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일어날 수 있겠니?”
“···”
이제 막 잠에서 깬 참이었다· 새하얀 병실 커튼 백색의 간호사·
반복적인 일상을 깨뜨리고 나온 사회는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무리였다·
며칠 전에는 설아의 장례식도 치렀던 것 같은데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있어서 어지러울 거야· 괜찮으면 언니 손 잡고 갈까?”
끄덕·
이상하게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로 대체했다·
가상현실에서는 생각만 하면 저절로 말을 할 수 있는 느낌이었는데 현실은 뭔가 한단계가 더 있는 느낌? 입을 벌리지만 내가 생각하는 말들은 목구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병원· 귀찮은 것을 강요하는 지루한 공간· 아이의 몸이라서 그런지 지루함은 견디기 꽤나 어려운 감정이었다·
몸을 배배 꼬아도 보고 눈알을 열심히 굴려 환자들의 수를 세어보기도 하며 지루함을 달랜다·
“103cm에 15·8kg이라··· 이거 원 다섯 살 아기보다도 못하네요·”
의사가 간호사에게 차트를 넘겨받으며 중얼중얼거린다·
그 뒤로도 재미없는 검사들이 쭉 이어졌다·
한쪽 눈을 가리고 모양을 맞춘다던지 커다란 곰돌이 인형을 꽉 안아보기도 했다·
숨을 잠깐 참으라니 요즘 흉부 X-선 검사는 곰돌이 인형이 해주나? 아이친화적이다·
한번의 꿀맛같은 단잠을 맛보았기 때문에 하루에 6시간도 못 자던 내가 이제는 12시간씩 자고 일어나도 또 졸렸다·
내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고개를 까딱거리는 사이 어느새 내 보호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옆에 앉아 의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의사는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나갔지만 옆에 아저씨는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면 원래 저런 표정인가· 인상이 워낙 험악해서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진찰이 끝나면 언제나 마지막 순서는 약국이었다· 이건 내 상식과도 얼추 맞는 점이었다· 세상이 워낙 신기해서 말이지 뭐가 상식이고 아닌지 헷갈리는 부분이 많았다·
“앞으로 매일 이걸 마셔야 한다는구나·”
아저씨는 나에게 ‘포X리 스X트’와 매우 닮은 음료를 건넸다· 캔 뚜껑도 따줬네· 친절도 하셔라·
아 이거 먹어본적 있는 맛이다·
포X리는 당연히 아니고·
캔 뒷면의 영양성분표시정보를 보니 역시나였다·
매일 식사 대용으로 먹던 마나포션· 현실에서도 역시 파는구나 싶었다·
“맛있냐?”
맛있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한 수준이네· 딱히 코멘트를 달지 않았다· 내 무반응에 아저씨도 크게 개의치 않아한다·
“너 이제 갈 데가 없는데 어카냐· 큰일났다·”
유사 포X리를 다 먹으니 아저씨가 가져가서 쓰레기통에 버려주었다· 버리기 전에 찌그러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래 난 갈 곳이 없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진짜 꽉 막힌 새끼들 같으니라고· 뭐 국가에서 분류한 공식 테러 피해자가 아니라서 지원이 안돼? 보험료가 어쩌구 지원자격이 어쩌구· 생체칩도 없어서 한국 국민인지도 잘 모르겠다네· 염병 엄마가 한국인이면 당연히 딸도 한국인이지·”
어쩌다 나라가 이렇게 됐을까· 아저씨의 푸념은 상당히 오래갔다·
중간중간 사투리 때문에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요지는 설아의 지원금으로 나온 비용이 전부 장례비와 내 입원비로 빠져 나간 모양이었다· 이제 하루라도 더 병원에 누워있기만 해도 내 앞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청구되는 상황·
“에휴 네가 뭘 알겠냐· 불쌍하기만 하지·”
국정원이나 검찰 측에서도 손을 아예 뗀 상황·
나이가 나이인만큼 어차피 테러에 관해 아는 정보는 하나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발푸르기스는 이미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박멸했다고 선포를 해놨기에 이제 무르기도 애매한 상황· 국가에서는 그저 나를 테러 단체에 휘말린 어머니를 잃은 불쌍한 소녀1 쯤으로 보나보다·
