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조금 옛날 얘기를 해볼까·
[에스타샤 라티아스 데 카이젠 황녀 내 언젠간 당신을 십자가에 세워 황국 신민들 앞에서 불태워주지·]
황실 얘기를 하면 지금 너무 기분이 안 좋아지니까 더 오래 전 이야기를·
나는 반지하 단칸방에 나를 낳아준 여성과 단 둘이 살았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거기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여기로 이사해 온 건지는 모른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아이는 애타게 울부짖고 있었다· 하지만 매캐한 연기로 뒤덮인 공간에서 여성은 그의 애절함에 끝내 답해주지 않았다·
나는 평생 반지하 단칸방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내 두 다리가 문제였다·
정확한 병명은 유전성 강직성 하반신마비(HSP)였지만 그건 추후 내가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때 알게 된 것이었다·
여성의 감정은 언제나 증오로 가득했다·
좁아터진 반지하를 증오하고 새벽에 술에 취해 고성방가를 지르는 취객들을 증오하고 짐밖에 되지 않는 나를 증오하고 끝끝내 자기 자신을 증오했다·
남들이 부모와 처음 맬 학교 책가방을 고르는 시기 그녀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 살 이후로는 지쳐서 울지도 않았던 나는 평생 그 순간만큼 오랫동안 울어본 적이 없었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처절하게 울었던 덕에 나는 사흘 뒤 기적적으로 구조될 수 있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세상의 각박함을 깨달았다·
나는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집단에 가더라도 짐일 뿐이었고 혐오의 대상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특별히 베풀 것이 없는 이상 그들은 나를 언제라도 매몰차게 버렸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또래보다 어른스러웠고 이를 나만의 강점으로 내세웠다·
기원전 일만년에 태어났으면 태어나자마자 절벽에 떨어져서 죽을 운명이었다고 위로하며 공부에 집착했었다·
압도적으로 잘할 필요도 없었다· 중학교 1학년이 초등학교 1학년 수학을 배우면 모든 게 쉬워보이는 것처럼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언젠가는 따라잡힐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회를 간과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지식 겨루기 같은 단순한 세상이 아니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메운다고 쳐도 잘 곳은? 먹을 것은?
남들이 공부할 시간에 나는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악착같이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통장에 월급이 들어왔을 때 나는 절망했다·
채권자의 빚 독촉장 어머니의 실종처리로 나는 반지하를 처분했을 때부터 상속 절차가 진행되었고 나도 모르는 그녀의 빚 12억 4천 3백만원도 떠앉게 되었다·
나는 그 날 마지막으로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세계 최고의 부자로 살아보고 싶었다·
* * *
“나메야 게임 시작했어! 뭐부터 사야 돼?”
아린이 또 다시 울상이 되어 나에게 매달린다·
그래 그에 반해 게임이 요구하는 건 명확했다·
“주술사의 지팡이하고 포션 하나· 나한테 꼭 붙어 있어·”
상대 진영의 성채를 파괴시킨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주어지는 페널티는 동등하다·
단순할수록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든다· 내가 세 번째 억까 인생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던 비결이었다·
바람이 기분 좋게 살랑인다· 구름이 조금 꼈지만 뭐 어떤가·
“안녕 리리·”
“쓰으으읍? 오해하지 말게나 짐은 절대 잠든 게 아니니! 어어라? 내 이름을 아는가?”
다른 팀원 3명이 아직 시작의 마을에 있는데도 여우상인 리리에게 말을 걸 수가 있었다· 신기한 기분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 오늘도 신세질게·”
은화 5개를 건네주고 영혼수확자의 반지를 손에 껴본다· 중급 포션은 덤이었다·
전장의 공기가 차갑지만 개운했다·
“이거 느낌이 이상해! 근데 나메한테서 안 떨어지는 느낌이야·”
아린은 복슬복슬한 고양이가 되어 내 머리 주위를 날라다닌다·
“스킬이니까· 떨어지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 떨어질 수 있지만 위험할거야· 계속 붙어서 적이 보이면 화살을 쏴·”
“오케이!”
“그동안 이거 읽고 있어·”
초등학생이니까 글 정도는 읽을 수 있겠지? 그녀에게 스킬 설명이 달린 매뉴얼을 건네주었다·
“노··· 노력해볼게!”
5만번이나 들린 익숙한 숲의 전경이 펼쳐진다· 이제는 붉은점박이광대버섯이 어디에 얼만큼 있는지 외웠을 정도·
미리 레드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글러가 우리를 반긴다·
[루칼리스: 님 노네임 찐임?]
