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1
박태석 교장이 청춘 만화에나 나올법한 열혈 캐릭터라는 건 1분만 말을 섞어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적당히 그가 좋아할 법한 말들로 포장해 두 번째 추천서도 쉽게 따낼 수 있었다·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마지막 추천서는 누구한테 받아야 할까 고민을 했다·
아스펜 아카데미에서 나와 부산항 근처를 서성이던 중 익숙한 오러를 느낄 수 있었다·
거미줄처럼 촘촘히 퍼져있는 오러의 기운·
누군가가 주위의 지형지물을 탐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오러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반소월이잖아?’
타지에서 아는 얼굴을 보면 반가움부터 드는 법이다·
나는 그녀에게 조르르 달려가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소월 언니· 여기서 다 보네요·”
“응?”
“저 나메예요· 노나메·”
반소월이 내 얼굴을 더듬거리더니 왼쪽 볼을 살짝 꼬집었다·
“이 향기로운 라일락 향이 너였구나· 반가워 오랜만이야· 부산에는 놀러온 거야?”
“아스펜 아카데미 교장님께 용무가 있어서 왔어요·”
“용무? 박태석 쌤한테?”
나는 고위마도사와 관련된 일련의 절차들을 설명해주었다·
반소월이 흥미롭게 여겨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그렇구나· 고생을 사서 하는 타입이네·”
“뭐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도 한명만 더 찾으면 되니까· 그나저나 소월 언니는 본가에 내려오신 거예요? 그런 거 치고는 옷차림이 여행룩 같은데·”
나는 그녀의 빨간 캐리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반소월이 웃음을 머금고 검은 선글라스를 꼈다·
“예리해 이따 저녁에 배 타고 일본여행 가·”
“일본여행이요?”
“응· 사실 본가가 후쿠오카에 있거든· 어머니가 일본 분이셔서·”
“아아 처음 알았네요· 그런데 왜 비행기를 안 타고 배로···? 한국대에서 출발한 거 아니었어요?”
“왜긴?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 얼마나 멀다고· 비행기보단 배가 더 안성맞춤이지·”
“서울에서 바로 비행기를 타는 게 아니라요?”
“음···? 아···!”
선글라스 너머로 커다라진 반소월의 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항상 배로만 가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
“아하하·”
“올 때는 꼭 비행기를 타고 와야겠다· 아 나메야 혹시 너도 일본 갈래?”
“저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 아빠도 고위 종군마도사야·”
“네?”
“추천서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아빠한테 써달라고 할 수 있는데·”
“진심이에요?”
처음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전직 부산광역시 경찰청장이자 현 후쿠오카 총영사 반일권씨가 우리 아버지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홀린 듯이 매표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후쿠오카에서 국가교류전 예선 열린다는데 같이 보러 갈래요?”
“오 벌써 가기로 결정했어? 나는 언제나 찬성·”
“알겠어요· 바로 배편 끊으러 갈게요· 몇 시 거예요?”
“역시 우리 나메 마음에 든다니까· 5시 반 JF412편이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연락은 박태석 교장한테 남기기로 했다·
아까 교장실에서 나올 때 보니까 배터리가 2%더라·
지금 천교수에게 연락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날아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대한해협 현해탄을 지나 하카타항에는 오후 7시 20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오늘 후쿠오카의 날씨는 맑으며 파도 높이는 1미터에서 1·5미터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배에 타자 마자 우리는 지체없이 3층 전망대로 올라가 경치를 구경했다·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머리가 이리저리 나부꼈다·
부산항의 드높은 크레인이 점점 작아진다·
때마침 천교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노나메! 지금 어디니 너!]
“마지막 추천서를 받으러 후쿠오카에 가는 중이에요·”
[지금 배에 탔다고?]
“네· 예전에 한국대에서 만난 반소월 언니랑 함께 있어요· 추천서도 받을 겸 같이 국가교류전 보러 갈 거니까 제 걱정은 너무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하아···]
폭탄테러 사건 이후로 간만에 깊은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묵을 곳은 정했고?]
“소월 언니네 집에서 잘 거예요·”
[언제까지 있을 예정이니?]
“그래도 이왕 일본까지 온 김에 결승전은 보고 가야하지 않을까요?”
[결승? 도쿄까지 가겠다고?]
“네· 뭐 바로 옆인데·”
[도쿄까지 자그마치 1000킬로다 1000킬로!]
“대신 기차로는 2시간이죠·”
“푸흡···!”
반소월이 옆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몇마디 말로 천교수를 안심시키는 건 역시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허락보다 용서가 더 쉬운 법이었다·
“맛있는 거 많이 사가지고 올게요· 로이즈 초콜릿이랑 곤약젤리랑· 아 그건 한국에서도 다 판다고요? 그럼 더 열심히 고민해봐야겠네요·”
허락도 받았겠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우리는 기념품점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봐도 허락을 받은 건 아닌 듯 싶은데··· 흠흠 난 모르겠다!”
