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
“낯선 천장이네·”
한때는 죽기 전 말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 2위까지 올라갔었지만 이제는 하도 많이 말해대서 지긋지긋한 어구였다·
“일어났니?”
익숙하고 나긋나긋한 음성이 귀에 들려온다·
듣고 있자니 왠지 눈이 감겨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다시 자버리지는 말고·”
“천교수님·”
“왜?”
“화 나셨어요?”
“조금은?”
“그렇군요··· 빨리 갚도록 노력해볼게요· 그래도 이제는 정식으로 아카데미 학생이니까 어느 정도는 세액감면 혜택을·”
“돈 얘기를 하는게 아니야·”
천교수는 몇 겹이나 칭칭 두른 깁스로 뚠뚠해진 팔을 톡톡 건드렸다·
“네 몸을 조금 더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구나·”
천교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몸이라·
사실 아직도 헷갈린다·
이게 진정으로 ‘내 몸’이 맞는지·
육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지만 정신이라고 정의내리는 총체도 본질적으로는 육체의 일부였다·
도대체 나의 무엇이 ‘나’를 정의내릴 수 있을까·
전생의 기억?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마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전생의 지식? 지식 또한 기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운동능력만 보면 현재의 육신이 훨씬 뛰어났다·
성격적으로도 나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전생에서도 한번 경험해 봐서 괴리감이 덜할 뿐이지 가끔 찾아오는 듯한 극심한 외로움과 공허함에 나 스스로도 질겁할 때가 많았다·
현실이 현실이 아니라 계속 취미 한번 고약한 누군가가 끝없이 펼치는 환술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노나메라는 인간이 마치 자동진행을 돌려놓은 게임 캐릭터마냥 저절로 움직이고 나는 한 발 떨어진 방관자가 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이 든다· 빛 소리 냄새 맛 모든 것은 내가 느끼는 게 아니었다·
Discours de la méthode(방법서설) 34쪽 21째줄 ‘ie penſe donc ie ſuis(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생각하기만 하면 뭘 할 수 있지? 난 내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도통 모르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 수록 내 몸에 대해선 점점 신경 쓰지 않게 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내가 무인도에 떨어져 버리기라도 했다면 나는 영영 육체의 주도권을 불명의 누군가에게 빼앗길 거라는 불안감이 때때로 엄습해온다·
나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도 정의내리지도 못하고 나는 교수님을 안심시키는 발언을 빨리 떠올려야만 했다·
“다음엔 조심할게요·”
표현에는 자신이 없었다·
어휘능력도 일종의 지능이었기 때문에 대화를 많이 나누어보지 못한 나는 이런 부분에서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시전해보는 5서클 마법도 단번에 성공하면서 아무도 믿지 않을 여덟 살짜리 아이나 할 법한 거짓말을 하는 게 우스운 꼴이었다·
“마음씨가 착하구나·”
“네?”
“우물에 아기가 빠졌는데 마을 사람 모두가 외면했을 때 지나가는 어느 행인 하나가 아기를 구하기 위해 우물에 뛰어들었대· 맹자는 다수의 마을 사람들이 아닌 오로지 그 한 명의 모습만을 보고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생각했다지· 세상에는 그래도 나메같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름다운 게 아니겠어?”
“아···”
“네가 자랑스럽단다· 하지만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내게 꼭 먼저 연락하렴· 언제 어디서든 네 편이 되어줄 테니까·”
“네··· 명심할게요···”
정말 천규진 이 자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덕분에 뭔가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정리되는 것 같았다·
“먹고 싶은 건 없니? 배고플 시간일 텐데 말이야·”
“지금 몇 시인데요?”
“오전 11시· 꼬박 18시간이나 누워 있었구나·”
“어제 못 먹은 샤토브리앙 스테이크가 너무 먹고 싶어요·”
“아쉽지만 일단 여기 포션부터 마시렴· 어제도 하루 복용치 다 못 채웠지?”
천교수가 껄껄 웃으며 가방 속에서 한가득 포션병을 늘여놓는다·
“으엑· 이러려고 물어봤던 거예요?”
“안 빼먹고 잘 먹어야 빨리 낫지· 너까지 아픈 건 상상하기도 싫구나·”
말을 그렇게 해버리면 나도 마실 수밖에 없잖아·
결국 천교수가 보는 앞에서 2병을 통째로 비웠다·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다·
“포션 먹을 때는 불편한 거 없고?”
