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6
※ 본 에피소드는 외전입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같이 미치지 않는 사람은 온전히 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이는 제국이든 성국이든 설령 마경이든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길거리에서 선량한 시민이 강도에게 칼에 찔려 죽어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승진을 하려면 직장상사나 귀족에게 뇌물을 주는 게 관례가 되었다·
온 가족이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으면 가장 막내 자식부터 노예상에게 팔아치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 모두가 절대로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세태를 규탄할 힘은 개개인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순응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시엘라 산맥에서 토끼 사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자신을 레이븐이라 소개한 남성도 그런 수많은 인간군상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혼란이 막심한 시대에 미친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도 자신 눈 앞에서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는 여인보다 더 미친 사람은 없으리라 확신했다·
“용을 사냥하겠다고? 자네 진심인가?”
“이번 침식을 잠재우려면 꼭 드래곤하트가 필요해·”
“허 말로는 누가 못하나· 자살하는 방법도 다양하다니까·”
남성이 콧방귀를 꼈다·
드래곤을 사냥하겠다는 뜻은 신살(神殺)의 위업에 도전하겠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그것도 단신으로·
토끼고기를 거침없이 뜯어먹는 여인을 보고 레이븐은 이내 관심을 끄기로 했다·
‘정신머리가 나간 여인이로군·’
태어나서부터 미친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레이븐이 알기로는 전자도 많았고 후자도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참혹한 전쟁과 ‘침식’이라는 재난의 생존자 대다수가 어디 머리에 나사가 하나씩 빠진 마냥 행동했으니까 말이다·
그 와중에 여인의 외모는 레이븐이 평생 본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워서 시선을 거두려고 해도 눈길이 조금씩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별 문제 없었나? 누가 귀찮게 했다든지···”
레이븐이 하는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이었다·
지나치게 뛰어난 외모는 오히려 난세에서 극독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젠의 동쪽 지역은 황제의 힘도 닿지 않는 무법지대였다·
힘만 세고 무식하기만 동쪽 오랑캐들에게 겁탈당하고 생매장당한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아무리 서러워도 제 몸을 지킬 힘이 없다면 험한 꼴을 당하는 게 현실이었다·
“내가 약해보여?”
“거 무력에는 자신 있나?”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았거든· 잘 먹었어· 여기 토끼 고기가 참 맛있네·”
여인이 뼛조각을 모닥불에 퉤하고 뱉었다·
레이븐은 장작을 더 쑤셔 넣으며 사그라드는 불길을 다시 살렸다·
뒤늦게 남성도 토끼 뒷다리를 집어 한입 베어먹어보려고 했지만 이내 인상을 격하게 찌푸렸다·
“역시 미친 게로군·”
마기에 오염된 고기·
적당량이면 먹어도 무방했지만 이토록 마기에 절여진 수준은 가열해서 그 쓴 맛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결국 오늘 저녁은 굶어야하나 고민하는 레이븐의 시선이 조약돌을 잘그락거리는 여인의 손으로 옮겨졌다·
“아까부터 그 돌 같은 건 뭔가?”
“이거? 공깃돌이라고 하는 거야·”
“공그끼또르? 들어도 모르겠다만·”
“내 고향의 재밌는 놀이지· 한번 볼래?”
촤르르-
그녀가 거친 흙바닥에 앉아 다섯 개의 조약돌을 던졌다·
로브 바깥으로 여인의 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드러났다·
곧이어 여인은 유려한 손놀림으로 조약돌을 던지고 받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재밌어보이지 않아?”
“당신은 별 게 다 재밌나보군· 확실히 거렁뱅이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놀이겠어·”
“굴러다니는 돌로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
레이븐의 빈정거리는 평가에도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돌을 나무 높이까지 던져보기도 하면서 재밌게 노는 여인에게 레이븐이 물었다·
“그 돌댕이들은 뭘로 만든 건가?”
“돌덩이라니 실례네· 이거 나름 비싼 물건이거든?”
“내 눈에는 그냥 단순한 돌조각 내지는 유리 조각으로 보이네만·”
“아티팩트야· 그것도 보관 아티팩트지· 각각의 돌에는 꽤 진귀한 보물들이 들어있어· 뭐가 들어있을지 궁금해?”
