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
‘너희들은 내 방송을 왜 보니?’
방송을 켜고 나면 이따금씩 이런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그저 낭비되는 시간이 아까워 소소하게 포션값이나 벌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동안의 내 방송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채팅창을 꺼버리고 모든 소통을 차단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비단 월오아에서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가상현실에서의 자그마한 3평짜리 공간· 예전에는 침대 하나와 테이블 하나 그리고 의자 하나가 전부였었지·
지금도 구조적으로는 크게는 다르지 않았다·
다만 혼자 방송을 하다 보면 수식을 적을 일이 많아 칠판 같은 물건들을 유료 상점에서 구입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카페트에 난 복슬복슬한 동물털이 보였다·
예전에 설아가 판 카페트와 해시값이 동일한 제품을 서버복구비용이라는 명목으로 시세의 100배를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
동일한 제품명의 다른 카페트와 원자 구조까지 똑같을 거다·
하나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만··· 때로는 이성이 항복을 외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동안 나는 방송에서 내가 아는 여러 마법학 지식을 끄적거리고 중얼거리는데 그쳤다·
전생의 지식이라고 완전하지 않다·
오랜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다시 그 내용을 필사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까먹어버리는 것처럼 나는 전생의 퍼즐을 차근차근 하나씩 짜 맞추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내 무의식에 잠든 마법적 지식들을 깨우고 나면 남은 건 언제나 후회밖에 없었다·
아··· 만약 내가 이때 이런 마법을 사용했더라면·
내가 이때 만약 마나를 아낄 수 있는 수단을 알고 있었더라면·
후회의 늪에 빠진 전생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연구하고 설파했다·
그렇게 내 성대에서 터져나오는 울분은 대체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그래서 내가 강의를 빙자한 혼잣말을 할 때 채팅창을 모조리 꺼버리는 거일지도 모른다·
비난 받기 싫으니까· 나 말고도 다른 이가 내 선택이 틀렸다고 하는 순간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진다· 특히 오늘같은 날은 더더욱·
[운메이노 이타즈라데모~ (운명의 장난일지라도)]
게다가 오늘은 평소처럼 피아노나 바이올린 클래식 곡이 아닌 다소 정신 사나운 곡이 재생되고 있었다·
[메구리아에타 코토가~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열정적으로 외국노래를 부르는 벌꿀오소리 소녀의 미성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진다·
[시아와세 나노~ (행복한 거예요)]
“···”
시청자들을 걸러내겠다는 의도였지만 문제는 정작 나도 이 노래를 들어야하는 입장이었다·
처음엔 내 목소리랑 비슷해서 틀어주면 제격이겠다 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나도 듣고 있기 거북했다·
버튜버가 노래도 부르는 게 요즘 대세인가보지?
[연애 서큘레이션 (Cover – 카리리)]
[2:41/4:15]
가상현실을 지원하는 캡슐이 보급화되면서 버튜버와 버튜버가 아닌 자에 대한 경계가 많이 허물어지는 추세였다·
버튜버를 어떻게 정의내리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있는 것 같았지만 몇 가지 확실한 명제는 있었다·
가장 먼저 버튜버는 스스로 ‘안의 사람’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고 설령 공개되더라도 그게 공식적인 방법이 아니어야 했다· 물론 그 역은 성립하지 않았다·
또한 ‘안의 사람’을 숨기는 이들이 모두 버튜버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애매한 정의 속에서 ‘버튜버’들은 엄연히 존재했을뿐더러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90만 구독자 버튜버 ‘카리리’는 전혀 상관없는 내 브이튜브 추천채널에 뜰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이쪽 문화에 대해선 나는 문외한이었지만 그래도 이 벌꿀오소리 코스튬을 장착한 아이 덕분에 방송 시청자들이 조금 순둥순둥해졌다·
[후와후와루~♡ 후와후와리~♡ (ふわふわる ふわふわり)]
-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오늘 기강 제대로 잡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래도 안 나가? 이래도 안 나가? 이래도 안 나가? 이래도 안 나가? 이래도 안 나가? 이래도 안 나가? 이래도 안 나가?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네가 선택한 스트리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리링~어서오소리~카리링~어서오소리~카리링~어서오소리~카리링~어서오소리~카리링~어서오소리~카리링~어서오소리~
-ㄴ벌써 허니비 새끼들 출몰지역 다 됐네ㅋㅋㅋㅋㅋㅋ
-ㄴ컨셉이 벌꿀오소리인데 왜 팬네임은 허니비냐
-ㄴ영어로 하면 HONEY Badger라서
-시밭 점심 나가서 먹을 것 같아!!!!!!
