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
학교로부터 배부받은 교과서가 책상 한쪽에 탑을 이루고 있다·
이미 내 앉은키는 가뿐하게 돌파해버렸다·
확실히 전에 있던 아라별 초등학교보다 세피론 초등학교의 교육과정이 훨씬 앞서 있었다·
제일 위의 교과서가 마침 수학이라서 대충 목차를 살펴보았다·
큰 수의 사칙연산 평면도형의 성질 분수와 소수 등등·
그나마 마지막 쪽에 가서는 공약수와 공배수까지 나오지만 여전히 이런 것들로는 1서클 마법도 제대로 구현해내기 힘들어보였다·
기껏해야 ‘라이트’나 ‘가열’ ‘냉각’ 마법 정도?
개개인의 사물함은 교실 뒤쪽으로부터 이어지는 또다른 작은 방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총 25개의 사물함이 빼곡히 차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A반 인원이 21명이니 개수는 충분한 셈·
쉬는 시간이 도래하기 전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교과서 정리까지 마친 후 자유롭게 시간을 가져도 된다고 하셨다·
거의 스무 권에 달하는 교과서를 옮기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번은 왕래해야 할 듯싶었다·
처음에 열권을 한 번에 들려고 노력은 해보았지만 몸이 휘청거려서 결국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사물함 열어줄게·”
“고마워·”
친절하게도 나처럼 머리를 트윈테일로 묶은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6번 자리의 사물함을 열어준다·
사물함은 삼중층 구조로 수납이 편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역시 돈 많은 아카데미는 이래서 다르구나 싶기도 하고·
가장 안쪽에서부터 책을 차곡차곡 꽂아 넣고 있는데 방금 도와준 소녀는 떠나지 않고 내 옆에서 자리를 쭉 지키고 있었다·
“윤시후랑 무슨 얘기 나눴어?”
“응?”
“아까 무슨 마법사 얘기 했잖아·”
“아 마법 쓸 때 손 느리면 죽는다고·”
그러고보니 내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아이였구나·
우리 얘기를 꽤나 흥미롭게 들은 모양이다·
“윤시후는 천재야· 너한테는 시후에게 충고할 자격이 없어·”
라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소녀가 퉁명스럽게 비꼬았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나를 언짢은 기색으로 바라보는지 감이 도무지 잡히지 않네·
나머지 13권의 책들도 정리를 끝내니 때마침 종이 울리며 쉬는 시간을 알렸다·
“헤이(hej) 나메! 스웨덴어로 안녕이라는 뜻!”
“안녕 서리야·”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어! 감동이야!”
“우리 안 본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잖아·”
한서리를 필두로 여러 학생들이 내 자리로 몰려왔다·
덕분에 시후가 인파에 밀려나 그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서리의 차지가 되었다·
“편입생? 전학생? 아무튼 안녕!”
“야 한서리 너 왜 혼자 전학생이랑 친한 척 하냐!”
“우리 진짜로 친하거든? 그리고 내 머리 좀 때리지 마!”
“아라별초는 어디 있는데야? 처음 들어보는데·”
참으로 정신이 없다·
각양각색의 인사말과 더불어 반 아이들이 책상을 빙 둘러 에워쌌다·
아까 나에게 핀잔을 놓았던 붉은 머리 꼬마 아이와 윤시후 빼고는 전부 모인 것 같았다·
“나메가 정신없어하니까 한 명씩 물어봐 줄래?”
서리가 사이에 껴서 교통정리를 해준다·
어차피 차차 알아갈 사이인데 꼬마들은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것이었다·
“어디서 왔어? 다른 아카데미에서 온 거야?”
“바보야 아까 아라별 초등학교래잖아!”
“조용조용! 왜 니들끼리 시끄러운 건데·”
“도봉구에 있어·”
한 학년에 한 반씩밖에 없는 작은 학교니까· 강남 아이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서리랑은 어떻게 알아? 전에 만났었어?”
“그건 내가 아까 말했잖아 싸우면서 친해졌다고·”
“서리 네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냐?”
