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7
“여기는 꿈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꿈···?”
“응· 알케미스트는 소망을 저장하고 실체화하는 마법이야·”
그럼 나메는 꿈속에서 꿈을 실현하는 마법을 썼다는 건가?
여전히 유나의 머리가 갸웃거렸다·
걸을 때마다 이슬을 머금은 풀이 잘박거렸고 그녀의 폐부로 드나드는 차가운 공기는 도저히 거짓된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실감이 났던 것이다·
“나메야 그럼 저기 있는 사람들은 뭐야? 저 사람들도 마법이야?”
하루가 금발머리 남매들에 대해 궁금해했다·
“응 마법이라면 마법이지· 한편으로는 내가 그리워했던 사람들이기도 하고·”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냥 우리들이랑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아·”
멀리 바라보면 하늘과 초원이 하나가 되어 끝없이 이어져 가는 듯한 느낌을 주며 이곳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녀들이 있던 곳에서 언덕까지의 거리는 분명 한참 되어 보였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돗자리가 펴진 자리까지 도달해있었다·
이래서 꿈이라고 한 걸까 하루가 나지막이 중얼거려본다·
“안녕 애들아·”
우수에 찬 눈빛으로 나메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바람에 휘날려 자꾸만 움직이는 돗자리를 고정시키려고 하던 남매들은 행동을 멈추었다·
“너···? 황녀?”
“와! 에샤다 에샤! 드디어 방 밖으로 나올 기분이 든 거야? 옆에는 누구야? 혹시 친구들? 나도 소개시켜주면 안 돼?”
뚱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에게 나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언을 했다·
“소꿉놀이 할 줄 알지? 이제부터 넌 유나 공주고 넌 하루 공주야·”
“에엑 소꿉놀이? 갑자기?”
“힉 공주···!”
하루가 살짝 질색하는 반면에 유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공주가 되는 건 유나의 오랜 소원이었으므로· 설마 나메도 이런 취향을 공유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차례대로 유나와 하루라고 해·”
“아 음··· 안녕 유나 그리고 하루·”
“안녕 정말 반가워! 이름도 너무 예쁘다 다들!”
나메는 이번에 순서를 바꿔서 소개했다·
“여기 남자애는 히아센이고 동생쪽은 니오베라고 부르면 돼· 이 정도 이름은 어렵지 않지?”
“아··· 안녕 히아센 오빠?”
“니오베 언니 안녕·”
“응! 반가워!”
아직 그녀들은 두 금발머리 남매가 어색했다·
어쩌면 같은 반 한서리보다도 훨씬 더 이국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게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들은 한 미모를 했기에 더욱 거리감이 느껴졌으리라·
세 소녀를 훑은 히아센의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희미하게 경련했다·
“에스타샤···?”
“응 히아센·”
“많이 변했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일을 모두 끝마칠 때까지 안 온다면서· 네 꿈은 이제 다 이룬거야?”
“··· 그래·”
“그 끝에는 나도 있었어?”
“너도 있었지·”
“다행이야··· 바깥의 내가 널 혼자 내버려두지 않아서·”
나메의 말은 반만 사실이었다·
에스타샤 황녀의 마지막 목숨을 취한 이는 다름아닌 히아센 황제였으므로·
다만 나메는 괜히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심정에 이를 감추었다·
“오빠도 참! 왜 갑자기 이상한 얘기를 해서 텐션을 낮춰?”
“니오베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있어봐·”
“응 그래서 어쩔 건데! 난 오빠랑 안 놀고 에샤랑만 놀거지롱!”
니오베가 쪼르르 달려와 나메와 팔짱을 꼈다·
“빨리 와서 앉아! 마침 피크닉 준비도 다 해놨어· 유나와 하루도 모두 환영해!”
엉겁결에 둘에서 다섯이 되어버린 모임이라 돗자리의 면적이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히아센과 나메가 풀밭에 반쯤 걸터앉아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저기··· 너희들은 원래 나메랑 아는 사이야?”
하루가 질문했다· 이에 답해준 건 헤실거리는 웃음을 달고 사는 니오베였다·
“당연하쥐! 에샤는 우리의 영원한 동생이라구!”
