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5
“아··· 안돼애애···! 싫어어어엇!”
하루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나메의 방문 너머로 울려퍼졌다·
그것도 잠시 다시 고요한 적막이 찾아온다·
방문이 끼익하고 열리자 입을 삐쭉 내민 하루가 인상을 쓰며 나왔다·
“왜 나만 돼지인건데···! 나도 곰이랑 고양이 하고 싶었다구···”
“그야 네가 가위바위보에서 졌으니까·”
“지금이라도 나랑 바꿀래 하루야?”
“아냐··· 됐어··· 나메는 고양이 잠옷이 제일 어울리니까···”
그녀를 애써 달래보고자 나메는 하루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봐봐 네 잠옷에는 이런 것도 달려있잖아· 여기에 손 넣으면 동물손이 되네·”
“그래봤자 족발인데···”
“하루야 괜찮아· 충분히 귀여워·”
“노나메 나는? 나는!”
나메의 칭찬에 하루가 소매를 파닥거렸다·
유나는 자기도 칭찬해달라는 듯이 나메를 졸랐지만 그녀가 바라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메가 거실에 이불을 깔고 두 소녀를 앉혔다·
“뭐부터 할래? 젠가? 할리갈리? 아니면 해적룰렛?”
사이 나쁜 두 아이를 화해시키기 위해 나메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였다·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타인의 집에 있다는 게 어색한지 쭈뼛거렸다·
“그럼 젠가부터 하자· 괜찮지?”
“응!”
“난 좋아·”
모두의 동의 하에 나무블록의 탑이 세워졌다·
“진 사람은 딱밤 맞기 어때?”
“당연히 해야지·”
“나도 엄청 아프게 잘 때리니까 노나메 너 공기놀이 할 때처럼 봐주면 안 된다? 후회할 거야·”
나메도 순순히 져줄 생각은 없었다· 나메가 가장 먼저 블록을 하나 빼 가장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은 네 차례야 하루야·”
“그거 알아? 젠가를 잘하는 비법을 어디서 들었는데 무게중심을 잘 찾아야 한대· 봐봐 여기 이렇게 살짝 삐져나와있는데는 위에 블록이 안 눌려있는 거야·”
주의 깊게 듣는 이는 비록 없었어도 하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잘재잘거렸다·
하루가 호기롭게 젠가블록을 잡아보았지만 의외로 잘 빠지지 않자 그녀가 난처함을 드러냈다·
“한번 터치했으면 무르기 없어!”
다른 블록으로 움직이려는 손을 유나가 재빨리 제지했다·
“그런 룰이 어딨어?”
“원래 그런 규칙이었는데? 젠가 처음 해봐 이하루?”
“자자 싸우지 말고· 하루가 몰랐으니까 이번 한번만 봐주자· 괜찮지?”
“으응··· 뭐어··· 그래·”
시작부터 눈에 스파크가 튀는 둘을 나메가 간신히 말렸다·
게임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친근감을 쌓은 뒤 하루가 유나에게 잘못을 뉘우치는 아름다운 그림을 나메는 생각했다·
“앗!”
와르르-
위태로운 탑이 무너지기도 전에 하루는 자신이 블록을 뽑아놓고 움찔거리며 요상한 소리를 냈다·
“자 때려·”
하루는 앞머리를 까서 새하얀 이마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대충 때리는 시늉만 하는 나메를 보고 유나가 말했다·
“그렇게 때리는 게 아니야· 잘 봐봐·”
지나치게 들어간 힘에 유나의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긴장된 건 하루보다도 오히려 나메쪽이었다·
‘제발 세게 때리지 마·’
“아얏!”
하지만 나메의 바람은 맥없이 무산되어버리고 하루의 이마가 붉은 빛으로 번져버렸다·
‘제발 이하루 너도 화내지 마· 여기 화해하러 온 거잖아!’
“너··· 지기만 해봐·”
이미 나메의 꿈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였다·
* * *
“씨이···”
“흐으···”
두 소녀가 이마를 붙잡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댄다·
전적은 5 대 5 대 0·
그 와중에 나메는 단 한번도 탑을 무너뜨리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었다·
소녀들은 말없이 탑을 공들여 세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결코 잔잔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 상황은 태풍 속의 눈이었다·
축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조용히 게임을 진행하고 있던 와중 하루가 의문을 표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왜 또·”
하루의 말에 유나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나메는 어떻게 한 번도 안 걸릴 수가 있었지?”