그러고보니 지혜가 보이지 않네· 서리의 단짝친구로 알고 있었는데 반이 찢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웃사촌이야· 같은 단지에 살아서 놀이터에서 만났어·”
“그럼 고학년 형들이랑 싸워서 이긴 것도 진짜야?”
“싸우지는 않았지·”
그냥 제압하고 도망쳤을 뿐이니까·
“나메야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해! 네가 엄청 멋진 마법 슈슈슝 하고 시전해서 다 쓰러뜨렸잖아·”
“한서리 역시 거짓말일 줄 알았다니까·”
“진짠데 우씨·”
모든 질문에는 일일이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이러다가는 신상이 모두 까발려지는 걸 넘어서 내 팬티 색깔까지 물어볼 기세였다·
서리가 영리하게도 내가 불편해하는 걸 눈치채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멈추어달라고 호소했다·
대신 통성명을 하기로 결정·
그렇게 반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알 수 있었다·
“이하루 얘 완전 부자야· 할아버지가 삼연 그룹 부회장!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한테 다 사다달라고 하면 돼· 호구라서 절대 거절 안 하니까 부담 갖지 말고·”
“그걸 왜 네가 생색내냐 김한결? 그리고 남들 앞에서 말하고 다니지 말랬잖아 내가!”
“지도 큰아빠가 라온 클랜장이면서· 하여튼 부자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니까·”
“내가 부자냐? 용돈은 거의 안 받고 산다 뭐·”
확실히 세피론 아카데미답게 학생들의 부의 수준이 차원이 달랐다·
개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선발되는 고등부와 달리 초등부의 영재들은 대다수가 부모의 조기교육으로 완성되는 면 때문일까·
같은 교복을 입고 있지만 책가방이라든가 신발이라든가 이런 세세한 측면에서 귀티가 흘러나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아라별초의 아이들이 제대로 된 슬리퍼 하나 살 돈이 없어가지고 반쯤 뜯겨진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거랑은 확연히 대비되었다·
“너무 한번에 얘기하면 전학생이 헷갈려 하잖아· 한명씩 천천히 소개해야지!”
“아니야 괜찮아 다 기억했어· 네가 전누리 옆에는 황혜정· 그 옆에 너는 고경원 맞지?”
“어? 응 맞아···”
“오오오오오오오 전학생! 엄청 똑똑하네! 시후가 긴장해야겠는데?”
한국 이름쯤이야 이 자리에서 백명도 외울 수 있다·
가뜩이나 이름 하나도 긴데 미들네임에 성까지 괴랄하기 짝이 없는 카이젠의 귀족들을 만나다보면 내성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성씨가 겹치기도 하는 한국은 정겨운 수준이지·
“그럼 저 빨간 머리 친구는 이름이 뭐야?”
나는 복도에서 윤시후와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여자 아이를 가리켰다·
“아 재왕 말하는거야···?”
김한결이 눈을 가늘게 흘겼다·
그는 언급 자체를 못마땅해하는 듯이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름이 제왕이야?”
귀여운 외모치고는 꽤 당돌한 이름이네·
그 옆에서 하루가 머뭇거리다가 짐짓 모른 채 할 수 없었는지 내게 귓속말을 청했다·
“제왕이 아니라 재왕··· 재수 없는 왕따라고·”
* * *
“진짜 안 먹을거야? 우리가 사주는건데·”
지혜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먹으면서 말했다·
“응 약 먹을 시간이라서·”
메로나가 정말 맛있어보이지만 참아야지·
서리와 나는 옆반의 지혜와 합류해서 북쪽 매점 한 군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유나? 맨날 윤시후 따라다니는 애? 걔 전교 2등이잖아·”
도란도란 아카데미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서유나라는 이름이 나와서 지혜가 자기도 아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나보다는 서리 네가 잘 알지 않아?”
“걘 1학년 때 C반이었잖아·”
“맨날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 앞에 와 있었는걸·”
“그랬었어?”
