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
‘진짜 선생님인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원래 이 시각은 포션을 복용할 때였다·
유나는 공기놀이를 하며 반 아이들과 적당히 잘 어우러지는 것 같아서 안심하고 플라스크도 같이 씻을 겸 화장실에 왔다·
그런데 한번 아토마이저로 담배 피우듯 마셔버리니까 다시는 이 액체를 마실 자신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
조금 늦은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제라도 내 혓바닥의 안위도 챙겨야겠다 싶어서 한 번 더 마법을 쓰기로 했다·
때마침 화장실 환풍기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의자를 타고 올라가 거기서 몰래 연기를 밖으로 내빼기로 했다· 그럼 냄새도 덜 나겠지·
들킬 염려가 하나도 없는 완벽한 작전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가 내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거 전자담배 아니야···? 우리 나이에는 담배 피우면 안 돼·”
하루가 내 손에 들린 물건을 지적했다·
“여기 플라스크 안 보여? 담배가 아니라 내가 먹는 포션이야·”
처음에는 유나가 건네준 빈 볼펜으로 엉성하게 만들었었지만 요즘에는 꽤 요령이 생겨서 진짜 전자담배처럼 보이긴 했다·
굳이 플라스크랑 직접 연결할 필요도 없이 용액만 보충하면 되는 식으로 만들었으니까·
“포션을 왜 그렇게 먹어?”
“포션이 맛없으니까·”
“맛없으니까?”
“저번에 유나 못 봤어? 이거 생각보다 엄청 맛없거든·”
처음에 먹었을 때 포카리 스웨트라고 생각했던 건 역시 내 미각에 문제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때는 뭘 먹어도 다 밍밍했는데 그냥 신체가 정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서 냄새도 잘 느껴지고 단맛 이외의 맛들도 어느 정도 분별이 되었는데 몸이 조금씩 회복단계에 들어섰다는 좋은 징조였다·
다만 포션이 점점 역하게 느껴지는 반작용을 수반했지만·
그런데 얜 또 왜 이렇게 떨지? 확실히 창문이 열려 있어서 차가운 바깥 공기가 들어오긴 했다·
“아무튼 선생님한테는 안 이를 거지?”
“응 안 이를 거니까 내보내주면 안 돼?”
“그래? 그러지 뭐·”
[역시전: 회전운동]
철컥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다시 열렸다·
“반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복도에서 얘기 좀 하지 않을래?”
“나랑? 무슨 얘기?”
“그냥 뭐 이런저런 학교생활에 대해서· 난 전학생이라서 아카데미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거든· 네가 작년에 반장도 했다면서· 이번에도 반장선거 나갈 거 아니야?”
“응· 뭐··· 그렇지· 설마 나메 너도 나갈 거야···?”
“아니? 내가 귀찮게 그런 걸 왜 해?”
“후우 다행이네·”
하루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물며 조별과제의 조장도 질색하는데 그런 성가신 직책 따위 나는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반장선거를 왜 이렇게 늦게 해? 4월 초순에 하는 학교는 처음보네·”
이미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나뭇가지에 푸르른 잎사귀가 돋아나고도 남은 시기였다· 복도 창문을 타고 들어온 산들바람이 우리들의 머리를 흐뜨러뜨리고 도망쳤다·
“대신 한 달 동안 친구들이랑 친해지면서 누가 반장에 어울리는지 잘 알 수 있잖아· 공부만 잘한다고 책임감까지 있는 건 아니니까·”
“확실히 시후나 유나같은 애들이 반장을 맡으면 좀 그렇긴 하지·”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서유나는 맨날 자기밖에 모른다니까? 내가 작년에 나름 같은 반이라서 열심히 챙겨주려고 말도 걸어봤는데 오히려 날 때리기까지 했어! 여기에 일주일 동안 멍들었을 정도로 진짜 아팠는데··· 나메는 아무것도 모르는 전학생이니까 유나가 계속 너한테 친한 척 구는 것 같은데 걔랑 친하게 지내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음··· 그렇게 생각해?”
