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6
잠을 얕게 자는 사람이 있는 반면 깊게 자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전생에서는 작은 인기척에도 깨는 경우가 다반사였기에 내가 언제나 잠을 얕게 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람소리를 못 듣고 하마터면 아카데미에 지각할 뻔한 경우를 생각하면 의외로 나는 누가 억지로 깨우지 않으면 잘 일어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나 하고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인간의 뇌는 결핍의 경험을 기억한다고 예전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게 문득 떠올랐다·
예를 들어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간헐적 단식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인 다이어트 방법일지 몰라도 우리의 몸은 적은 식사량에 적응하여 칼로리 흡수율이 점진적으로 늘어난다·
요요현상에 더욱 취약해지는 것도 보상심리와 더불어 이런 이유도 있다고 들었다·
아기였을 때 잠을 많이 못 잔 게 원인이었나?
그런데 그때도 잠이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은 딱히 없었는데·
오히려 내일 눈을 뜨지 못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불면증을 앓았으면 모를까·
물론 이런 몸이 되어서 편한 점도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눈만 붙이면 잠이 오는 건 식성을 가리지 않는 것과 더불어 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축복 중 하나였다·
누군가 내 몸을 멀미가 날 정도로 흔들어댄 까닭에 나는 강제로 기상하게 됐다·
유나였구나·
“아··· 미안· 깜빡 자버렸네· 저녁은 잘 먹었어?”
방에 불도 안 켜고 들어와 조용히 나를 깨운 모양이다·
기껏 파자마 파티를 준비해놨는데 집주인이라는 사람이 방에 틀어박혀 잠이나 자는 추태를 보여 미안하다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다 먹었으면 혹시 영화 볼래? 다운받아 놓은 것 중에 ‘주스토피아’도 있고 ‘아웃사이드 인’도 있는데·”
“······”
왜 다들 대답이 없지? 나이를 고려해서 일부러 애니메이션 영화로 골랐는데 취향이 아닌가?
눈치를 보던 하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메야··· 혹시 지금도 피곤해?”
피곤하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피곤하긴 했는데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까 개운해졌다·
잘 놀고 있는 와중에 내가 자버림으로써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 애써 변명했다·
“잠깐 빔프로젝터 설정하다가 깜빡하고 잠이 든 거야· 절대 너희들이랑 노는 게 재미 없어서 자러 간 게 아니라· 오늘 파자마 파티가 정말 기대돼서 일찍 일어났거든·”
“노나메···”
유나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살그머니 내 잠옷을 꼬집었다·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방이 너무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 방 전등을 켰더니 인상을 잔뜩 찡그린 유나를 볼 수 있었다·
“왜 또 울려고 그래· 나 없을 때 하루랑 싸웠어?”
도리도리-
유나의 붉은 머리가 좌우로 세차게 흔들렸다·
일단 다독여주기 위해 평소처럼 안아보려고 했지만 유나가 나를 뿌리쳤다·
“내가 아무 말 안하고 방으로 들어가버려서 그래?”
도리도리-
또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말랑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어보지만 이번에도 뿌리치고 씩씩대기까지 한다·
“나라고 해서 네 속마음까지 전부 알아줄 수가 없어· 서운한 게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로 해줬으면 하는데·”
특히나 아이들의 감정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어른들은 기쁨이면 기쁨 슬픔이면 슬픔 혐오면 혐오·
단일한 감정이 딱딱 표정에 드러나지만 아이들은 자신조차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기에 생각을 읽어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유나의 두 눈에 서운함이 뚝뚝 묻어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숨기는 게 있는 건 너잖아 노나메·”
이번엔 하루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내가?”
“그래· 너도··· 너도 우리들한테 숨기는 게 있는데 왜 유나한테만 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는데!”
“뭔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줄래?”