“넌 애들하고 놀고 있느라 잘 몰랐지?”
서유나··· 이름이 유나구나·
“아까 우리 반에 이하루하고 김한결이 걔 엄청 싫어하던데?”
서리가 아까 있던 일을 지혜에게 알려주었다·
“그랬었어? 확실히 들리는 소문으로는 서유나가 성격이 조금 이상하다고 했어·”
“성격?”
“생각해보니까 작년에 서리 너한테도 그랬었어· 체육대회 때 네가 바지 빌려줬는데 우유 묻혀놓고 빨지도 않고 돌려줬잖아·”
“그랬었나? 기억이 잘 안나네·”
소문만큼은 그렇게 심성이 나쁜 아이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자기도 옮길 책이 한가득이었는데 굳이 나서서 내 사물함까지 열어주었으니·
“윤시후를 좋아하나?”
“아니이이? 오히려 엄청나게 싫어할걸?”
내 어림짐작에 지혜가 기겁하며 얼굴을 가로로 저었다·
“내 생각에는 자기보다 잘난 애들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게다가 음··· 시후가 1등이니까·”
견제하는건가? 서리가 조심스러운 추측을 내놓았다·
“시후가 공부를 잘하긴 하지·”
“맞아· 초등학교 내용도 다 끝낸 애는 아마 시후하고 유나밖에 없을 거야·”
“완전 괴물이잖아 둘 다? 난 곱하기 나누기도 맨날 틀리는데···”
서리의 말대로 유나라는 친구가 나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으면 그녀의 행동거지가 어느정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이제는 하다하다 여덟 살 아이한테까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게 속상했지만·
애당초 모두하고 친해질 생각도 아니었으니 나중에 또 그런다면 가뿐히 무시해주면 되겠지·
“서리하고 나메는 좋겠다 같은 반이라서··· 나 혼자 B반에 떨어져있으니까 외로워·”
“에구 우리 지혜 외로워? 우리가 매번 이렇게 찾아와줄게 걱정 마· 그리고 B반에도 착한 애들 많으니까 내가 나중에 소개시켜줄게!”
“나메는 아카데미 어떤 것 같아? 다른 학교랑 달라?”
“확실히 이 동네에 부자가 많네·”
“그렇지? 특히 A반이라서 더 심할 거야·”
대기업 부회장 유명 클랜장 병원장 대학총장 등등·
살면서 한번이라도 만나볼 수 있을까 싶은 사람들이 가족이라면 무슨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그래도 애들이 다들 친절하네·”
가진 자의 여유로움은 다르다·
메를린 보육원에서의 아이들이 서로의 물건들을 훔치고 때로는 패싸움을 벌이기도 하는가 하면 적어도 이곳의 아이들은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얕보면 안 돼· 이따가 오늘 오후에도 적성평가 시험 보니까 이제 진짜 아카데미 생활이 시작된거지·”
지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단단히 마음 먹으라고 일러주었다·
끊이지 않는 숙제와 시험 그리고 실습평가 나날들을 얕보면 안 된다고·
그 옆에 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그럼’이라고 맞장구치기까지 한다·
“적성평가라는 건 어떻게 나오는거야? 전 과목 다 봐?”
“아니 마법학만! 객관식 20문제에 주관식 5문제· 성적에 들어가는 시험이 아니라서 딱히 정해진 범위가 있지는 않아·”
“그럼 신경 안 써도 되잖아·”
“적성평가에서 두 번 연속 20등 안에 못들면 2학기 때 다른 반으로 옮겨야 할 수도 있어! 그리고 학년 순위가 공개되는 시험이니까 정말 중요하지!”
“에이 걱정도 우리 전학생 못 믿어?”
서리가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이번에 윤시후하고 서유나를 이겨줘· 그 잘난 콧대들을 콱 눌러버리는거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zakuti님!
원래 늦게 자는 새가 가장 먼저 최신편을 보는 법··!!
크리스마스 표지는 다들 마음에 드셨을까요? 공지사항에서 원본을 확인하실 수 있으니까 많이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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