“응! 게다가 이깟 재미도 없는 공기놀이···인지 뭔지 이겨보겠다고 이 악물고 하는 걸 네가 봤어야 해· 봐봐 나 여기 손등 다 빨개졌다?”
하루가 손바닥이 바닥으로 향하도록 두 손을 내밀었다·
아픔에 공감해달라는 요청이었다면 안타깝게 됐다·
“하루야 이리 가까이 와볼래? 볼 좀 이리 줘 봐·”
“왜? 내 볼에 뭐 묻었어?”
“응 아마도?”
하루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딱 알맞은 높이였다·
그녀는 내가 얼굴에 묻은 것을 떼준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살포시 감는 것이 아닌가?
떼주는 건 맞지· 그녀에게 깃들어있는 무례함을 떼줄 것이다·
그녀의 작은 볼때기를 확 꼬집어 당겼다·
“아야야야! 느 므흐느 그으(너 뭐하는 거야)!”
“뒷담은 당사자 앞에서 말할 게 아니라면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공기놀이는 나름 내가 작심하고 알려준 건데 재미없다고 하니까 조금 속상하네·”
“이그 즘 믄즈 느크(이거 좀 먼저 놓고)!”
“어? 얼굴에 힘 안 빼 이하루? 힘 주면 더 아프다니까?”
내가 작으니까 아주 그냥 만만해 보이지?
왕년에는 제국의 삼공작들도 내 앞에서 빌빌 기어댔는데 말이야·
자꾸 하루가 내게서 벗어나려고 하길래 아예 오러를 써서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바닥에 넘어지면서 혹여나 다치지는 않도록 겨드랑이를 부축하며 조심스럽게 복도에 무릎을 꿇렸다·
“뒷담화를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너를 위해서이기도 한 거야· 하루가 유나한테서 짜증이 난 부분이 분명 있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걸 들어주는 내 입장에서는 네가 아무나 막 험담하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
“으으·”
“내가 나중에 하루랑 친해져도 ‘아 얘는 나한테 조금만 화난 일이 생겨도 뒷담하는 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그럼 나한테 충분히 신뢰를 못 얻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안 해?”
“그렇게 생각해···”
하루가 침울해진 기색으로 대답했다·
“이상하네· 우리 유나가 조금 건방진 면이 있어도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함부로 때릴 만한 애가 아닌데· 진짜로 유나가 그랬던 거야?”
“너도···”
“응?”
“너도 방금 유나보고 건방지다고 했잖아!”
“난 유나 앞에서 당당하게 너 좀 건방지다고 말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해도 유나는 헤실거리는 웃음만 지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 모르겠어 잘 기억이 안 나·”
“그럼 내가 나중에 유나한테 한번 물어보지 뭐· 그때 네 잘못이 있으면 유나한테 사과할 거야? 물론 유나가 너 때린 것도 내가 확실히 사과시킬게·”
“아니 절대 물어보지 마!”
갑자기 하루가 내 손목을 휘어잡으면서 애걸복걸했다·
“왜?”
“제발· 그냥 지금 유나한테 가서 사과할게·”
“유나한테 욕했어? 아니면 뭐 뒷담한 게 걸렸다던가···”
“아니··· 아니야 그냥···”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잖아·”
진짜 뭘 했길래 일곱 살짜리 아이가 명치에 주먹을 휘두를 정도로 화가 났을까·
친구의 가슴을 후려친 유나가 대단한 건지 애를 그 지경까지 화를 돋운 하루가 대단한 건지···
“어차피 양쪽 말을 다 들어야 하는 사안 같네· 유나하고 하루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내가 잘 얘기해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리고 볼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한쪽 얘기만 듣고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내막을 알 수가 없다·
원래 가해자는 잊어버려도 피해자는 그 순간을 평생 기억하는 법이겠지·
하루가 유나에게 맞은 사실을 두고두고 곱씹는 것처럼 아마 유나에게도 그런 일이 분명 있으리라·
손등뿐만 아니라 빨개진 하루의 볼을 보니 가슴이 메어왔다·
“또 뭐하려고···!”
