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
“아가씨 아카데미 생활은 어떻게 할 만하십니까?”
머뭇머뭇 눈치만 보던 운전기사가 먼저 어색한 정적을 깼다·
“네·”
“힘든 일은 따로 없고요?”
“네·”
그러나 하루의 단답과 함께 대화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끊겼다·
몸이 약하셨던 사모님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뒤로부터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명랑했던 아가씨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운전기사였다·
이 부회장님의 부탁으로 매번 따님을 직접 아카데미까지 데려다주는 실정이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상황의 진전은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저··· 아가씨?”
“네···?”
“아가씨 주위에는 언제나 도와줄 사람이 많으니까 정-”
“그런 말 할 거면 저 그냥 내릴게요· 오늘도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하교 시간 때 똑같이 여기 후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차에서 내린 소녀는 상쾌한 공기를 폐에 잔뜩 담았다·
그러나 생각만큼 가슴이 설레지는 않는 등굣길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이하루의 세상은 한순간에 흑백으로 물들어버렸다·
뭘 해도 재미가 없었고 뭘 해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런 하루가 유일하게 정을 붙일 수 있는 건 역시 아카데미 친구들밖에 없었다·
“안녕 하루찡! 미리 기다리고 있었지·”
전누리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작년에 같은 1학년 C반이었으며 하루와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하루는 그제서야 굳어진 표정을 풀면서 똑같이 인사를 건넸다·
“우와 자율주행이 아니라 운전기사를 쓰는 거야? 역시 삼진그룹은 뭐가 다르긴 하네!”
“그냥 아빠가 시켜서 그런 거야· 차에 둘이나 타면 얼마나 불편한데·”
“그래도 뭔가 로망이 있잖아·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재벌 언니들은 각자 운전기사 하나씩 있던데·”
“드라마니까· 실제로는 안 그래·”
어차피 누리도 장난으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대학병원장인 전누리도 아카데미 전체로 따지면 부자 측에 드는 학생이었다·
친구를 끼리끼리 사귀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의 격차 때문에 생기는 거리감이 싫었던 하루는 누리가 더 편하게 느껴졌던 면도 있었다·
“하루 근데 너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데?”
“으음··· 뭐라 해야 하지· 옛날엔 진짜 수다쟁이였는데 요새는 말도 많이 없어졌고 또··· 그래 시크해졌어·”
“시크···?”
그 말을 들은 하루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응! 겨울왕국 4에 나오는 레사 언니처럼!”
“나 그 영화 안 봐서 잘 몰라·”
“와 그걸 안 봤어? 레사가 누구냐면 엘사 여왕 딸인데 어릴 때부터 얼음 마법을 엄청 잘 썼던 언니거든? 엄청 예쁜데 절대 웃지를 않아서 궁전 사람들이 한번이라도 웃기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봤어·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스포 그만! 나중에 볼 거니까 더 이상은 안 돼·”
“아무튼 그 언니가 엄청 시크하게 생겼어· 항상 무표정인데도 엄청나게 멋지거든··”
“노나메처럼 말이야?”
하루와 누리가 시선을 교환했다·
누리가 끄응 소리를 내며 속으로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나메는 무표정이긴 하지만 그냥 시크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한 걸· 조금 복잡한데 하루 네가 쿨시크라면 나메는 큐티시크랄까?”
“큐티시크는 또 뭔데?”
“쿨의 반대는 핫이니까 핫시크라고 해야하나? 근데 그러면 말이 이상해 핫식스 같잖아! 헤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런 거지 뭐·”
누리는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대며 웃었다·
하루는 그녀의 기분에 어울려주려고 어색하게 따라 웃어보였다·
갑자기 나온 나메의 얘기에 누리는 또 다른 얘깃거리가 떠올랐다는 듯이 맞잡은 하루의 손을 빙빙 흔들었다·
“요즘 나메한테서 되게 좋은 향기 나더라! 향수 뭐 쓰는지 물어볼까? 옆 분단인데도 자꾸만 신경 쓰여서 수업에 집중을 못하겠어·”
“맞아 내 쪽까지도 사과향이 나긴 했어·”
“그치? 너도 맡았구나· 그냥 사과가 아니야· 설탕하고 꿀에 듬뿍 절인 엄청나게 단 사과향이야·”
“그런 것까지 알아? 완전 개코네?”
