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1
미국은 군사 분계선 이북으로 진출을 상당히 망설였다.
“우리가 북진하면 빨갱이들이 발작할 거 같은데 북상이 맞는 선택인 것 같소?”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각하.”
워싱턴은 이탈리아 전쟁을 확전시키지 않을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일단 군사 분계선 돌파는 정치적 사안이니 현장에서 멋대로 판단하지 마시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 원수에게 자의적으로 군사 분계선을 넘지 말란 지침까지 내렸다.
하지만 워싱턴은 쓸데없는 고민에 잠겨 있을 필요가 없었다.
로마가 그들 대신 결정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이 북진을 망설인다고 합니다.”
“그들이 머뭇거리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계속 북진하시오.”
로마로 돌아온 국왕 움베르토 2세는 부왕이 망쳐버린 왕국과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총리 보노미 또한 국왕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이번이 아니면 통일의 기회는 없다. 어차피 나라가 전쟁터가 된 김에 끝장을 봐야 한다.’
9월 19일 이탈리아군은 군사 분계선을 돌파해 북이탈리아 영토로 북상을 시작했다.
“북진 통일!”
“이게 맞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이젠하워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니 당신들 멋대로 그런 중대사를 결정하면 어떡한단 말이오? 연합군 통수권은 우리한테 있단 말입니다.”
“일선 부대가 공명심에 돌출 행동을 보인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원수 각하.”
로마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격렬한 항의를 받자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헛소리를 누가 믿는다고.”
서방 연합국은 이탈리아 정부의 변명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아를 향한 레이스를 시작해버린 상태였다.
연합군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탈리아 놈들만 올라갔다가 박살이 나면 전선을 우리가 다 메꿔야 할 판이다. 어쩔 수 없게 됐군.’
아이젠하워와 워싱턴은 논의 끝에 연합군에 북상 명령을 내렸다.
“북진하라.”
9월 20일 연합군이 북진을 개시하자 이탈리아 인민 공화국은 그리에코에게 책임을 묻기로 했다.
“이번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리에코 동지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는 바입니다.”
이탈리아 공산당 최고회의는 그리에코에 대한 신임을 거두었다.
그리에코는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사의를 밝혔다.
“미안합니다 동지들. 내가 중대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당과 국가에 큰 폐를 끼쳤습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게 동지가 실패한 원인이요.”
그리에코는 서기장에서 물러난 즉시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어차피 이탈리아에 남아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롱고 동지가 서기장을 맡아주시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지위는 인민군 부사령관을 맡고 있던 루이지 롱고가 승계했다.
이렇게 이탈리아 인민 공화국은 새로운 지도부 아래 전열을 정비했다.
하지만 진영을 정비 하거나 말거나 전황이 갑자기 호전되진 않았다.
이미 주력이 남쪽에 갇힌 인민군은 연합군의 전진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롱고는 나름대로 지연전을 시도했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9월 25일 연합군 최선두 부대가 중부의 대도시 피렌체를 점령했다.
롱고는 피렌체 함락을 보고받고 충격을 받았다.
“아니 벌써 피렌체가 함락됐다고?”
“오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실제 적은 좀 더 북쪽까지 올라와 있을 겁니다.”
이젠 공화국의 수도인 볼로냐도 위태로웠다.
“어쩔 수 없습니다. 수도를 옮기지 않으면 우리 공화국은 여기서 끝납니다.”
“서기장 동지. 잠시 굴욕을 감내하고 북쪽으로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서 사회주의 조국의 멸망을 받아들일 순 없잖습니까.”
이탈리아 인민 공화국은 연합군이 더 다가오기 전에 수도를 급히 북쪽 베네치아로 옮겼다.
하지만 베네치아라고 마냥 안전한 건 아니었다.
인민 공화국이 베네치아로 수도를 옮긴 날 대규모 폭격기 부대가 베네치아를 공습했다.
어두운 벙커 안에 모인 공산당 간부들의 표정은 극히 어두웠다.
이대로 가다간 한 달도 못 가 공화국이 멸망할 판이었다.
“서기장 동지. 모스크바의 지원은 없는 겁니까? 우릴 꼬드겨서 전쟁이 밀어 넣은 건 그자들이잖습니까.”
롱고도 모스크바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갑의 위치에 있는 건 모스크바였다.
“기다려보시오. 스탈린 동지가 우릴 그냥 버리지는 않을 거요.”
롱고로선 그렇게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이 이탈리아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고 있다면 분명 움직일 것이다.
이탈리아 인민 공화국의 기대는 오래지 않아 보답받았다.
사실 모스크바는 북이탈리아가 완전히 망하는 걸 방치할 수 없었다.
지정학적으로 북이탈리아의 가치가 높은데다 자기들이 전쟁을 부추겨놓고 동맹이 망하는 걸 방관했다간 다른 공산 국가들의 신뢰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어서였다.
