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7
“이야기를 안 해볼 수가 없습니다! 요즘 커뮤니티에서도 핫한 주제로 가져왔는데요 바로바로 ‘월드 오브 아르세리아’입니다!”
“갑분컨텐츠? 근데 월드 오브 아르세리아는 게임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무려 한국 PC방 점유율 2위를 선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이죠·”
“간만에 게임으로 힐링 좀 할 수 있는 걸까요···!”
하지만 우다연은 카메라 앞에서도 여전히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물리천문학부의 같은 과 동기 지성훈의 권유로 ‘힉스 스튜디오’에 입사하게 된 지 벌써 세 달이 되었었다·
한국의 대표적 MCN인 ‘레터박스’ 소속이었으며 과학·마법학 컨텐츠로 인기를 끈 145만 구독자 브이튜브 채널에서 그녀는 물리학 부문 컨텐츠 PD를 맡았다·
지난 달에 진행했던 ‘물수제비의 원리를 이용해서 인간이 강을 건널 수 있을까’라는 주제는 다연에게 악몽 그 자체로 남았었다·
롤러코스터 하나도 무서워서 타지 못했던 그녀는 중력가속도 내성 강화 훈련(g-test) 체험 덕분에 이와 관련된 모든 공포증은 강제로 극복하게 되었다·
“그냥 게임하는 거잖아요· 맞죠···?”
“왜 저를 못 믿으세요? 지난번에 물수제비도 나름 재밌지 않았었나요?”
“저 무서워 죽을 뻔했거든요!”
“아무튼! 다연씨가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서 이번 컨텐츠는 마음에 드는 걸로 준비해봤습니다·”
“벌써부터 불안한 거 있죠?”
다음 컨텐츠는 뭘로 할까 한창 고민하는 중 지성훈이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밀며 브이튜브 각을 본 것이다·
짐짓 당황할 뻔도 했지만 여기서 받아쳐주지 않으면 프로답지 못했기에 다연은 자연스럽게 성훈의 의도에 어울려주었다·
“이 게임 해본 적 있어요?”
“아뇨 그냥 가끔 브이튜브 쇼츠로 뜨는 것만 봤어요·”
“그럼 먼저 화제의 영상을 한번 시청하실까요?”
작업실에 형광등이 모두 꺼지고 빔프로젝터에 불빛이 들어왔다·
다연은 손톱을 아그작 깨물었다·
지성훈이 저렇게 음흉한 미소를 지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불안했다·
한국대 물리천문학부의 명실상부한 과탑이자 이론마법학과까지 복수전공을 해버리는 말도 안 되는 스펙의 초인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괴짜이기도 했다·
그가 신박한 컨텐츠를 물어다 준 덕분에 다연도 힉스 스튜디오에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이 항상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꽃다운 나이에 한강 한가운데에 빠져 익사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도 몰랐다·
이윽고 화면이 점등하고 화려한 금발의 여성이 나타났다·
보름달을 머금은 울창한 숲속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사의 검을 빼앗았다·
다시 십여명의 기사가 그녀를 에워쌌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전투 태세에 임했다·
‘우아아··· 대박···’
그녀는 현란한 몸놀림으로 기사들을 차례대로 격파시켜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유자재로 마법까지 시전하는 건 덤이었다·
사각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의 궤적을 바꾸었고 때로는 삼중 합동 마법진의 연산까지도 무리 없이 해내기도 했다·
화면은 다시 빠르게 넘어가 고풍스러운 서재로 인물들이 옮겨갔다·
NPC 하나가 비명을 꽥 지르며 천장에 처박히는 것으로 전투의 개시를 알렸다·
현실이라면 재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여인은 좁은 공간을 요리조리도 잘 빠져나갔다·
무엇보다도 다연은 보스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장면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4중 합동 마법진? 아니 5중인가···?’
영상이 종료하기도 전에 다연은 성훈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 게임에 마법 어시스트 기능도 있었어?”
“스크롤을 제외하면 없지·”
“진짜 대박이네·”
멋진 정장의 신사가 철퍼덕 쓰러지는 걸로 영상은 끝이 났다·
다시 밝아진 주변에 다연은 쨍한 눈을 한번 비볐다·
성훈이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 뒤 소감을 물어왔다·
“월드 오브 아르세리아가 이런 게임인 줄 상상도 못 했네요· 진짜 해보고 싶어지는데요?”