원래는 채팅이 이렇게 보이는 구나· 캡슐에 갇혔을 때는 모든 문자들이 깨져서 보였기에 항상 채팅을 차단하고 게임을 했었는데·
스폰된 레드에 다섯방 정도 때려준 뒤 바텀 라인으로 향한다·
내가 지금 빙의한 챔피언은 ‘케이사’·
부모와 헤어져 마계에 고립된 소녀가 마물의 힘을 받아들여 악착같이 살아남아 생환했다는 비운한 배경을 가졌다·
때문에 하반신 전부와 상반신 일부가 까끌까끌한 갑각류의 것으로 덮여있었다·
상대 쪽에서는 롤을 한다면 자주 볼 수 있는 해적 미녀와 닻을 든 기계괴물이 바텀 라인에 선봉을 섰다·
곧이어 6명의 병사들이 대립한다·
“화살로 빨간 머리 여자애를 노려· 화살을 잘못 조준했어도 어느 정도는 유도가 되니까 조종할 수 있을거야·”
“해볼게!”
고양이가 귀여운 자세로 화살을 발사했지만 병사에게 막혀 상쇄된 모습· 아린이 우는 소리를 했지만 괜찮다고 위로해주었다·
1레벨은 딜교보다는 병사를 제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상대는 2렙이 강한 조합· 즉 상대측이 2렙을 먼저 찍어 우리를 압박하려 든다면 우리는 스킬을 병사를 해치우는데 울며 겨자먹기로 강요받는 상황이 올 것이다·
다행히 상대쪽도 견제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케이사의 스킬로 병사를 빠르게 제거하고 상대의 뼈방패도 빼는 건 덤이었다·
빠르게 두 번째 웨이브가 몰려온다· 아직 첫 번째 웨이브에서 살아남은 우리쪽 병사가 한명 있었다·
내가 몸을 옆으로 틀어 뒤로 빼는 척하다가 상대가 마지막 병사까지 마무리하려 들 때 평타와 q스킬로 해적 소녀에게 집중적으로 딜을 퍼부었다·
뒤늦게 기계괴물이 닻으로 제지해보려지만 이미 거기까지 예상하고 이미 몸을 뺀 상황·
해적소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습관적으로 몸을 뒤로 빼버린다·
딜교의 메커니즘을 잘 모르는 구간답게 여기서 사려버리면 더욱 큰 손해가 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병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공격을 해놓음으로써 피를 빼놓는다·
이대로는 질 수 없었는지 두명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쏠린다
느낌을 보아하니 피할 수 없는 메테오 공격으로 압박에서 벗어나고 그동안 재화를 수급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거기에 응해줄 것처럼 앞으로 다가갔다가 다시 진로를 옆으로 틀었다·
아프지도 않은 돌덩어리는 하나밖에 맞지 않았다·
“아린아 회복!”
“알았어!”
갑자기 빨라진 이동속도와 공격속도·
기본적으로 케이사는 저렙때 능력치가 출중한만큼 사거리가 짧다·
하지만 이동속도를 올려버린다면 25의 사거리를 조절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평타를 한 대 때리고 뒤로 빠진다·
해적소녀도 때리려 하지만 사거리가 이미 벌어져 공격이 취소된 상황·
그 텀을 이용해서 다시 평 q로 응수한다·
아까 때려놓은 두 명의 병사가 6개의 미사일에 두 대씩 맞으며 사라진다· 나머지 두 대는 소녀의 몫·
이번에는 사거리에 들어왔을 때 빠른 반응속도로 평타로 맞대응해보았지만 이쪽은 증가된 공격속도가 아슬아슬하게 평타를 한번 더 우겨넣는다·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병사 6명이 전투에 합류해 해적소녀를 집중포화한다· 그에 반해 4명에게 맞는건 귀여운 수준· 기계괴물이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이다·
내가 이만하면 됐으니 빠지려 했는데 아린이 화살을 맞추어준다·
“이번엔 맞췄어!”