되게 당황스러운 기분이다 지금·
방과 후 활동 때 깜빡하고 놓고 온 필통을 되찾으러 조금 늦은 시간에 들린 미술실에서 미술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던 장면을 목도해버린 초등학생의 심정만큼 당황스럽다·
사생활을 위해 누구인지는 알려주지 않겠지만·
유나가 내 허벅지에 이마를 맞대고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너 악몽 꾸는 거··· 너무 무서웠어··· 막 룬문자를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하고 살려달라고 하고 또··· 또··· 죽을 것 같다고 하고···”
유나가 자신이 본 것을 고백하자 이번엔 돼지 잠옷을 입은 소녀가 내 옆에 다가왔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난 아픈데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 거짓말쟁이 중에서 제일 나빠·”
두 주먹을 꾹 쥐며 말하는 이하루·
그녀도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낼 기세였다·
품에 달려드는 두 소녀를 껴안으며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파자마 파티 첫째 날 두 소녀를 화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울려버리고 말았다·
* * *
보름달에 가까운 조명이 밤하늘에 걸리고 땅거미가 질 무렵·
나메는 두 소녀의 웃옷을 챙겨주며 나갈 채비를 하였다·
“이 시간에 밖에 나간다고? 뭐하러?”
천교수가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별 보러요·”
나메는 짧은 대답과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교수의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장 밤이 밝은 도시에서 별들은 수줍은 듯이 제 자취를 감추었다·
“오늘 같은 날은 구름도 많이 껴서 그나마 있는 것도 안 보일 텐데?”
“괜찮아요· 어디 숨어있는지는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거 빌려가도 되죠?”
나메의 일행들이 향한 곳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
방방곳곳을 누비던 아이들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고 적막함만 남은 황량한 공터였다·
유나와 하루의 손을 이끌고 그녀들을 각각 그네에 앉혔다·
“도시 한가운데에서는 별을 보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가 광해 때문이래· 그래서 별을 보고 싶으면 사방이 어두운 곳으로 가야 할 걸?”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TMI를 남발하는 하루와 여전히 나메의 잠꼬대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유나·
나메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반강제로 끌고 오는 바람에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냈다·
“내가 꾼 건 악몽 같은 게 아니야·”
미끄럼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나메가 말했다·
“그럼 뭔데?”
유나가 투정부리는 걸 표현하려는 듯 땅을 세차게 박차고 그네를 움직였다·
노나메는 하나부터 열가지 다 신비주의로 점철된 소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나는 그녀의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화나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그녀는 다시 두 발자국을 물러났다·
한번만 더 얼버무리려고 하면 유나는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너희들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어?”
나메가 꾼 꿈은 악몽이되 악몽이 아니었다·
살면서 가장 힘들고 처절했던 순간이었던 것은 맞았지만 동시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돌아오기만을 염원하던 사람의 투쟁이었다·
“오늘 여기서 이 세상에 별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줄게·”
천교수에게서 빌린 간이 연성진 작성기를 꺼내든다·
허공에서도 매질 없이 연성진과 마법진을 작성할 수 있는 완드류 제품이었다·
특히나 기록-주입-발동의 단계가 모두 ‘작성’에 의해 일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중간에 수정할 수 없다는 디메리트가 있었다·
하지만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법·
시전자가 머릿 속으로 행하는 사고를 마법진에 반영하는 연산처리속도가 우수하며 최적근사값으로 마나를 주입시키기 때문에 마나 소모량도 적게 들었다·
앞으로 나메가 쓸 마법에 룬어와 수식이 대량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필수적인 물품이었다·
“세상에는 참 괴짜들이 많아· 모든 룬어를 한번씩 다 써서 마법진을 만들면 그게 과연 발동될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있었나봐·”
공집합을 뜻하는 ‘눌’은 생략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석대로 시전하고 싶었기에 그녀는 마법진에 128개의 공란을 만들었다·