“카츠하타 유파의 전승검 키링도 파네요· 실물보다 이게 훨씬 예쁜 것 같아요·”
“육도전승검? 그건 가문의 보물이라서 아무나 볼 수 없잖아·”
“옛날에 에미카가 한번 보여줬어요· 작년에 한국에 왔을 때 만났거든요· 당장 2주 전에도 봤었고·”
“진짜? 카츠하타의 후계자랑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반소월이 살짝 톤을 높여서 물었다·
그러자 원형 식탁에 둘러앉아 한창 치맥을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을 보기 좋게 끌어버렸다·
“방금 카츠하타라고 했나 저 아이?”
“어머 쟤 걔 아니야? 그 있잖아 한국에서 유명한 애!”
“노나메 맞네! 우와 신기해!”
이미 배에 탑승한 한국인들은 거의 다 아는 것 같고 일본인들조차 하나둘씩 눈치를 채는 모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는 살짝 머리를 숙이는 거로 인사를 대신했다·
“일본에서는 에미카가 엄청 유명한가보네요·”
“글쎄 유명하다는 표현만으로 충분할지··· 후계자가 이슬만 먹고 수련한다는 걸 여기 사람들은 진심으로 믿어·”
단체에 대한 믿음이 종교에 다다른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되나·
발푸르기스가 한창 활개를 쳤을 때도 일본만큼은 건들 엄두도 나지 않았다고 하니 국민들이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는 것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런데 네가 후계자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네· 일본 가는 김에 전화라도 한번 해볼까요?”
예선전이 당장 모레니까 아무래도 수련보다는 컨디션 관리를 할 시기가 아닐까·
이 시간에 전화를 해도 딱히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뚜루루-
조금 늘어지는 연결음·
인내심을 가지고 노래가 두바퀴를 돌 때까지 기다렸다·
[여보세요· 카츠하타 에미카입니다· 나메야 너야?]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반소월이 살짝 흠칫하며 팔짱을 꼈다·
“안녕· 에미카·”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나 내일 모레이면 예선전 치르는 거 알고 전화해준 거야? 그렇다면 너무 땡큐지·]
“응· 그래서 가고 있어·”
[가고 있다니 어딜?]
“어디긴 후쿠오카지· 언니가 출전하는 경기는 다 보러 갈 거거든·”
[에엣! 자··· 잠깐만 정말로?]
“나도 내년에 출전하려면 상대가 어느 수준인지는 직접 봐야하니까·”
[헛! 인터뷰 봤구나· 부끄럽네·]
“도발을 제대로 했더라고· 그래놓고 예선전에서부터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보여? 나는 올해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어·]
“다행이야· 그 자신감을 실력으로 보여주기를 바랄게 화이팅·”
시간이 귀중한 사람이라니까 일부러 전화도 일찍 끊었다·
이후로 나는 전지훈련에서 있었던 일화들을 반소월에게 들려주며 시간을 보냈다·
반소월은 답례로 국가교류전을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정보들을 내게 많이 가르쳐주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인도인 참가자가 거주하는 호텔 앞에 화염병을 던진 인종차별 사건도 벌어졌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대항전은 적당히 헐뜯으면서 다들 좀 즐기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쪽은 확실히 살벌하네요·”
“국가 타이틀이 걸린 거다 보니까 다들 진심일 수밖에· 다른 나라는 선발전부터 엄청 치열하게 진행하더라·”
현재 한국에서는 아무도 국가교류전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대표로서 뽑힌다는 영광보다 어쭙잖은 나라에 패배했을 때 얻어먹는 욕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승하지 못하면 본전도 못 뽑는다는 인식 때문에 남들 다 즐기는 대회에서 찬밥 신세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타 국가는 다르다·
작년에 에미카를 꺾고 4강까지 올라갔던 헝가리 소년은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영예인 성 이슈트반 훈장을 받아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부가적으로 주어지는 정부와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은 덤이고·
“이건 에미카 앞에서 절대로 말해주면 안 되겠네요· 괜히 트라우마 자극할라·”
내가 본 에미카는 일단 멘탈이 약했으니까·
실전에 약한 타입인지 작년 경기만 보더라도 이상하게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아! 이걸 알려줘도 되려나? 라이브벳인포 채널에 가보면 배당도 확인할 수 있어· 누가 우승후보인지 대략적으로 참고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하기야 스포츠 경기에는 도박이 빠질 수야 없겠지·
“전체적으로 유럽 강세네요?”