“내가 좀· 안 그래도 우리 엄마한테서 그런 말 자주 들었거든!”
“아··· 응··· 엄마한테서···”
“어? 왜 그래? 어디 아파?”
별생각 없이 꺼낸 누리의 말에 하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진 하루를 보고 누리가 걱정된다는 듯이 살폈다·
삐이이익-
‘또야···’
머리를 어지럽히는 소리가 귀에 울려댔다·
원래라면 이렇게 크게 들리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유독 참기가 힘들었다·
하루는 잠시 거리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삐이이이이익-!
“아흑···!”
“하루야! 괜찮아?”
점점 커지는 이명소리와 함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당황한 나머지 누리가 빠르게 물었다·
누리가 알기로는 하루는 원래도 건강하고 활기찬 아이였어서 이렇게 느닷없이 쓰러지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이하루!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냐· 안 아파··· 소리··· 내 귀 좀 막아줘·”
“귀? 이렇게?”
“그래도 아파··· 계속 들려 소리가·”
하루의 애절한 부탁에 누리가 엉성하게나마 그녀의 두 귀를 손으로 막아줘 봤지만 소용이 없는 듯했다·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 누리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구급차라도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때마침 반 친구들이 같은 길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헤이 누리! 그리고 그 옆에는 당연히 하루쓰겠지? 거기 앉아서 뭐 해?”
서리와 지혜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오는 유나와 나메도 있었다·
“안녕 얘들아··· 근데 지금 하루가 많이 아픈 것 같아서 말이야···”
“하루가 아프다고? 하루야 너 괜찮아?”
서리가 쏜살같이 달려가 하루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구급차라도 불러야할까 고민 중이었어··· 하루는 계속 괜찮다고 하는데·”
“그래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지혜가 소심하게 의견을 전달했다· 유나는 이 상황 자체가 떨떠름한지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다·
“잠깐만 나와볼래?”
결국 보다 못한 나메가 나섰다·
“이하루 어디가 아파? 머리가 아픈 거야?”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제발···”
하루가 고통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서 있는 곳은 대로변도 아니고 조용하기만 한 장소였다·
[2서클 시전: 진단]
마법까지 사용해 그녀가 아픈 원인을 찾아보려는 나메였지만 별 소득조차 없었다·
나메가 고개를 내젓자 아이들의 표정은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괜찮아 생각이 있어·”
그럼에도 나메는 당황하지 않고 후들거리는 하루의 몸을 두 팔로 꼬옥 감싸 안았다·
별안간 그녀의 몸에서 황금빛 오러가 흘러나와 온몸을 뒤덮었다·
흑백이었던 세상이 갑자기 밝아지는 느낌에 하루가 눈을 떠보았다·
삐-
듣기 싫었던 환청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하루의 몸에 맴돌자 그녀의 안색이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상태를 확인한 나메가 식은땀으로 젖은 하루의 앞머리를 옆으로 정리해주었다·
“조금 졸릴 수도 있을 거야· 잠이 오면 그냥 자도 돼· 우리가 반까지 데려다줄게·”
그녀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이 아늑한 보금자리처럼 느껴져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과향···’
하루는 아까 누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향기였음을 눈치 챘다·
계속 맡고 있자니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고 머리도 맑아졌다·
‘하늘이 파래···?’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푸르른 하늘이 배경으로 깔린 것을 목도했다·
알 수 없는 이 평안하고 뭉클한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서 하루는 나메에게 손을 뻗었다·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 * *
정말 하루종일 졸음이 쏟아지는 날이었다고 하루는 생각했다·
수마와의 싸움에서 이겨낸 하루는 점심을 먹고 또 몰려오는 졸음과 씨름을 하느라 고생이었다·
다행히도 5교시가 체육에 6교시는 시간표가 갑자기 수학에서 미술로 바뀌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안 듣느니만 못한 상태로 수업을 들을 뻔했다·
체육시간은 수행평가 기간이 아니면 언제나 피구로 대체되었다·
한반에 20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보통의 체육시간은 두 반이 동시에 진행되곤 했다·
남자 아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피구에 참여하였고 여자들은 절반 정도만이 그러했다·