무엇보다도 캐릭터가 정말 다연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액션 영화에서 등장할 법한 가련한 여주인공이 도리어 학살극을 펼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직접 해볼 기회가 많지는 않을 거예요! 이번 컨텐츠는 체험보다는 분석에 가깝거든요!”
“분석?”
“방금 본 건 ‘노네임’이라는 스트리머 분의 플레이 영상이었습니다·”
“진짜 플레이 영상이었다고요? 뭐 티저 이런 게 아니라?”
아무리 자유도가 높고 어시스트 기능이 존재하는 가상현실게임이라고 해도 방금 그녀가 본 건 너무 규격 외로 비현실적이었다·
저런 재능을 왜 방송으로 썩히고 있는가?
저 정도 운동신경이라면 당장 진천선수촌에 가서 올림픽을 준비해도 되는 것이고 만약 현실의 육체가 따라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캐스팅 시간을 보아하건대 마법학 쪽으로 가도 대성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이번 컨텐츠는 노네임씨가 사용한 마법 분석하기입니다! 오늘부터 다연씨랑 저랑 같이 지겹게 볼 영상이기도 하죠·”
“얼마나 많은데 이걸 다? 아니 영상 길이만 봐도 몰라요? 게다가 전 마법진에 대해서는 성훈씨만큼 잘 모른다고요···!”
“사실 3회차까지 있는데 다연씨 생각해서 1회차만 가져온 거니까 더 이상의 투정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그리고 그냥 분석만 하면 재미없지 않을까요?”
“또 뭘 하려고 꿍꿍이를···!”
“만약 현실에서 똑같은 마법을 사용했을 때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지 저희 한번 계산해봅시다· 화이팅!”
무어라 태클을 걸기도 전에 성훈이 재빠르게 영상의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브레이크가 풀린 다연이 매몰차게 그를 몰아붙였다·
“진짜 우리 이걸로 할 거야? 그냥 지금이라도 찍은 거 지워버리고 다른 주제로 바꾸면 안 돼?”
“왜에? 재밌어 보이잖아! 방금 플레이 영상 못 봤어? 그 영상 달랑 하나만으로 벌써 100만 조회수야! 우리가 분석만 해도 최소 200만 조회수는 기본으로 먹고 들어가는 거라고·”
“그럼 왜 아무도 안 하는데?”
조회수가 보장되어 있는 컨텐츠를 다른 이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좋은 질문이야· 일단 노네임님이 쓴 마법들이 1서클 마법 치고는 너무 어려운 게 첫 번째 이유야·”
“1서클 마법? 방금 그게 다 1서클 마법이었다고?”
이미 여기서부터 다연은 쎄한 느낌을 받았다·
1서클 마법은 늦어도 중고등학교 때는 다 떼는 지극히 단순한 마법들이 아닌가?
보기만 해도 머리 아파지는 몇몇 복잡한 마법진들이 사실 다 1서클이었다고?
차라리 사칙연산만으로 KGSAT 수학 영역을 푸는 게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마법의 확장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지성훈이라도 이건 명백히 선 넘은 거지·
“그리고 개인이 혼자서 분석하기에는 양이 많다는 점도 한몫하지·”
“확실히· 사용한 마법만 100개가 남으니까·”
“그래· 중복된 것도 거의 없고 말이야· 그래서 이건 ‘핫이슈’가 아니라 ‘핫포테이토’야· 어떻게 해야 하긴 하는데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지· 까서 먹을 수만 있다면 잭팟이지만 너무 뜨거우니까!”
다연은 다시 성훈이 보여준 브이튜브 영상에 눈길을 돌렸다·
조회수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월오아가 미국 게임이었기에 외국인 댓글도 꽤나 많이 보이는 상황·
다시 말해 잘만 하면 힉스 스튜디오에서 외국인 구독자들도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계획이 있어? 나는 막막하기만 한데· 너는 대충 감이 와?”
“아니 하나도···?”
“그럼 어떡하게!”
“머리가 안 되면 발로 뛰기라도 해야지· 우리한테는 좋은 인맥과 학벌이 있잖아?”
요컨대 그의 작전은 할 일 없는 대학원생과 한국대학교 마법학부 교수들을 붙들고 그녀가 보여준 마법진을 분석하려는 취지였다·
원래 남이 해주는 밥이 가장 맛있는 법이라면서 성훈은 벌써부터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왠지 이번 컨텐츠도 유순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 다연이었다·
* * *
[스트리밍을 시작합니다: 0:00:01 – NoName]
[Just Chatting – 제목을 설정해주세요·]
[방송 시간 – 0:00:02]
[시청자 수 – 4]
-??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동안 어디 갔었어!!!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채팅을 칠 수가 있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노네임!