참고로 미국은 국가교류전의 취지에 맞지 않아 참가하지 않는다·
“주 이용자들이 유럽이라서 조금 편향된 측면은 있을 거야· 어차피 우승자는 항상 역배였어·”
“프랑스 영국 스위스 스위스 이집트· 대충 알았어요·”
에미카가 저기 아래 11위에 처박힌 게 퍽 안쓰러웠다·
‘아무래도 작년의 충격적인 패배가 반영된 것 같네·’
그동안 스피커를 통해 하카타항에 곧 도착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파도소리에도 묻히지 않는 갈매기의 세찬 울음소리가 육지에 다다랐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창밖으로 길게 늘어진 콘크리트 건물과 드문드문 튀어나온 산맥·
저녁 태양이 해안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노을의 기다란 빛줄기가 마치 철판 위의 삼겹살처럼 때깔이 고왔다·
“아 배고프다·”
이런 멋진 풍경을 보고 일차원적으로 든 생각은 그냥 배고프다는 거였다·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생각해보니 나 오늘 한 끼도 안 먹었구나·
“장어덮밥 좋아해? 엄마가 오늘 저녁으로 새우튀김이랑 장어덮밥 해준대·”
“너무 좋아요· 빨리 먹어보고 싶네요·”
“나메 온다고 하니까 엄마가 잘 안 하던 요리를 해주시네· 맛은 기대해도 좋아·”
반소월이 자신 있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배는 약간의 덜컹거림과 함께 무사히 항구에 도착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챙길 동안 나는 반소월의 맞은편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갈까요? 길은 잘 모르지만 일단 출구까지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반소월이 피식 웃으며 맞잡은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옷부터 사러 가자· 그게 좋겠지? 너 당장 내일 입을 속옷도 없잖아·”
* * *
우리들은 항구 앞 백화점에 잠시 들러 아동복을 구매했다·
“어떤가요?”
“너무 귀여워요! 봄의 병아리를 보는 것 같네요!”
“이것도 담아주세요·”
내가 입어보는 족족 반소월이 카드를 긁어댔기에 거절할 틈도 없었다·
나중에 사진이라도 찍어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상현실에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번역기도 사용하지 않은 매장 점원의 한국어 실력은 꽤나 유창했다·
그래서 내가 외국에 왔다는 실감이 났던 시점은 엘리베이터 안내방송이 일본어로 나왔을 때부터였다·
택시를 타고 반소월의 본가에 도착했을 때 시각은 이미 밤 8시 30분이었다·
딩동-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성분께서 문을 열고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소월아! 어유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옆에는?”
“안녕하세요·”
“와아아아 네가 바로 전설 속의 나메양이구나! 우리 집에 어서오렴! 밖이 많이 덥지? 어서 들어오렴!”
“갑자기 방문하게 되어서 곤란하셨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는 언제나 환영이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메야 짐은 현관 앞 내 방에 놔두면 돼·”
신발을 벗고 쇼핑백은 전부 반소월의 방 앞에 던져두었다·
“배고프지? 아줌마가 금방 저녁 해줄게!”
“앗 네 감사합니다·”
“소월아 왔냐?”
거실에서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인 모양·
나는 반소월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거실로 이동했다·
“고생했다! 아이구 우리 딸이 한국에 친구를 만들고 왔네! 근데 친구가 좀 많이 어리다?”
아저씨는 나를 보고 인심 좋게 웃어보이셨다·
“안녕하세요· 노나메라고 합니다·”
“오오오 아저씨도 반갑다· 얘가 떴다하면 요즘 한국이 아주 뒤집어진다며? 우리 집도 뒤집어지는 게 아닐까 몰라 하하하!”
“아빠 딸은 안중에도 없나봐요?”
“아이 아니지 소월이도 너무 반갑지! 학기 마치고 오느라 수고많았다· 그래 여기 방석 깔아놨으니까 앉고· 오렌지라도 먹을래?”
“여보! 애들 저녁 먹어야 한다니까요?”
“아 저녁 안 먹고 왔다했지 참·”
반소월은 아저씨 옆에 나는 그 맞은 편 남는 자리에 어색하게 앉았다·
뭔가 일본에서는 양반다리보다는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할 것 같아서 후자를 택했다·
“편하게 앉아도 돼 하하· 그나저나 쓰으읍 아저씨가 부탁 하나가 있는데 말이야·”
“네? 부탁이요?”
반소월의 아버지는 오른팔 소매를 걷더니 아주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메야 너 아저씨랑 팔씨름 한번 해보지 않을래?”
“예···?”
더없이 진지한 부탁에 나는 벙찐 표정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가족력이었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톡쏘는탄산수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사이다 가득한 마나인방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알빠노혹등고래님 1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조금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오늘도 귀여운 나메 한편을 드렸어요!!
오랜만에 출연하는 한국대 철학과 여신 반소월!! 아카데미 출신답게 부모님 빽도 상당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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