블록 하나를 빼고 있던 나메가 움찔거린다·
타당한 의문에 유나도 흠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쓰윽-
나메는 탑을 무너뜨리지 않고 성공적으로 블록을 빼낼 수 있었다·
그런데 탑은 계속 양옆으로 휘청거리기만 할 뿐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네 차례야 유나야·”
“잠깐만·”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메의 뒤에 섰다·
앉아서 볼 때는 몰랐는데 위에서 보니 확실했다·
이 탑은 무너져야 마땅한 경사로 계속 흔들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나메 너 잠깐만 눈 감아볼래?”
유나는 두 손으로 나메의 양쪽 눈을 가렸다·
휘청-
이윽고 탑의 진동폭이 거세졌다·
우르르-
결국 싱겁게 무너져버린 탑을 보고 유나가 소리를 꽥 질렀다·
“역시 오러를 쓰고 있었잖아! 나메야 이건 반칙이지!”
“뭐어? 그게 정말이야?”
그동안 각자에게 다섯대씩 총 열대를 맞은 유나와 하루가 나메에게 추궁했다·
설마 나메가 블록을 빼낼 때 여분의 오러를 비가시상태로 빈 공간에 따로 남겨놓고 턴을 넘길 리가 없지 않은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메의 입에서 다시금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지역에는 오러를 써도 된다는 룰이 있었어·”
아직 무너지지 않은 탑의 하층부 나메는 밑에서 두 번째 층에 있는 세 개의 블록을 동시에 빼내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3층부터 7층까지의 블록이 전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렇게 뻔뻔하게 밀고 나가보는 나메였지만
““그런 룰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소녀들이 한 목소리를 내며 반칙자를 응징했다·
결국 각자에게 딱밤 열대씩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나메는 뜨거워진 이마를 부여잡고 깔깔거리는 두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손이 매워···”
* * *
젠가에서 너무 시간을 오래 쓴 나머지 저녁 시간은 금방 찾아왔다·
나메의 오러를 모두 봉인한 뒤로부터 벌칙의 늪에 빠진 나메의 구세주는 다름 아닌 천규진 교수였다·
“저녁 먹을 시간이지?”
적절한 시간에 도착한 치킨과 함께 천교수는 직접 만든 한우 비프 또띠아와 크래커 위에 크림치즈를 듬뿍 담은 딸기 카나페를 앞에 대령해주었다·
“우와 치킨이다!”
포장을 열자 치킨 양념의 달콤하고 감칠맛 도는 향이 화악 퍼져 나갔다·
밖에서 사먹으려면 비싼 돈을 줘야하는 음식들보다 치킨에 더 열광하는 아이들이었다·
“재벌들도 치킨을 먹어?”
“원래 자주 먹거든···?”
유나의 물음에 다시 삐딱하게 대답한 하루·
실제로 일주일에 한번은 시켜먹을 정도로 치킨을 좋아하는 그녀였다·
한입 두입 유나와 하루의 볼이 빵빵해지고 작은 입술 사이로 회색빛의 뼈가 퓽하고 튀어나왔다·
티비 방송보다는 틱톡을 좋아하는 나이답게 하루가 가져온 태블릿으로 크리에이터의 춤영상들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언니 진짜 이쁘다· 춤도 엄청 잘 춰·”
“나메가 자라면 더 예뻐질 것 같은데?”
“그건 당연한 소리 아냐? 그래도 나메는 영원히 작았으면 좋겠어·”
“나도나도·”
간만에 두 소녀의 의견이 일치했다·
나메 말고는 접점이랄 게 없었던 이들이었기에 대화의 주제는 다시 나메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메 들어올려본 적 있어?”
유나가 넌지시 던진 말에 하루가 호기심을 가졌다·
“어떻게?”
“여기 겨드랑이 잡고 이렇게·”
“아흑흑! 야 간지러워! 근데 진짜 그렇게 들었다고?”
“응! 엄청 가벼워서 하나도 힘 안 들어·”
유나는 나메를 잡고 한바퀴 돌려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근데 너 언제부터 나메랑 친해진 거야? 나메 처음 왔을 때 자기소개도 안 하고 어디론가 가버렸잖아·”
“그때는··· 안 친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또 있어· 조별활동 할 때도 윤시후랑 나메한테 욕하면서 소리 질렀잖아·”
“그건···”
하루는 유나의 정곡을 제대로 찌르고 들어갔다·
그러나 중간에 천교수가 빈 접시를 치우려고 오면서 그녀들의 대화는 무산되었다·
“저녁은 맛있었니?”