서포터에게 뭐라 투덜대며 짜증내는 소녀·
나머지 병사를 정리하며 물약을 복용하려는 찰나·
그녀에께 쌓인 패시브 스택이 아직 초기화되지 않았었다·
[w-점멸-평-점화]
순식간에 해적소녀의 힐과 점멸이 번쩍이며 사용되었고 나에게 탈진이 부여되었지만 이미 모든 스킬을 쏟아부은 뒤였다·
[(전체)민트초코밥버거: 이게 막틱에 죽네 xx]
그 뒤로 라인전은 일사천리였다·
탑과 미드가 도합 10데스를 해버리는 바람에 15분이 되자마자 항복 투표가 실시되었지만 아린을 이겨줘야하는 임무를 짊어진 나로서는 거기에 응해줄 수 없었다·
바텀을 풀어주려고 온 미드와 정글까지 잡아내며 게임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케이사는 물리로 가는 빌드와 마법으로 가는 빌드가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챙기는 일명 하이브리드 빌드는 크게 조명을 받을 수 없는데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계수로 원거리 딜러의 캐리력이 억제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성장력과 아이템을 덕지덕지 발라 바른다면?
인파이팅 포킹 이니쉬 카이팅이 모두 되는 만능 챔피언으로 탈바꿈한다·
“와하!!! 가자가자! 나메야 다 쓸어버려!”
체감상 시속 300km가 넘는 속력으로 적에게 쇄도한다·
적팀의 유일한 확정 하드 cc기인 노텔러스부터 암살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일심동체처럼 발동되는 아린의 궁극기·
일대다 싸움에서 케이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적의 숫자를 되도록 줄여야 하는 점이다·
어느 챔피언에게든 통용되는 말이지만 케이사는 이를 보다 섬세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한다·
[(전체)민트초코밥버거: 이젠 평q평에도 죽네 어이가 없어서 ㅋㅋㅋㅋ]
탱커든 브루저든 암살자든 케이사와 유미 앞에 평등하게 쓰러진다·
비록 탑과 미드는 이미 탈주를 한 뒤라 아군에는 3명밖에 없었지만··· 아린은 여기까지 함께해준 정글러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메는너무귀여워: 끝까지 해줘서 고마워!]
[루칼리스: 버스 ㄱㅅ요 님 친구 ㅈㄴ게 잘하네 진짜]
[루칼리스: 그 실력으로 왜 여깄는거임?]
이제 아린과의 약속은 지켰으니 게임에서 떠날 시간이다·
“재밌었어?”
“응! 앞으로 또 해주면 안돼?”
“숙제해야지·”
“피··· 그건 나중에 해도 되는데·”
“오늘도 늦게 와서 철민쌤한테 혼났다며·”
아린의 인간관계는 너무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법 그건 학교 친구뿐만이 아니라 선생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체육 선생님은 나 별로 안 좋아한단 말이야···”
“아린이가 일찍 등교해서 아침에 반 청소를 해주면 좋아하실 거야·”
“그럴까···”
“대신 캡슐 나와서 보드게임하자·”
“그것도 좋아! 할리갈리 할까? 아님 모노폴리?”
“아무거나· 잠깐만 먼저 나가있어 할 일이 있어서·”
“응응! 미리 준비하고 있을게·”
몇 없는 나의 친구 창· ‘제발부탁’의 클랜원 셋과 어쩌다 알게 된 람마스 원챔 정글러 ‘화내지않고열심히’· 나는 그들에게 짤막한 글을 남겨주었다·
* * *
“하 씨 또 졌네·”
민준이 죄없는 바닥을 내리쳤다· 패배도 패배지만 자신을 도발해대는 방송인의 목소리가 민준을 더욱 분노케 했다·
[응 계속 저격해봐~ 이기면 그만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폼 미쳤넼ㅋㅋㅋㅋㅋㅋ 4연승도 가보자
-극
-저격을 당하면 점수가 복사돼! 저격을 당하면 점수가 복사돼!
-진짜 이번주 챌 가는 거 아니냐?
-락
-극
-이러다 표도르가 먼저 마스터로 강등될 듯 ㅋㅋㅋㅋㅋ
왜 이렇게 잘해진거지? 아니 내 실력이 떨어진건가?
스트리머 베베굿이 상대로 걸릴 때는 언제나 전력을 다 한다· 방심해서 졌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민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대기실을 나갔다·
[NoName님으로부터 메시지]
‘뭐야?’
내가 잘못 봤나?
민준을 눈을 비벼봤지만 여전히 이상한 닉네임이 보인다·
채팅은커녕 말 한마디도 안하는 극한의 컨셉충 노네임·
한달 전부터 갑자기 연락이 끊겨 게임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원래도 이상한 사람이었으니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
미르 형도 굳이 클랜에서 자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게 뭐야···”
[구해줘서 다들 고마웠어요· 전 잘 살고 있어요·]
[수신인: IlllIllIl plzplzlqzlq 혜지면밤이된다 화내지않고열심히]
[발신인: NoName]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래서 세계 최고의 부자(황제가 못 되면 숙청당함)로 만들어드렸습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