“손 얼굴에 잘 포개고 있어봐· 안 아프게 해줄게·”
[시전: 조직 재생]
그래서 사용한 게 또 조직 재생 마법이다· 요즘 들어 정말 자주 쓰는 것 같네·
아예 이럴 거면 스크롤로도 하나 장만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빨개진 피부가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하루는 신기한지 양손을 번갈아 쳐다보고만 있었다·
“반으로 안 가?”
슬슬 수업시간이 끝나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때까지 반에 없으면 선생님께서 찾으실 것 같아서 얼굴이라도 비추어야 했다·
그런데 하루는 계속 복도에 무릎 꿇은 채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되돌아가서 이유를 물었다·
“많이 아팠어?”
엄살이 심한 아이인가· 그렇게 세게 꼬집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미안해··· 나 사실··· 유나한테 진짜 나쁜 말 했어·”
“왜 울어 갑자기?”
“유나한테··· 아빠도 없는 왕따라고 했어···· 나 나메랑도 짱친 맺고 싶었는데··· 그 말 들으면 너도 나 싫어하게 되잖아··· 나메도··· 그··· 입양 됐으니까···”
하루가 양 입술을 꽉 깨물며 고백했다· 눈물을 이 악물고 참아내는 모양새였다·
내가 입양아인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반 아이들하고 말 한마디도 안 섞는 유나는 당연 아닐 테고· 어린 애들이라도 정보력은 무시할 게 못 됐다·
“유나가 화낼 만 했네· 그래도 하루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유나도 분명 받아줄 거야·”
“넌 아무렇지도 않아···? 화 안내?”
“나도 그런 말을 들으면 화나겠지· 하지만 하루는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 아니었어?”
“맞아···”
“그럼 간단하잖아· 네가 사과하면 되고 나는 그 사과를 받아주면 되는 거고· 나도 하루같은 인기 많은 애가 친구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간단한 일이다·
이 간단한 걸 못 하는 족속들을 떠올리면 속에서 열불이 끓어오를 정도로 간단하지·
“바닥 차니까 얼른 일어나자· 감기 걸리겠다·”
그녀를 일으켜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정작 하루는 내 다리를 부여잡으며 얼굴을 파묻었다·
“나··· 나 있잖아··· 진짜 그 말 하고 너무 후회했어··· 우리 엄마가 작년 겨울에 사고로 돌아가셔서 내가 그때 얼마나 심한 말을 했는지 알게 됐어 흐끅···! 다 내가 유나한테 그따위로 말해서 천벌을 받은 건가 싶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난 그래도 뒷담 거의 안 했는데···! 작년에도 서유나 챙겨주려고 한 건 여자애들 중에서 나밖에 없었다고··· 너무 억울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우으으···”
“하루도 많이 힘들었겠네· 그동안 하루 혼자 견뎌온 거야?”
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를 훌쩍이며 맹맹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흑···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어···”
말없이 하루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자니 그녀가 추가로 할 말이 더 있어 보였다·
“네가··· 내 볼 꼬집을 때 많이 아팠어· 나 살면서 엄마 아빠한테도 맞아본 적 없는데· 서유나가 때린 게 처음이었고· 너도···”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게·”
“화장실에서 나 놀래킨 것도 사과해 그러면···”
“응 그것도 사과할게·”
얘 은근 속에서 쌓아놨다가 터뜨리는 뒤끝있는 타입이었나·
결국 수업을 마칠 때까지 나는 복도에서 그녀를 달래줄 수밖에 없었고 종이 울리자마자 나는 그녀와 손을 맞잡고 부리나케 반으로 뛰어 들어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나메가 크레페를 유독 좋아했던 이유가 있었네요··!! 많이 건강해진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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