“호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보여줄 텐가?”
그동안 어둠에 가려 알아채지 못했지만 레이븐은 그것들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말대로 정말 아티팩트가 맞는 것 같았다·
“내 질문에 대답해줄 때마다 하나씩 보여줄게· 어때?”
“아는 선에서 최대한 답해보도록 하지·”
본능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달콤한 말에 빠져든 사냥꾼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승낙했다·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냈다·
“시엘라 산맥에 침식이 진행된 지 얼마나 됐어?”
“침식? 어느 걸 말하는 거지? 모든 동물들이 돌로 변해버리는 침식인가 아니면 모든 동물들이 마물로 변해버리는 침식인가?”
“기왕이면 둘다 알려줬으면 좋겠네·”
“전자는 잘은 모르겠지만 3년도 더 된 것 같고 후자는 정확히 20개월 됐구만·”
“20개월··· 알겠어· 도움이 되는 정보였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여인이 옅은 붉은빛을 띠는 공깃돌에 마나를 불어넣은 뒤 툭툭 건드렸다·
이윽고 공깃돌이 딸깍하고 반으로 쪼개지더니 간이 마법진 12개가 정십이면체를 이루며 발동되었다·
여인은 가운데에 손을 집어넣어 정체불명의 물건을 꺼내 모닥불에 비추어 보여주었다·
“이건?”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야·”
“이렇게 큰 게 전부 다이아몬드라고?”
레이븐이 감탄했다·
이런 물건을 보고 탐욕의 감정을 품지 않는 사람은 단언컨대 없으리라·
그야 반지에 박힌 보석이 손톱만하기는커녕 엄지발가락보다 커보였으니까·
여인의 말을 허언으로 치부하기에는 반지의 숄더와 마운트 부분이 상상 이상으로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이름은 아그네스의 눈물· 프라하인 제국의 현 황후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기도 하지·”
“화···화··· 황후?”
“처음에는 예뻐서 나도 끼고 다녔는데 사실 착용해보면 무지하게 무겁고 불편하기밖에 안 하더라·”
“농담 치지 말게· 그런 물건이 왜 자네한테 있나·”
여인이 레이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다음 질문도 부탁해도 되지?”
“···일단 들어봅세·”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레이븐은 잠시 침을 꼴깍 삼키며 분위기를 살폈다·
“동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은 어떻게 침식에 대응할 수 있는 거야?”
“그건 우리 주민들은 모두 마력기관 절제술을 받았기 때문이지·”
“오러하트를 말하는 거야?”
“오러하트보다 아래 붙어있는 작은 기관이라는데 자세한 명칭은 나도 모르네· 의사 양반이 멋대로 해주어서 말이야· 덕분에 마기가 옅은 곳에는 간단히 왕래해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았지·”
“훌륭한 의사였나보네·”
“더할 나위 없는 양반이었지·”
여인은 이제 두 번째 아티팩트를 꺼냈다·
이번에는 금으로 빛나는 도장이었다· 그 위에 정밀하게 조각된 불사조가 특히나 도드라졌다·
“도장이구만· 금으로 칠해진 게 한눈에 척 봐도 비싸 보이는군·”
“비쌀지는 잘 모르겠네· 팔릴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지? 팔리지 않는다니· 정 그러면 황금상에게 팔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 양반이 이걸 사줄까? 이거 옥새인데·”
“옥새? 내가 아는 그 옥새?”
여인은 다 타고 재가 되어버린 숯을 꺼내서 도장 바닥에 비볐다· 오돌토돌한 면에 검댕이가 잔뜩 묻었다·
귀중한 물건에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레이븐이 뒤늦게 말려보지만 여인은 끄떡없었다·
도리어 그녀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바닥에 펼쳐서 도장을 쾅 찍었다·
카이젠 제국의 단 하나밖에 없는 군주의 성명이 룬어로 새겨졌다·
옥새가 빛이 나면서 종이의 효력을 검증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다만 중간에 여인이 옥새를 다시 아티팩트에 담아버리면서 레이븐은 그 절차의 끝을 알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세 번째 질문· 해도 돼?”