[방송 시간 – 0:01:24]
[시청자 수 – 439]
-유입속도 ㅅㅂ 뭐임?
-나만의 작은 불면증 치료제였는데!!! 내가 먼저 좋아했었는데!!!
-방송 한 번으로 월클 ㄷㄷ
-근데 이 사람은 왜 이제껏 물 들어올 때 노 버림?
-ㄴ물 들어올 때 배를 아예 부숴버렸는데요?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방송 시간 – 0:03:08]
[시청자 수 – 1092]
-아무 말 좀 해봐요 방장님
-2주 동안 공지 하나 없이 잠수 타도 되는 거냐?
-노네임은 됨
-원래도 악질 출신이었는데 새삼스럽게ㅋㅋㅋㅋㅋㅋ
-롤대남 맛 좀 볼래?
-팩트) 방장은 롤대녀라서 면역이다
-노네임님 브이튜브 보셨어요?
-우리 아델라 보고 싶어 빨리 월오아 켜줘!!!!!
채팅창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노네임의 지난 행보는 월오아 커뮤니티에서 떡밥이 강하게 굴러가나 했더니 ACK 프로게이머의 승부조작 자백 사건으로 순식간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뜰 사람은 언젠가는 뜨는 법·
브이튜브를 중심으로 그녀의 단편적인 플레이 영상이 업로드 되면서 노네임의 유명세는 수면 아래에서 크기를 조금씩 불려나갔다·
그리고 이틀 전 한국에서 과학 컨텐츠 채널로 가장 유명한 ‘힉스 스튜디오’와 ‘도비 사이언스’가 거의 동시에 노네임을 대상으로 한 영상을 업로드한 것이 기어이 촉매제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노네임의 활약상을 일반인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친절한 정보를 제공했었고 이는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는 계기였다·
오죽하면 몇몇 방송사에서 노네임을 취재하고 싶다는 댓글까지 개인 커뮤니티에 알음알음 보였었다·
-이 새끼 대체 어디 감?
-왜저챗인거지?왜월오아가아닌거지?왜저챗인거지?왜월오아가아닌거지?
-이제 보니까 방제도 없네 ㅁㅊ ㅋㅋㅋㅋ
노네임의 불규칙적인 방송 시간 때문에 그녀의 구독자들은 대부분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로 방송에 참여하곤 했다·
그리고 노네임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화를 삭히는 게 일종의 관례였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유입된 시청자들은 그녀가 방송을 킨지 몇 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점에 대해 당황해했다·
원래도 이런 방송이라며 안심시키는 기존 시청자들의 댓글은 거친 텍스트의 파도 속으로 휩쓸려버렸다·
[‘밥아저씨의마법교실’님이 10000원 후원!]
-자신이 방송 날로 먹고 싶은 노네임이면 개추 ㅋㅋㅋㅋㅋㅋ
머지않아 그녀의 방송에서 첫 번째 후원이 터졌다·
어서 빨리 방장이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보낸 도네이션이었다·
무얼 해도 좋았다·
그 누구도 실현시키지 못한 월오아의 최고 난이도를 재도전해봐도 좋고 꽤 오랜 시간 놓아줬던 레거시 오브 레전드에서 챌린저를 찍기를 바라는 이도 있었다·
노네임의 제멋대로인 방송 스타일을 비꼬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채팅창에는 다시 강력한 화력의 도배 문구가 쏟아져 내렸다·
-개추
-눈물 흘리며 개추 ㅋㅋㅋㅋㅋㅋ
-개추는 무슨 빨랑 안 튀어나와!!!
-개추
-개추
-?
-?
-???
-방금 위에 뭐임?
-??????????
-아니 채팅을 치지 말고 방송을 하라고!
-진짜 노네임이잖아ㅋㅋㅋㅋㅋㅋㅋㅋ
-얼탱이가 없네ㅋㅋㅋㅋㅋㅋㅋ
휘몰아치는 급류 속에 조용히 묻어가려는 노네임을 귀신같이 찾아낸 시청자들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서로 연관이 없는 인물들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는 장면은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외전을 더 쓰고 싶었지만 파자마 파티를 미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메와 유나 그리고 하루의 동물잠옷 단체샷을 빨리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요!!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