체육관 농구 코트 뒤쪽 한구석에서 나메가 벽에 기대앉아 눈을 붙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유나와 같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터였는데 오늘만큼은 그녀가 서리에게 강제로 끌려가 버렸는지라 혼자였던 것이다·
또한 누리도 학부모 상담 때문에 체육관에 없어서 하루 또한 심심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루는 가만히 앉아서 나메만을 지켜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노나메라는 인물은 하루에게 있어서 ‘신기한 아이’였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반 아이들 모두가 동의할 말이었다·
웬만해서 1학년 정식 입학시험 외에는 중간에 전학생을 받지 않는 세피론 아카데미가 스스로 원칙을 깨부술 정도로 들여온 아이였다·
전학 첫날부터 그걸 입증하는 듯 반 아이들의 이름을 듣자마자 단 한 번에 외워버렸다·
뿐만 아니라 적성 평가는 어떤가·
아카데미에서밖에 배울 수 없는 내용뿐만 아니라 한참 뒤에 나올 부분까지도 출제된 악명 높은 시험에서 그녀는 보란 듯이 100점을 맞았다·
아카데미 2학년 중에서는 가장 몸집이 작아 1학년 아니 그보다 어리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지만 그녀가 사뭇 풍기는 분위기는 어른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에 대해 ‘신기하다’라는 평 외에는 딱히 내세울 만한 수식어가 하루의 머릿속에는 적어도 없었다·
하루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나메의 옆으로 다가왔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아마도 자신처럼 피곤했는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거리라·
하루는 이 기회를 살려 나메를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귀엽당···’
전체적으로 빼짝 마른 체형을 가진 나메였지만 볼에는 젖살이 남아있어 몸만 큰 아기처럼 보였었다·
가끔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입꼬리를 씰룩거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아 꿈을 꾸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며칠 전부터 나는 진한 사과향을 맡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랑도 친구 해주겠지?’
하루는 나름 작년에 반장도 해 보았을 만큼 여러모로 인기가 많은 아이였다·
본인도 이를 잘 인지하고 있었기에 앞으로도 친해질 기회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여 나메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기로 결심했다·
“야 공 날아간다 조심해!”
같은 반 박태현이 소리치며 그녀들쪽으로 주의를 주었다·
“어어···?”
고개를 돌려 날아오는 피구공을 확인한 하루는 그 궤적이 나메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주의를 주지도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메의 눈이 번뜩 뜨이고 이어서 팔을 옆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펑!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강당에 울려퍼졌다·
“···!”
“뭐야· 터져버렸네·”
아주 걸레짝이 되어버린 피구공을 보고 나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남자아이들에게 넝마가 된 공을 직접 들고 가서 사과의 뜻을 전했다·
“미안·”
“아 아냐· 공은 또 있으니까·”
“쌤한테 혼나면 어떡하지?”
“창고에서 조용히 하나 꺼내면 모르실 거야·”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메는 똑같이 벽에 기대고 상념에 빠졌다
“어떻게 한 거야?”
하루가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모르게 오러를 써버렸네· 상상하고 현실을 순간 헷갈려가지고·”
“자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나 안 자고 있었는데·”
하루의 얼굴이 급격하게 빨개졌다·
그녀를 몰래 뚫어져라 쳐다봤던 게 들켰으면 어떡하지?
괜한 마음에 하루는 나메에게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상상하고 있었는데?”
“단검으로 1대100 하는 상상·”
“···?”
하루의 나메에 대한 사전에 ‘엉뚱하다’라는 단어가 새로이 등재된 날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전에 유나한테 명존쎄 당한 그 이하루 맞습니다··!!
달의눈물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인생픽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재밌게 읽어주셔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독자님들께서 해주시는 응원의 말씀들은 모두 작가의 자존감 치료제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에 힘입어 더욱 발전된 필력의 소설로 보답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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