“네 맛있었어요!”
“저희 집에 요리사 아저씨가 해주는 것보다 더 맛있어요!”
“처음 해보는 요리였는데 다들 좋아해서 다행이네· 다 먹고 영화를 보자고 해서 나메 방에 빔프로젝터도 설치해놨단다· 무슨 영화 볼 지는 골랐어?”
“아뇨! 처음 들었어요·”
“그런데 나메 얘는 어디갔니?”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메는 보이지 않았다·
꽤나 진지하게 영상에 몰입하고 있었던 나머지 유나와 하루는 그녀가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기름 묻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도 가보았지만 거기서도 나메는 발견할 수 없었다·
남은 곳은 그녀의 안방밖에 없었다·
“근데요 저희가 여기 들어가도 돼요?”
“오늘 일찍 일어나가지고 피곤해서 자고 있나? 한번 조용히 들어가보렴·”
“살살 열어 살살·”
“말 안 해도 알거든?”
천교수의 허락 하에 유나는 조심스럽게 나메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 특히나 하나밖에 없는 창문에도 암막커튼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문을 반쯤 열자 거실 전등으로부터 나온 불빛이 나메의 방 한쪽을 밝게 비추었다·
척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커다란 캡슐이 하나 놓여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나메의 침대를 볼 수 있다·
어린 아이가 쓰기에 비교적 큰 크기이었음에도 나메는 한쪽 구석에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쪽잠을 자고 있었다·
“자고 있나봐···”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한 이른 시간대였다·
파자마 파티의 주최자가 가장 먼저 잠에 빠져든 상황에 난감함을 느꼈다·
“으음···”
이불도 덮지 않은 나메가 몸을 뒤척이자 소녀들이 움찔하고 놀랐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와 함께 나메의 입술이 우물거렸다·
“잠꼬대를 하나 봐· 어떻게 너무 귀여워···!”
“뭐라 하는 거야?”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한걸음 한걸음 조용히 나메에게 다가간 유나가 귀를 가까이 가져다댔다·
“에을··· 라스··· 므브은··· 스으··· 트르··· 으르흐···”
다른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결코 알아들을 수 없었을 터였던 나메의 잠꼬대·
하지만 유나와 하루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머리에 느낌표를 자아냈다·
지난 1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주구장창 시를 낭송하듯이 외웠던 룬문자·
‘엘 라스 마벤 수트라 아르헨·’
귀에 익을 수밖에 없었던 음성이었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하루가 먼저 제 입을 막고 끅끅 소리를 냈다·
“자면서 룬어를 외우고 있잖아···!”
만약 이 사실을 알려주면 나메가 어떻게 반응할까 하루는 벌써부터 기대를 지울 수 없었다·
“와아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1등을 할 수 있는 걸까?”
“서유나 전교 1등은 진짜 포기해라· 윤시후는 이길 수 있어도 노나메는 절대 안 되겠다 흫흐·”
예전에도 한번 비슷하게 들어봤던 것 같은 익숙한 말 하지만 유나는 하루의 말에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녀들은 나메가 어디까지 룬어를 외우나 싶어 계속해서 나메의 잠꼬대를 경청했다·
“스으트···르스···”
이제 음절이 하나 더 늘어 다섯 개가 되었다· 시아트리스는 마법진에서 로런츠 공변성(Lorentz symmetry)을 제어하는 룬어였다·
유나의 열 손가락이 모두 접힌 게 두 번째였으니 대략 20번째 룬어까지 말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나메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제 깨울까?”
“아아 더 보고 싶었는데···!”
“더 보는 건 나메한테도 실례야!”
“딱 5분만 더 어때?”
잠에 푹 빠져버린 소녀를 언제 깨울지 갑론을박을 펼치는 와중 다시 잠꼬대가 시작되었다·
“리프··· 졸려··· 자고 싶어···”
이미 자고 있는 와중에 또 자고 싶다는 말을 내뱉는다·
“크레세리엄··· 너무 피곤해··· 그래도 자면 안 돼···”
나메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침대 시트가 그녀의 손에 꽉 잡혀 꾸깃꾸깃해졌다·
“얀델비르크··· 머리 아파아··· 싫어···”
점점 음성이 뚜렷해진다· 나메의 머리가 식은땀으로 젖어간다·
“힘들어···”
“주··· 죽을 것 같아···”
“살려줘요···”
“■■님 제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에피소드 32 – 일상> 편에도 나온 나메의 잠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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