“네 적응됐어요· 근데 좀 뭐라 해야 하지··· 액체보다는 고체로 된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이렇게 먹으면 화장실을 자주 가게 돼야 한다고 하나·”
“안 그래도 식품영양학과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해봤단다· 아마 수일 내로 확답을 들을 수 있겠지·”
“좋은 소식이네요· 작은 알약이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낫겠지만 말이야·”
학교에서도 여자애들은 화장실 간다고 하면 다 같이 우르르 몰려다녀가지고 정말 부끄러워 죽겠다·
옛날에 캡슐에서 마나포션을 기체로 흡입했을 때를 생각하면 그보다 편리할 수가 없겠지만 역시 효율성의 문제 때문에 하루 복용량을 채울 수가 없겠지·
“친구 어머니를 치료해줬다고 들었다· 내가 병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듣기로는 불치병이라고 하던데 그런 마법은 어디서 또 배웠어?”
“아아아 그게 음··· 대한신경과학회 논문을 보면서 알게 됐어요· 미국에는 이미 치료가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다고 얼핏 들어서···?”
“그래? 그런데 네가 쓴 5서클 마법 ‘아카식 레코드’는 분자 프린팅 할 때나 쓰는 재료공학마법이 아니었니?”
“무슨 말씀이세요? 아카식 레코드는 단순한 3D 프린터 따위가 아니에요· 분자의 구조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똑같은 물질을 반영구적으로 생성해낼 수도 있고 어디까지나 가역마법이기 때문에 역반응도 쉽게 만들어 낼 수가 있고 동물의 호르몬처럼 특정 수용기에만 작용할 수 있도록 생체물질의 역할도 해낼 수 있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이론상 만능···”
혼자 너무 떠들었나 싶어서 잠깐 말을 멈추고 눈치를 봤다·
“계속해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조금 부끄럽네요·”
“그래도 즐거워 보이는구나· 나메가 마법 이야기를 할 때는 말이야·”
더 말했다가는 낯이 뜨거워질 것 같아서 에둘러 주제를 돌렸다·
“유나네는 만나 보셨나요?”
“네 친구는 집에 가서 못 보고 오빠 두 명은 만나 봤었다·”
“두 명? 아 유나의 큰오빠도 왔나 보네요· 제가 있을 땐 없어서요·”
“너한테 정말 고맙다는 얘기만 하더구나· 네가 쓴 마법에 대해서는 일부러 말 안 해줬다· 너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맞지?”
“감사해요··· 유나네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니까요·”
“그래 보이더구나·”
“어디까지나 선의로 도와주는 게 아니라 유나라면 분명 훌륭한 마법학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을··· 그렇다고 교수님께 떠넘기려는 뜻은 아니에요! 제가 다 벌어서 갚을 테니까-”
“네가? 어떻게 벌 생각인데?”
“그 전처럼··· 인터넷 방송으로···”
“그래?”
“혹시 얼마나 나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맞춰보겠니?”
“한 600만원···? 아니 700? 800? 설마 더 많아요?”
“안타깝게도·”
“천만원···?”
“천만원하고도 81만원이란다·”
“말도 안 돼요! 아카데미 혜택이 있을 텐데 천만원이 넘게 나온다는 게!”
“나도 집에 가봐야 자세히 알겠지만 공공장소 무단사용으로 감면 세율이 절반으로 준 것 같구나·”
“천만원··· 천만원···”
천교수가 넉살 좋게 웃어넘겼다·
그래 교수님께는 큰 돈이 아닐지 몰라도 내가 갚기로 마음을 굳힌 이상 타협할 여지는 없었다·
“제가 무조건 갚을 거예요· 이자까지 확실하게 쳐서 드릴게요·”
그럼 갚아나가야 할 원금이 총 1093만원·
순간 시아가 내게 했던 약속이 뇌리에 스쳤다·
[브이튜브는 분기마다 수익 신청을 해가지고 나중에 3월 말에 네가 출연한 몫까지 보내줄게·]
그래·
나는 곧바로 폰을 켜서 브이튜브 조회수를 확인했다·
그녀와 함께 했던 판으로 올라온 영상이 총 5개 조회수는 대략 20만에서 50만 사이였다·
하지만 조회수만 가지고는 수익이 얼마나 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추정치를 계산하는 사이트에 들어가 링크를 입력했다·
[기간 필터: +1812618 views / + $2517 ~ $2832]
대략 500에서 550만원 사이·
세금을 떼고 시아와 반으로 나누어도 최소 200만원은 가져갈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래도 900만원 가량을 더 벌어야 한다는 암담한 처지였다·
하지만 나는 트위시 방송을 주기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시청자들이 원하는 게임 방송 컨텐츠도 없었기에 구독자는 간신히 네자리수에 머물고 있었다·
잠시 고민이 됐다·
확실히 내 특기를 살려 챌린저까지 다는 조건으로 롤 방송을 한다면 시청자는 끌어모을 수 있겠지만 대신 다른 방들과 차별점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게임을 하면서 채팅을 보는데 익숙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롤이라는 게임을 계속하기 싫었다·
‘차라리 월오아라도 해 봐?’
