅋㅋㅋ
-승률 43% 개똥챔으로 캐리했던 자식··· 그래서 더 증오스러웠던 자식···
“제가 그 때 채팅을 아예 안 봐가지고 잘 모르겠네요· 아마 맞을 것 같아요·”
“네 좋습니다! 북한의 킴주애도 주목하는 멋진 별명이에요!”
다음은 2단계 친해지기·
112명의 팬들이 각자 질문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붙였다·
분홍색 노란색으로 활짝 핀 꽃잎들·
나메가 찬찬히 훑어보더니 그 중 하나를 떼어서 읽어주었다·
“민트초코 좋아하시나요· 네 좋아합니다·”
“정말요?”
“나쁘지 않던데요?”
-대민초파 대동단결
-반민초단은 물러나라!
-나메야 그거 지지야···! 지지 먹으면 안 돼!
-독하다 독해~ 나메도 민초파인데 이래도 민초 지지 안해?
“최근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일· 저는 지금이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애정어린 눈으로 질문을 주의깊게 살펴본다·
캐넌도 잠깐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나메가 천천히 둘러보도록 배려해준 것이었다·
“브이로그에 아버님 등장 언제 하시나요· 조만간 촬영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자세로 잠을 자는지? 피탄면적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새우잠으로 잡니다·”
“굿즈 만들어주세요 제발요· 이건 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
“제 싸인 필요하세요? 엥 이건 무슨 질문이지···?”
“노나메님도 본인이 예쁘다는 걸 아시나요? 예쁘지는 않지만 어른들의 보호욕구 정도는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호욕구 ㄷㄷ
-아니 피탄면적이라는 말은 어케 아는 거임ㅋㅋㅋㅋㅋ
-이 아이 어휘력이 심상치 않다···!
-완전 애늙은이야!
-나메한테 자기 싸인 필요하냐는 질문은ㅋㅋㅋ
포스트잇으로 무성했던 나무의 잎사귀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간다·
배경이 봄에서 여름이 여름에서 가을이 될 때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듯 나메와의 거리감을 부쩍 좁혀나갈 수 있었다·
“이루고 싶은 목표? 8살한테 너무 거창한 걸 물어보시는 거 아니에요? 일단은 세계최강이라고 말해둘게요· 세계정복에 비해선 너무 소박하죠?”
-세계최강이 될 소녀!
-소박한 꿈: 세계최강
-나메를 백악관으로!
-말 또박또박 너무 잘한다ㅋㅋㅋㅋㅋ
중복된 질문들은 쳐내고 질문할 거리가 생각이 안나 귀여운 그림을 그린 것들은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마지막 열 개 가량 남은 질문들·
나메는 그 중 하나를 똑 떼어서 조명에 비추어보았다·
“고백하거나 고백 받아본 적 있나요?”
돌연 나메가 포스트잇을 방송 송출 카메라 앞에 가져다대었다·
“고백한 적은 없지만 받아본 적은 많이 있죠·”
-🔥🔥🔥🔥🔥
-어느 놈이야!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이 사랑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나메는 너무 어려! 안 돼!
└ 고백한 애도 같은 학년이었겠지ㅋㅋㅋㅋ
-체감상 나메는 유치원생?이 아닐까?
-나메 아버지! 우리 나메 지켜요!
캐넌이 건수를 잡았다는 마냥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나 고백받았는데요?”
“글쎄요? 몇십번?”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천교수의 안광이 서늘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메는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을 시청자들을 향해 포스트잇을 계속 달랑거렸다·
“2부에 시청자 수가 지금보다 떨어지면 보류해놓은 고백들 다 받아줄지도 몰라요?”
그녀의 완연한 협박에 채팅창에는 화마가 휩싸였다·
당연히 시청자들은 알 턱이 없었다·
고백을 보류했다던 게 고백한 상대방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걸·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린블루의정원님 1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우리 아델라하고 나메 너무 이쁘죠!! 응원의 말씀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연재해나가겠습니다!!
이젤론님 3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나메 발바닥 보셨어요?! 너무 귀여워요 ㅎㅎ
알빠노혹등고래님 10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성실한 출석하시는 독자님들을 위해 더욱 더 열심히 쓰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표지를 잘 보시면 아델라가 티팬티를 입고 있다는 사실!! 확대를 해보시면 눈치채실 수도 있을 거예요!! 최신화까지 함께해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베른슈타인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신규 일러를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중성적인 매력이 있는 근육고양이 아델라!! 하지만 가슴은 무시 못합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까는 반민초단입니다· 하지만 나메가 민초단이라고 하니까 위장민초단이라도 해야겠어요·
전생에서는 사람들이 나메에게 고백하는 족족 죽어버려서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네요··!! 전부 나메가 한 짓만은 아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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