바람이 불 때마다 방정맞은 입가를 가리는 백금발과 애굣살에 당장이라도 파묻힐 것 같은 금안을 가진 소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녀가 나메를 향해 동생이라고 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나메가 미리 말했던 것처럼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무너진 세상이었다·
“반대로 내가 너희들에게 묻고 싶은데· 너희들은 에스타샤와 어떻게 알게 되었지?”
“우린 아카데미 같은 반 친구야!”
히아센의 물음에 유나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절친이고···!”
또한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카데미? 에샤 넌 아카데미를 자퇴한 게 아니었어?”
“다시 입학했어·”
“하기야· 넌 예전부터 언제나 친구들을 만들고 싶어했으니까·”
“내가···?”
“응·”
“히아센 헛소리를 하는 건 여전하구나·”
“난 언제나 진심이야·”
“그 말투까지···”
모든 게 익숙하고 때문에 그리웠다·
니오베의 장난 히아센의 빈정거림·
이제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인연들에 나메는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에샤야 자 아아-”
그런 나메를 포착한 니오베가 슈크림이 가득한 에클레어 하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의 입에 쑤셔넣어 주었다·
“으읍-!”
“에이에이 먹어도 괜찮아! 살 하나도 안 쪄! 히히·”
영구치도 아닌 앞니로 베어서 간신히 빵조각을 입에서 떨어뜨릴 수 있었다·
“난 처음 알았어· 나메 너 외국에서 살다 왔어?”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만약 알케미스트가 꿈을 실체화시키는 마법이라면 대화로 보아하건대 이들은 필시 나메의 지인들이었다·
이렇게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 나메의 언니 오빠를 자처하는 게 유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나메가 에클레어를 전부 입에 털어놓고 소감을 밝혔다·
“신기하네· 사는 세상이 다르고 내 몸도 전부 달라졌는데 라울-시스트의 저장이 유지되는 게 말이야· 별자리가 같아서 그런가?”
이는 나메의 전생이 하룻밤의 꿈 따위가 아니라는 걸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히아센과 니오베는 명백히 존재하는 사람들이었고 자신의 전생은 에스타샤 황녀와 동일한 인물이었음을 시사했다·
나메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시전한 마법이었다·
힘들 때마다 꺼내왔던 마법은 자살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녀를 여기까지 지탱해주었던 마법은 그녀의 기억 속의 것과 똑같았다·
* * *
이쪽 세상 사람들이 알케미스트를 단순히 별을 볼 수 있는 마법이라고 착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우연히 마법이 시전되었을 때 그들이 마주할 수 있는 건 광활한 우주뿐이었으므로 정확한 쓰임새를 찾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기야 전생에서 처음으로 마법을 발견했던 라울 루미노스라던가 나에게 이 마법을 전수해준 히아센이라던가 모두 별을 볼 수 있는 마법이라고만 생각했었지·
알케미스트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재조합해 실체화시키는 환상 마법·
지구에 도달했던 성광(星光)의 파장을 토대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환상을 선보인다·
특히나 이는 개인의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별빛에 저장된 세계의 정보를 토대로 환상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양날의 검과 같은 마법이기도 했다·
시전자는 힘든 현실에서 도피하여 달콤한 휴식을 누릴 수 있지만 동시에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그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즉슨 현실은 언제나 이보다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주어진 과업을 모두 포기하고 싶을 때만 알케미스트(라울-시스트)를 사용하곤 했다·
이 마약과도 같은 마법을 가장 많이 썼을 때가 아마 나태 토벌전 때였을 것이다·
체내에 심은 나태의 씨앗을 폭주시키기 위해선 잠을 자면 안 된다는 괴랄하고 몰상식한 방법밖에 없었으므로·