분명 롤보다도 인기가 많은 게임이라 그랬지·
하지만 월오아 방송에서 도대체 어떤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분명 마법도 쓸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선택지였지만··· 이건 나중에 시아나 다른 이들에게 자문을 구해봐야 했다·
똑똑
“네 들어오십시오·”
입원실에 문이 열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의 남성이 들어왔다·
“오오 아까 그 청년이구나· 인사하러 왔니?”
“네 또 뵙게 되었습니다·”
“그럼 난 이만 자리를 비켜줄 테니 둘이서 이야기 잘 해보렴·”
“네 어디 가시는데요?”
“잠깐 앞에 전복죽이라도 사가지고 올 테니까 배고파도 좀만 참으렴·”
천교수가 끄응 소리와 함께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청년은 그에게 가벼운 묵례를 했다·
아 어디서 본 얼굴인가 했더니 유나 오빠 서노을과 똑같이 생겼다·
그런데 190의 장신인 서노을과 달리 그의 키는 175로 평범한 축에 속했다·
“안녕· 유나의 큰오빠 서마루라고 해·”
이쪽이 첫째라고···?
“네 안녕하세요·”
“너무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지? 미안해· 네가 깨어나면 알려달라고 아버님께 꼭 부탁드렸거든·”
“아··· 아버지가·”
천교수님도 내 양아버지니까 아버지가 맞긴 하지· 이렇게 불리니까 되게 낯간지럽다·
“여기 앉아도 돼?”
“네네 편히 앉으세요·”
서마루는 빈손으로 입원실에 오지 않았었다·
“요즘 애들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가 건네준 물건의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어본다·
“이건···?”
뭐지?
정체를 모르겠다·
단순한 인형은 아닌 것 같고·
30cm 길이의 음표같이 생긴 물건 그리고 머리 부분에는 귀여운 두 눈과 입이 달려 있었다·
“사실 아버님이 네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추천하셔서 샀어· 이건 오타마톤이라는 악기야·”
“이게 악기예요?”
피아노 첼로 바순 같은 보기만 해도 웅장하게 생긴 것들이 악기가 아니었나?
어쩌면 내가 ‘악기’라는 용어에 대해 혼동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진짜 악기야·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게· 이렇게 한 손으로는 머리 부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막대를 잡는 거야· 그리고 소량의 마나를 흘려주면 이렇게·”
[아아~ 아아아~]
“···!!!”
음표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서마루는 만족스레 웃으며 다른 사용법도 내게 알려주었다·
“흘리는 마나의 성질에 따라 내는 음도 달라· 수계 속성의 마나를 흘리면 여자 소프라노 목소리가 지계 속성의 마나를 흘려보내면 남자 바리톤 목소리가 나오지· 어때 해볼래?”
“네 해볼래요·”
이건 정말로 내 인생을 통틀어서 신기한 물건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요뜨_614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오후 7시에 새로운 에피소드로 찾아뵙겠습니다!! 수요일은 원래 휴재이지만 이번 주는 99·8%의 확률로 문을 열 예정이니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쿠파님 222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다음 해에도 최근 1년 간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재밌는 작품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연재해나가겠습니다!! 222라는 숫자는 만년 콩라인인 서유나를 암시하는 걸까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 요즘 유행하는 콩댄스를 모르는 게 참 아쉽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후원해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AI 일러스트 전시관]에 후원자님들의 성함을 직접 그린 ‘유시아’에 새겨놓았으니 나중에 시간 나실 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마나인방’에 플러스가 달렸습니다· 그동안 저는 욕심 없이 완결에만 집중하겠다는 목표로 자유연재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찾아와주셔서 플러스를 응원해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더 많은 손님들이 맛집에 찾아와주시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있었기에 이렇게 플러스를 신청했습니다·
항상 과분한 사랑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맛있는 요리로 찾아뵙겠습니다·
그 와중에 큰일이 하나 생겨버렸는데 <에피소드 4 – 심해 저격러> 편에서 언급된 89만 구독자 버튜버 ‘아이리’라는 인물과 동일한 이름으로 3일 전에 실제로 데뷔를 하신 분이 계셔서 이름을 수정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변동 사항이 있으면 추후 공지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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