-벌써 1000킬 실화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공황이다 돔황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브이튜브 창을 전부 꺼버리고 다시 카메라를 켰다·
다시 원래의 차분한 분위기로 시작해보는 거야·
꼭 밝지만은 않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나는 안락의자에 몸을 맡겼다·
채팅창의 열기는 그대로였지만 불길의 방향이 반대로 향했기에 조금은 뿌듯함을 느꼈다·
흘긋 시청자 수를 바라보았다·
[시청자 수 – 1480]
이전에 비하면 시청자는 반토막이 나버렸지만 나와 그들간의 내적 친밀감은 더해졌다·
원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고 썩은 사과 하나가 한 통의 사과를 망치는 법이었으니·
어그로와 반감있는 시청자들을 도려낸 방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썩 내 마음에 들었다·
[‘대유쾌마운틴’님이 1000원 후원!]
-노네임님 진짜 호감이네요 저도 카리리 좋아해요
동전이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경쾌한 후원음과 함께 방금 노래를 불렀던 소녀와 동일한 목소리가 후원메시지로 흘러나왔다·
그 카리리라는 사람은 자기 목소리까지도 자본주의 사회에 맡긴 걸까·
“감사합니다·”
충성스러운 시청자들은 이제 무얼 하느냐고 한입으로 내게 답을 요구했다·
여기서 바로 방종을 해버리면 분위기가 험악해지리라는 사실은 너무 뻔하니까 안락의자를 앞뒤로 흔들거리며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평소처럼 내가 아는 마법 지식들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시청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후원 메시지 외적으로는 일절 하지 않았던 터라 이런 상황이 매우 난감했다·
수업시간은 끝났는데 모두가 자리에 앉아 교수를 일제히 기다리는 상황이랄까·
그래도 열심히 기다려준 아이들에게는 달콤한 마시멜로 하나쯤은 쥐여줘야겠지·
“방종은 1시간 뒤에 하겠습니다· 그동안은 여러분이 원하시는 컨텐츠 같은 게 있다면 한번 고려해볼게요·”
-이 텐련 뭐라는 거임?
-제대로 된 방송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방종선언은 진짜ㅋㅋㅋㅋㅋㅋㅋ
-방제 없는 게 진짜 컨텐츠도 없는 거였냐!
-물 들어올 때 처음으로 하는 짓이 개미털기ㅋㅋㅋㅋㅋㅋ
“별로 내키지 않나 보네요· 그럼 방송은 여기까지···”
-Q&A 같은 거 하죠 방장님?
-트리위키 읽기 어떰?
-브이튜브 탄 거 감상하실?
-방장이 채팅창 봐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지 에잉 쯧쯔
-MBTI 테스트 ㄱㄱ
-이상형 월드컵 해요 노네임님!
“이상형 월드컵?”
[‘jdfshsdfjdfs’님이 5000원 후원!]
-트위시 여성 스트리머 이상형 월드컵 한 접시 어때요?
이상형과 월드컵이 공존할 수 있는 단어였나?
이상형은 단어 그대로 개인이 추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유형일 텐데 이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부터 모순적이었다·
-아니 방장이 여성인데 왜 여성 스트리머로 함?ㅋㅋㅋ
-그럼 우리보고 한 시간 내내 남캠만 보고 있으라고?
-ㄴ차라리 카리리 노래를 1시간 듣고 있는 게 나을 듯
-ㄴㄹㅇㅋㅋ
반쯤의 호기심과 반쯤의 불신으로 들어간 링크 속에서는 다양한 카테고리의 월드컵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 이상형을 찾는 월드컵이구나·’
처음부터 이상형을 정해놓지 않고 여러 예시로 나온 선택지를 고르고 골라 최종적으로 하나를 선별하는 그런 식의 컨텐츠·
사실 이상형이라는 말을 빼도 무방할 정도인 게 사람뿐만 아니라 음식 월드컵 인생영화 월드컵 포x몬 월드컵도 제법 인기 순위에 들어있었다·
단순한 VS 놀이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아마도 토너먼트 형식이라서 월드컵이라는 명칭이 붙은 거겠지·
시청자들도 원하는 부문이 제각기 달랐기에 잠잠했던 채팅창이 비교적 날뛰기 시작했다·
인기순으로 정렬한 다양한 월드컵을 쓰윽 훑어보았다·
외모로 타인을 평가하는 행위는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혐오하는 편에 가깝다·
[예쁜 여자 아이돌 월드컵]
[애니 여자 캐릭터 월드컵]
[AV 배우 월드컵]
[포x몬 의인화 월드컵]
더 이상 스크롤을 내리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졌을 때 하나의 단어가 홀린 듯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전투 마법 월드컵]
[전투 시에 하나의 마법만 사용할 수 있다면? / World Magic Culture Forum에서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 전투 마법 128개 포함 / 6서클 이상 제외]
[총 라운드를 선택하세요: 32강]
[총 128개의 후보 중 무작위 32개가 대결합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 같은 인기없는 카테고리·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컨텐츠는 시참입니다· 저와 똑같은 선택을 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세분께는 제 방의 매니저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zakuti님 어서오소리~ 상어도 있고 시궁쥐도 있는데 왜 벌꿀오소리 컨셉의 버튜버는 없을까요··!!
매니저를 뽑는다는 건 나메가 본격적으로 방송을 시작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대기업이 될 치타는 웃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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