모스크바의 지도부는 한참 동안 참전 형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우리 군대를 직접 투입해야 합니다. 한 100만 정도 투입하면 전선을 단번에 도로 밀어 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탈린은 주코프가 내놓은 안을 물리쳤다.
소련군을 투입하면 전황을 단번에 호전시킬 수 있었지만 일을 그렇게 진행하면 서방과 직접 대결하는 국면이 연출된다.
이탈리아에서 적절한 수준의 대리전을 원한 서기장의 구미에 당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소련의 관료들과 장군들은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으며 스탈린의 생각을 살폈다.
한참 논의가 이뤄진 끝에 소련 지도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직접 개입은 안 된다.
개입은 반드시 간접적인 형태여야 했다.
둘째 개입할 군사력의 규모는 50만 이하여야 한다.
지나치게 과한 군대를 출병시키면 대리전의 규모가 너무 커진다.
그렇게 됐다간 소모전의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질 우려가 있었다.
셋째 출병의 목적은 북이탈리아 인민 공화국의 보전을 목표로 한다.
이탈리아반도의 통일 같은 무리한 목표는 애초에 제시하지 않았다.
이번에 미국이 보인 결의로 볼 때 그 같은 목적은 절대 달성할 수 없었다.
넷째 지휘권은 반드시 소련이 장악한다.
그래야 전쟁을 끝낼 시기를 소련이 정할 수 있다.
지침이 정리되자 모스크바는 신속하게 행동에 나섰다.
연합군이 볼로냐를 함락시킨 9월 30일 동구권이 반응을 보였다.
“공산주의 형제를 돕기 위한 자발적인 의용병 국제 군단이 모이고 있다.”
서방은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했지만 오래지 않아 진실을 알고 경악했다.
“아니 이놈들이 미쳤나. 이게 무슨 의용군이야!”
소련제 전차와 장갑차 자주포 등으로 중무장한 30만의 간섭군이 유고 국경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입해왔다.
말이 의용군이지 실상은 동유럽 위성국과 소련 정규군을 소속만 바꿔 쳐서 보낸 군대였다.
“아 우리는 자발적인 의용병 국제 군단이라고! 스페인 내전 때 못 봤어?”
“우리는 이탈리아 인민들을 돕기 위해 온 친절한 청년들이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서방 세계는 이 뻔뻔한 변명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빨갱이들 클라스인가. 거짓말도 좀 성의 있게 해야지 저런 걸 누가 속아준다고.”
하지만 속아주지 않으면 전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방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인민 의용군 국제 군단’의 참전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소련의 개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붉은 공군은 기존에 출격시키던 전투기의 수도 배로 늘렸다.
“어디 또 베네치아를 폭격해보시지?”
소련 공군의 도전이 거세지면서 북이탈리아에서 연합군 폭격기들은 이전처럼 마음껏 하늘을 누비지 못했다.
공산 군대의 규모가 배로 커진 상황에 병참선까지 길어지면서 연합군의 전진은 급속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아이젠하워 원수는 겨울의 추위가 오기 전에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전쟁은 적어도 1년은 가겠군.”
연합군 지휘관들도 이 같은 견해에 동의했다.
단 한 부류만은 전쟁의 장기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래서 베네치아는 언제 점령한단 말인가?”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올해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믿고 있던 터라 언제 베네치아를 점령할 수 있냐고 연합군을 끊임없이 독촉해댔다.
“로마의 병신들이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는군. 살려줬으면 그것부터 고마워해야지 우리보고 자꾸 피를 흘리라 마라야.”
8군 사령관 워커를 포함해 일선 서방 지휘관들은 이탈리아인들의 북진 요구에 냉소를 보냈다.
서방 연합군은 더는 북진할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장기전에 대비해 전선에 깊은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왕국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속 공격해! 빨갱이들 힘이 빠진 지금 끝장을 내야 한다!”
“각하. 이 공격이 정말 맞는 겁니까?”
“조국 통일에 옳고 그르고가 어딨어. 파상 공세다. 빨갱이들 방어선을 반드시 돌파하도록!”
이탈리아군 장성들은 파상 공세를 명령했지만 이탈리아 단독 역량으로 전쟁을 끝내는 건 불가능했다.
이탈리아 병사들은 단단히 자리를 잡은 공산군 앞에 막대한 사상자를 내길 되풀이하며 연거푸 격퇴당했다.
공산군은 이탈리아군의 지리멸렬한 공격을 보며 사기가 올랐다.
‘이거 어려운 전쟁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해볼 만하잖아?’
수차례에 걸친 이탈리아군의 공세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거 병신들 말 좀 듣지. 2차대전 때나 지금이나 저놈들은 달라진 게 없어.”
이제 이탈리아 전쟁은 장기전 국면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휴전까지 좀 길겠죠.
이번 에피는 이성준이 없습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