그저 무식하게 버티고 또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마법으로 뇌척수액의 역할을 대신하여 아데노신과 아밀로이드 베타를 비롯한 뇌 안에 쌓인 독소를 억지로 제거하고 근육을 최대한으로 이완시켜 몸의 피로도를 덜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숙면을 인위적으로 대체하는 행위였을 뿐이었지 수면욕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 어떤 고문보다도 끔찍했던 짓을 1년이나 반복하는 동안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알케미스트는 필수불가결한 마법이었다·
‘그런데 자면서까지 이 마법을 읊조렸다니 친구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게 아닌가 싶네·’
한편 여기 있는 가짜 히아센과 가짜 니오베는 내 몸이 바뀐 걸 신기해했다·
당연히 그도 그럴 것이 알케미스트를 시전한 게 횟수로만 열 번을 넘어갔다·
아무리 마법으로 직조된 가짜 인격이라도 내가 출입했던 기억은 그들에게도 남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이름이 나메라고 했나? 이제 샤샤라고 부르지 못해서 아쉽네·”
“언제적 별명이야··· 그리고 이렇게나 모습이 달라졌는데·”
“조금은 놀랐어· 이번엔 또 무슨 독거미를 잘못 삼켰나 싶었지·”
히아센이 입꼬리를 올리며 넌지시 말했다·
“참나 내가 어린 애도 아니고 무슨· 이제 네 인생의 네 배는 넘게 살아왔다고·”
머리를 검게 만드는 독거미가 세상에 존재할리 없잖아·
만약 있다면 그 독의 성분은 염색약으로 노년층에게 잘 팔리기야 하겠네·
산책을 하는 동안 아무런 실속없는 대화가 나와 히아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드디어 페이란을 검술로 이겼다는 이야기 조세핀의 약혼자가 어느 변방 남작가의 딸과 바람이 난 게 들켜 가문이 초토화되었다는 이야기·
마치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줬지만 사실 이십년도 더 된 사건들이었다·
그는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똑같은 말들을 되풀이했고 나는 언제나 그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주었다·
마법이 마법인 탓에 히아센이 열세 살이라는 나이로 고정된 채로 만날 수밖에 없었지만 워낙 애가 어른스러웠던 탓인지 이렇게 내려놓고 대화를 해도 진짜 친구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익숙함의 감정에 젖는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좋네· 역시 너랑 대화하는 게 제일 편해 히아센· 말투가 건방지긴 해도 말이야·”
“지금의 난 어리잖아! 넌 밖에서 몇 년을 더 살다 왔으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그거 알아? 나는 너랑 대화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웠어·”
“뭐야 그럼 그동안 억지로 어울려줬다는 소리라도 되는 거야?”
갑자기 훅 들어오는 자백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 같다·
이거 약간 그런 건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애가 알고보니 같이 다닐 애가 없어서 그나마 나랑 같이 어울려준 상황?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에샤·”
“그럼 뭔데·”
“··· 너한텐 절대로 안 알려줄 건데?”
“참나 어이가 없어가지고·”
히아센이 혀를 내밀었다·
“아앗!”
그리고 제 혀를 깨무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카이젠 건국 이래 최고로 잘생긴 남성이라는 타이틀로 사교계를 뒤흔든 인물이 알고보면 이렇게나 허당이었다는 걸 상사병 걸린 수많은 영애들은 과연 알았을까 싶다·
오히려 반전매력이라며 좋아하려나? 하여간 이놈의 외모지상주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얘가 똥을 싸도 좋아하겠지·
“너 찡그리니까 진짜 못생겨졌다·”
내가 한마디 거들자 히아센이 얼굴을 붉히며 반대편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아··· 안 못생겼거든?”
자기도 잘생긴 걸 아는지 내가 이렇게 못생겼다고 할 때마다 분개해서 말을 철회하라고 쪼아대곤 했다·
찰랑거리는 곱슬머리를 몇 번이나 매만지는 저 나르시시스트를 봐라·
손거울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면 아마 하루종일 머리만 만져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환상세계의 시점을 기준으로 히아센은 만 13살 니오베는 10살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니오베는 에샤를 계속 동생이라 부르지만 사실 둘의 나이는 같습니다··!!
글이 많이 난잡한 점 죄송합니다· 퇴고는 다음 주에 전반적으로 하겠습니다· 공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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