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4
남부 이탈리아 왕국에서 한국 점령군은 신사적인 군대로 통했다.
사탕 몇 개만 주면 어린 소녀부터 나이 든 아줌마까지 모두 치마를 내리게 할 수 있는데도 한국군은 이탈리아 여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저씨 초코렛. 초코렛. 초코렛 하나만 주세요.”
한국인과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소녀가 거리를 순찰하는 한국 군인을 따라가 구걸했다.
“이거 줄 테니 저리 가.”
“고맙습니다. 아저씨.”
한국 병사가 따라붙는 이탈리아 소녀에게 귀찮다는 듯 먹을 걸 던져주고 걸음을 옮겼다.
다른 나라 병사 같았으면 음식을 미끼로 음험한 수작을 부리고도 남았을 텐데 한국인들은 수도승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했다.
“저 사람들 좀 봐. 달라붙는 여자애들한테 눈길도 주지 않는데. 정말 한국은 신사적인 나라인가 봐.”
이탈리아인들은 한국군이 기강이 엄한 군대라 그런 거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국군 사이에는 이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탈리아 여자랑 그걸 하고 나면 온갖 성병이 돋는다네. 그러고 나면 물건을 잘라야 한다는 거야. 알지? 칼로 쓱싹. 환관 되는 거라고. 그 꼴나기 싫으면 처신 잘하라고.”
“쟤들이 정말 그렇게 더럽다고요?”
“백인들이 원래 문란하게 사는 놈들이야. 아 결혼도 안한 남녀가 동거하면서 할 거 안 할 거 다한다니까.”
“하. 여기 여자애들 이목구비도 또렷하고 생김새도 예쁘던데 안 되겠네요.”
병사들은 거세의 공포 때문에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자들이 추파를 던져도 못 본 척했다.
그러면서 다들 부대로 돌아가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물론 이탈리아 여자애들이 성병의 온상이란 소문은 한국군 수뇌부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유언비어였다.
‘전쟁터에 성병 도는 건 역사적 사실이라고. 다 너희를 위해 한 선의의 거짓말이다.’
진실을 아는 장교들은 사정이 좀 달랐지만 그들도 이탈리아 여자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성병 걸리면 인사 고과 떨어진다고. 승진 안 할 거야?”
“여기 여자애들은 사탕만 쥐어주면 자빠트릴 수 있는데 아깝잖아요. 이런 기회를 언제 본다고.”
“멍청한 자식. 인생 하룻밤만 살려면 그래라.”
원정군에서 성병 감염을 고과에 반영한다는 말이 있다 보니 장교 대부분은 거리에서 여자들과 손가락만 마주쳐도 질겁을 했다.
이러니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국군을 좋아했다.
기회만 생기면 이탈리아 여자를 강간하려 드는 모로코 병사들이나 파운드를 흔들며 사창가를 돌아다니는 영국 병사들에 비하면 한국군은 천사였다.
“미스터 조! 생선 싱싱한 거 들어왔는데 배달해드릴까요?”
“여섯 박스만 부탁합니다.”
한국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좋다 보니 대민 관계도 원만했다.
한국 제5군 민사 참모 엄석대 대령은 이런 관계를 좀 더 다지기 위해서 현지의 마피아들을 소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유는 간단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각하께 얼마나 큰 인기를 드렸던가.
‘우리도 이탈리아에서 각하의 업적을 재현할 필요가 있다.’
엄석대는 마피아와의 전쟁이 한국군의 민사 작전을 성공시킬 키워드라 판단했다.
‘각하께서도 내 생각을 이해해주시겠지.’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백동석에게 이 같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그건 절대 안 돼.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
백동석은 즉시 반대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건 왜 그러십니까?”
이유?
각하께서 구상하시는 그림에 어긋나니까 그렇지.
백동석은 이 철없는 친구에게 각하가 그린 그림을 약간 설명해주기로 했다.
이성준 각하의 구상에 따르면 북쪽 이탈리아는 빨갱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공업력과 인구의 많은 부분을 빨갱이들이 쥐고 시작하는 거다.
그럼 남쪽은?
산업력도 인구도 후달리는 남이탈리아는 무얼 가지고 우세한 북에 대항해야 하나?
각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반공 이데올로기다.
빨갱이에 반대하는 자라면 거리의 깡패든 창녀든 노숙자든 전부 하나로 묶어야 북에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필살기를 쓰려면 조건이 있었다.
반공 외의 모든 것에 눈 감아야 했다.
부역자든 뭐든 잡음을 일으켜선 안 됐다.
백동석은 이미 이 문제를 가지고 영국군과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언제는 파시스트 전범은 절대 안 된다고 했던 것 같지만 한국 말은 원래 그때 그때 달라졌다.
그 점은 빨갱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알아듣겠나? 이건 각하께서 그린 그림이야. 귀관이 멋대로 칠을 해선 안 된다고.”
엄석대는 그제야 자기가 괜한 일을 저지를 뻔했음을 알았다.
“죄 죄송합니다 각하.”
엄석대는 백동석과 독대를 통해 생각을 180도 바꿨다.
‘그렇다면 마피아를 파트너로 삼는 게 최선이겠군.’