그조차도 정식 국민이 아니라 최저생계비도 안 나오겠지만·
마범일 형사도 실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직업정신으로만 움직인 모양이었다·
말은 험악하게 하면서도 나와 맞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내 건강진단서를 걸어가면서 계속 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우리 집에 데려가서 지혜도 만나보게 해주고는 싶은데 말이다··· 법이라는 게 또 안 된다고 하나· 내 직장을 탓해야지·”
지혜는 아저씨의 딸 이름인가? 이름만 놓고 봤을 때는 아저씨와 대조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을 준다·
결국 요지는 나는 테러 피해자도 아니고 정식 국민도 아닌 어디서 흘러들어온지 모르는 불법체류난민에 가까운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차를 타고 산 너머 강 너머 달려 도착한 곳은 어느 외딴 고아원이었다· 시설은 매우 낡아보였는데 정문에는 정부마크까지 제대로 달려있는 인증된 기관이었다·
아저씨가 도착하기 직전 연락을 미리 넣어둔 탓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여성이 미리 마중나와 있었다·
“꼭 잘 좀 부탁드립니다·”
“예 걱정 마세요·”
“자주 들리겠습니다·”
“그런 말 하는 사람 치고 지키는 사람은 내 여기 25년 일하면서 하나도 보지 못했네요·”
상당히 시니컬한 성격이네·
마범일 형사와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마쳤다· 꽤나 짧은 인연이었고 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친절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한다·
“이름이 네임이라고? 거참 특이하네···”
“나메·”
아주머니가 신상명세서를 흘겨보며 말한다· 나는 곧바로 정정해주었다·
“노나메예요·”
* * *
결국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때가 탄 나의 종합건강진단서는 마지막에 와서야 내 손에 떨어졌다·
내가 이쪽 방면에서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도 종종 나왔지만 요약하자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 할 수 있겠다·
저신장 저체중은 기본이요· 이제는 신체 자체가 마나포션에 적응 수준을 넘어선 중독이 돼버려 포션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체내 밸런스는 완벽하게 망가진 상태· 근육은 진짜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만 붙어있어서 사실 걷는 것조차도 내게는 큰 정신력을 요구하였다· 수치로 보니 굉장하네 이거·
다행이라면 지능 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약간의 자폐성향과 언어장애가 있는 게 흠· 생각해보니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어려웠다·
아니 지금까지 제대로 마주친적이 있었나? 말을 못하는 문제는 차차 고쳐질 것 같아서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고아원 아주머니는 마범일 형사에 비해 되게 냉소적이고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 상태를 다 받아보고도 눈 하나 까딱 안 하는걸로 보아선 그냥 단순하게 편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역시 이런 무덤덤한 사람들이 사회복지분야에서 오래 살아남는구나·
[메를린 보육원]
앞으로 내가 지내게 될 장소였다·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복층 구조의 목재 저택· 방 하나하나가 정말 작았는데 이층 침대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준이었다·
나의 입소 수속을 끝마친 박영희 아주머니는(명찰 덕에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곧바로 나를 호실로 안내해주었다·
206호·
2층에서 가장 가쪽에 있는 호실이었다·
[황보영]
[백아린]
아주머니는 호실 옆에 붙어있는 이름표 중 위쪽 것을 떼낸다·
“보영이는 어제 1층 호실로 옮겨서 네가 이 자리를 쓰면 돼· 침대는 아린이가 1층 네가 2층이야·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다들 식당에 있어· 점심 안 먹었으면 와서 먹어도 되고·”