“···”
“해도 돼?”
“해보게나··· 아니 해보십시오···”
레이븐의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 여인이 도른년인건 틀림없다· 그런데 하필 돌아도 제대로 도른년이라는 게 문제였다·
옆나라 황후의 반지에 이어서 아이로겐 황제의 옥새까지 나타나자 그제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니 까딱 잘못하면 오히려 이쪽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루 드래곤이 레어에 돌아온지 얼마나 되었지?”
“그걸 내가··· 아니 제가 어떻게 압니까!”
“사냥꾼인데 그것도 몰라?”
“대략··· 1년 반? 아니 많이 잡아도 2년은 안 되었을 겁니다··· 제 추측이지만·”
“근거는?”
“오크를 비롯한 몬스터의 서식지가 급격하게 바뀐 시점입니다·”
“훌륭한 추론이네· 도움이 되었어·”
레이븐은 아티팩트에 담긴 물건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꿋꿋이 세 번째 물건을 보여주었다·
“이건 봐도 뭔지 모르니까 설명해줄게· ‘천국의 열쇠’라는 건데 알펜하임 교황청의 보고(寶庫)에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
“그게 왜 당신한테··· 아니 정체가 대체 무엇입니까?”
“네 번째 질문이야· 그럼 블루 드래곤의 레어는 어디로 가면 볼 수 있을까? 슬슬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대답해주는 게 좋을 것 같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드래곤의 레어라는 게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알고 있지·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 빈 레어라도 본 적이 없어?”
“크흠··· 흠··· 십년 전에 자작 아드님 한 분께서 드래곤 레어를 찾아보겠답시고 병력을 꾸리고 들어갔다가 전멸당한 사례가 있긴 합니다· 여기서 북동쪽 방향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금 아쉬운 대답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자 이것도 정말 흥미로운 물건일 거야· 다른 거랑 다르게 훔치는데 꽤 애먹었거든·”
그럼 방금까지의 물건들은 길에서 주운 것이라도 되는 건가?
레이븐의 지적은 운 좋게도 목 끝에 걸려 여인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검붉은 빛으로 불길하게 발광하는 펜던트가 등장한다·
“마왕 알자하브의 것이야· 용도는 아직 모르겠지만 무척 소중한 거니까 이렇게 악을 쓰고 쫓아오는 거겠지?”
“저는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여기까지 왔으면 마지막 물건은 봐야 하지 알겠어?”
“그 이상은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저는···”
“앉아·”
여인이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러나 레이븐이 이를 무시하고 도망치려고 하자 여인은 그의 등허리를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뻥 차버렸다·
진흙탕을 한차례 뒹군 레이븐이 억울함을 표했다·
“저도 바쁜 몸입니다···! 숙녀분께서 야영장비도 없이 홀몸으로 시엘라 산맥을 건너신다길래 이렇게 고기도 구워주고 쉼터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다뇨!”
에스타샤 황녀의 검은 머리칼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그녀의 홍채가 금빛으로 밝게 빛났다·
“마지막 질문이야· 20여 차례의 살인과 강도강간을 일삼은 악명 높은 지명수배자가 이곳 시엘라 산맥에 숨어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 푸른 피의 반룡(半龍) 크레이븐 고든은 어디서 만날 수 있지?”
부모를 사냥하려면 새끼부터 찾아라·
제국이 황녀에게 저질렀던 악독한 수법 중 하나였다·
“말해줄 용의가 없나 보네·”
“····”
멀쩡한 사람이 시엘라 산맥에 거주하고 있을 리가 없다·
황녀와 사냥꾼의 시선이 교차하고 얽혔다·
크레이븐 고든의 전신이 비늘로 뒤덮이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명의 지명수배자가 서로를 향해 격돌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국보급 귀물들로 공기놀이를 했던 황녀 당신은 도대체··!!
카이젠 황실이 놀라고 알펜하임 성국이 경악하고 마왕이 직접 수배령까지 내린 이유가 있었군요!!
서른짤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단골손님들이 많아 너무 행복한 맛집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방문 부탁드릴게요··!! 나메도 화이팅!!
더불어 zakuti님의 소중한 추천과 댓글도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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