소녀들은 여전히 나메가 무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마법진의 북쪽에서 빛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눌· 엘· 라스 마벤·”
1서클과 2서클 마법을 시전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룬으로 낭송을 시작했다·
마법진의 최상단에 룬이 박히면서 불이 하나씩 들어왔다·
“수트라 아르헨 게르눔 프시케·”
관련된 회로가 수식이 다섯 개의 톱니바퀴를 움직였다·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릴 때마다 최외곽의 선로가 시계방향으로 점차 길을 밝혀간다·
“이스타냐 뤼미에르 프레시안 판타지아 넬리멜로 사맛트라 베스티알 하이프릿·”
신기함을 넘어선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마법진의 크기에 압도된 유나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작성기를 타고 주입되는 마나의 양은 끝이 없었다·
황금의 마나를 기껏 쥐어짜내면 새로운 룬이 나타나 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나메를 중심으로 직경 8m에 달하는 거대한 마법진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가로등보다도 밝은 다섯 겹의 톱니바퀴가 놀이터를 밝게 비추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반만 불이 들어왔을 뿐이다·
끼익하고 그네가 멈추는 순간 나메는 마지막 64개의 7음절 룬어를 한 호흡에 담았다·
“지그문트아셴테 레샤아이크바르 살레안티루모네 하라예트레이카·”
일반적인 마법진에 쓰이는 128개의 룬어가 빠짐없이 쓰인 마법진의 이름은·
[시전: 알케미스트]
“알케미스트 소망을 저장하는 마법·”
나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소녀를 중심으로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
놀라기도 잠시 가장 먼저 북극성이 반짝이면서 그녀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쪽에서 열세 개의 별이 푸르게 빛났다·
서쪽에서 아홉 개의 별이 붉게 빛났다·
유나의 머리 위에도 하루의 발 밑에도 별이 송송 생겨나며 온 세상이 별빛으로 뒤덮인다·
어느새 그녀들은 지면을 밟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때? 우주의 중심에 있는 기분이지?”
어느새 미끄럼틀에서 내려온 나메가 소녀들에게 다가왔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그네조차도 사라져 버린 걸 깨닫고 하루의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이게 무슨 마법이야···?”
“별들이 예쁘지 않아? 어딜 가도 이런 데는 찾아볼 수 없을걸?”
당연한 말이었다·
수천 수만개의 별들로 빼곡히 검은 캔버스를 채운 풍경을 하루는 단언컨대 본 적이 없었다·
“나메야 그럼 네가 자면서 중얼거린게·”
“응· 난 이 마법을 쓰고 있었나 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법이거든·”
도대체 이 마법이 뭐길래·
겨우 밤하늘을 보기 위해 그런단 말인가?
하지만 유나의 의문은 금세 해소될 수 있었다·
나메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에 눈길이 저절로 갔다·
북쪽 하늘에서 한 줄기의 별똥별이 하늘을 갈랐다·
“별이 떨어지고 있어···!”
아직 감탄하기 이르다는 듯 나메는 웃음지었다·
이윽고 두 개의 세 개의 별들이 추락한다·
여전히 하늘에는 수백개의 별이 걸려 있다·
이번엔 열 개 스무 개의 별이 한꺼번에 떨어진다·
자칫 이쪽으로 떨어질까봐 덜컥 겁부터 난 유나가 나메의 손을 꽉 쥐어본다·
이는 하루도 마찬가지였다·
밤하늘을 수놓는 유성우의 향연이 하루의 가슴 한켠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나메의 빈 손을 놓치지 않았다·
별이 지나간 경로를 따라 검은 하늘에 금이 간다·
소녀들이 보는 세계가 알의 내부였다면 지금은 그 알이 깨지려고 한다·
쨍그랑-!
128번째 별이 제 역할을 다하고 떨어졌을 때 검은 돔이 완전히 무너지며 바깥세상이 드러났다·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푸른 하늘과 광대한 생명을 머금은 초원이 펼쳐졌다·
무성한 녹색의 잔디밭 위에는 흐드러지게 핀 선홍색의 꽃이 대지에 색채를 더했다·
바람이 부는 데는 따뜻한 봄 햇살과 신선한 풀 향기가 어우러져 마치 자연의 향수를 뿜어내듯 퍼져나간다·
싱그러운 바람을 타고 온 꽃잎들이 환영의 인사를 하는 듯 소녀들의 뺨에 달라 붙었다·
“좋아 가자·”
“어··· 어디로?”
나메가 언덕의 끝을 가리켰다·
풀내음 가득한 잔디 위에 단아한 돗자리를 깔고 자리잡은 일행 두명이 있었다·
하나는 차가운 인상의 금발머리 소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어린 웃음기 가득한 소녀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랜만에 별이 보고 싶어지는 밤이네요·
흑미찰보리밥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독자님이 해주신 응원의 말씀은 정말 오랫동안 제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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