그 말을 끝으로 영희 아주머니는 훌쩍 떠나버렸다·
짐은 따로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사복도 마범일 아저씨가 사 주신 거고·
그렇다고 배고프지는 않은데·
시간이 붕 떴다· 아저씨가 준 포션을 하나 따서 먹어보려 했지만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캔과의 씨름은 제쳐둔 채로 방문 옆 전신거울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온전히 보는 게 지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병원에는 거울 하나 없었네·
7년 동안 자르지 않은 머리가 허리까지 닿는다·
가르마를 제대로 내지 않아 얼굴을 반쯤 가린 앞머리를 옆으로 치워본다·
숱이 많아서인지 유독 머리색이 새까맸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얼굴은 햇빛을 받지 못해 창백하기 그지 없다·
눈은 설아를 닮아서인지 작은 얼굴을 꽉 채웠다· 아니 그보다는 조금 옆으로 째져서 사나운 인상을 풍기는 것 같았다·
삼백안의 눈으로 거울과 눈싸움을 하고 있자니 약간 소름이 돋는다·
팔다리가 정말 얇다· 근육만 없는 게 아니라 이제보니 살도 무척 적은 편이었다· 새하얀 피부가 뼈의 굴곡을 따라 뒤덮고 있었다·
“누구···세요···?”
소심하게도 물어보는 어린 소녀가 문틈 사이로 속삭인다·
내가 멀뚱멀뚱 거울 앞에 서 있으니 소녀도 경계심을 조금 풀고 방에 들어온다·
“혹시 오늘 수녀님이 새로 온다고 했던··· 아닌가··· 아 맞아?”
수녀라는 사람은 아까 영희 아주머니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이름이 뭐야? 난 아린이라고 해· 백아린·”
“노나메·”
“나메? 그게 이름이야?”
끄덕
“나메는 엄청 작다· 나보다 어린 애가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서 신기해· 난 일곱 살인데 너는?”
일곱이라고 말하려는데 이번에도 목 끝에서 막힌다·
나는 할 수 없이 일곱 개의 손가락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준다·
“일곱살이라고? 거짓말!”
이렇게나 작은데?
아린은 제 키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아이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보였다·
“야 백상아리! 이제 방 혼자 쓰니까 좋냐? 내가 안 놀아줘서 심심하지는 않고?”
키 크고 보이쉬한 소녀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아린이 반응할 시간도 없이 그녀는 아린의 목에 제 팔을 감았다·
“아 보영 언니···”
“이쪽은 누구야? 아아아 오늘 새로 들어온다는 신입이구나? 반가워 반가워· 난 황보영이라 해· 너는?”
“···”
“응? 왜 말을 씹지? 괜히 묻는 사람 기분 나쁘게·”
“그···! 이름이 나메랬어· 그치 나메야?”
“우리 나메는 말을 잘 못하나? 아니면 나 기분 나쁘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아냐아냐 나메가 여기가 처음이라 긴장해서 그런 것 같애·”
“그래? 그럼 뭐 됐어· 둘이 쪼끄마하니 잘 어울리네·”
보영이 쌩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나랑 전에 같은 호실 쓴 보영 언니야· 5학년인데다가 무서운 선배들도 많이 알고 있어가지고 혹시라도 또 만나게 되면 잘 대해줘야 해·”
1층에서 그녀가 다른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가 초등부에서는 거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껏 아린이 제 나이와 안 맞는 보영이와 계속해서 같은 호실을 썼던 연유도 어쩌면 그녀가 무리에서 서열이 제일 낮아서였을 수도 있겠다·
지금도 아린은 그녀에게 강제로 빼앗겼던 1층 자리를 되찾아 방방 뛰며 기뻐하니 말이다·
여기가 무슨 황실도 아니고 아이들 정치질에는 끼고 싶은 추호도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초등학교 때는 어른들보다 언니 오빠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법이죠·
작 중 인물들은 모두 만 나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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