생각해보면 마피아 놈들은 ‘반파시스트’이자 ‘반공산주의자’인 이탈리아에서 정말이지 보기 드문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다.
범죄조직이란 선입견만 빼놓는다면 정치적으로 한국과 가장 이해가 맞는 집단이었다.
‘이 친구들을 안 건드리길 잘했군.’
엄석대는 먼저 가장 세력이 강한 시칠리아 마피아들부터 만나봤다.
마피아들은 한국군에서 찾아오자 처음엔 항구에서 물자를 빼돌려 암시장에 팔아먹는 장사가 걸렸나 싶어서 긴장했다.
하지만 이내 협력 이야기를 듣자 만면에 화색을 띄었다.
군대와 협력할 수 있다면 밀수든 뭐든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저희가 무얼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치안 유지를 도와주시오. 그럼 당신들의 장사를 계속할 수 있게 묵인하리다.”
“협조하지요.”
마피아들은 이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협상이 타결되자 마피아들은 항구와 도시 곳곳에 사람을 보내 한국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피아는 서비스로 한국군의 통역과 협상도 도왔다.
“주둔지 건설에 토지가 좀 필요한데 난처하군요.”
“저희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이봐. 청소 시작해.”
한국군이 한마디 하면 마피아가 나서서 땅을 창조해주었다.
정말이지 마피아와 손을 잡는 건 최상의 선택이었다.
엄석대가 그럭저럭 남부 이탈리아에서 민사 작전의 밑그림을 완성해갈 무렵 본국에서 훈령이 떨어졌다.
곧 중정에서 사람이 갈 테니 일을 도우란 지시였다.
군정에 갑자기 웬 중정이란 말인가.
엄석대는 영문을 몰랐다.
며칠 후 양복을 입은 동양인 몇과 유럽인 몇이 엄석대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엄석대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신분부터 확인했다.
“금수산에서 나왔습니다. 이李라고 합니다.”
중정이 맞았다.
중정은 보통 자기들을 금수산이라고 칭했다.
중정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왜인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엄석대는 한결 친절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중정에 무얼 협조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중정 요원 중 선임인 듯한 자가 서류를 내밀었다.
“줄리오 나타 다니엘 보베···· 이상의 명단 중 남 이탈리아 왕국 권역에 머무는 자를 포섭하는데 군의 협조를 받고 싶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들이었다.
“혹시 이자들이 파시스트 전범입니까?”
엄석대는 혹시 이자들이 사면받지 못한 파시스트 전범인가 생각했다.
“물론 아닙니다. 자세한 사항은 기밀이니 묻지 마시고 협조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서류를 받고 보니 이자들은 평범한 과학자 혹은 기술자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왜?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묻어두었다.
평범한 군인인 엄석대가 중정의 일에 개입하는 건 월권이었다.
엄석대는 마피아들에게 이 사람들의 신상을 알리며 수배를 요청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엄석대는 줄리오 나타를 비롯한 몇몇 사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 명단에 있는 친구 중 북이탈리아에서 피난온 사람이 여럿 있었다.
“이 친구들은 여기 있습니다.”
엄석대가 서류를 넘기자 중정 요원들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며칠 후 석대는 이탈리아 명사 여러 사람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접할 수 있었다.
‘와. 외국인도 납치한다고? 이게 중정 클라스인가?’
그 무지막지함에 입이 딱 벌어졌다.
아무튼 엄석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후로도 본국에선 이해하기 힘든 수상한 지시가 내려왔다.
“이탈리아반도의 동식물 표본을 최대한 많이 채집해 한국 생물학 연구소로 보낼 것.”
동식물 표본은 왜?
“이탈리아 문화재를 매입 가능하면 조용히 매입해서 가져올 것. 로마 시대 문화재라면 비용을 아끼지 않아도 좋음.”
문화재는 또 뭐고?
“중정이 나폴리 조선소에서 도면을 가져오는 일을 지원할 것.”
이젠 대놓고 도둑질을 시켰다.
도대체 본국이 뭘 바라고 이런 지시를 내리는 건지 엄석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킨 대로 했다.
본국은 그 외에도 이상한 임무를 내려보냈다.
이게 군정을 하는 건지 도둑질을 하는 건지 경계가 모호해질 즈음 영국군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다른 건 눈 감아드리겠는데 사람은 왜 자꾸 납치해가는 겁니까?”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알아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선박 조선 기술자 화학자 생물학자 천문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이 좀 많이 실종되긴 했다.
한 300명 정도가 인적이 묘연해졌는데 그게 한국 소행이란 걸 영국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닌 척하고 있으면 뭘 어떡할 텐가.
한국이 영국 부하도 아닌데.
엄석대는 영국의 항의를 못 들은 척하며 서류를 결제해나갔다.
한국군 치하의 이탈리아 군정은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늘 그렇듯 평화롭지 않습니다.
요청받은 에피소드였습니다.
p.s 글을 쓰다보면 저도 생각하는 게 있어서 반영 못해드리는 것도 많습니다.
p.s 2 오전에 작가의 말에 써야 했는데 깜빡했네요. EULA님 가신 곳에서 좋은 성과 거두시길 기원할게요~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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