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7
“확인했소?”
“확실합니다. 모스크바에서 부분 동원령을 내린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의 확언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극도로 분노했다.
“이 빨갱이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이 빨갱이들은 이탈리아 하나도 모자라서 전 유럽을 불태울 생각인가?
대통령은 안경을 고쳐 쓴 다음 합참의장에게 말했다.
“놈들에게 쓴맛을 보여줄 때도 됐군. 아드리아해에 핵을 한 발 투하하시오.”
트루먼은 이번 기세 싸움에서 밀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빨갱이들에게 미국이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한 시간 후 남부 이탈리아에서 이륙한 B-29가 아드리아해 중부에 핵을 한 방 투하했다.
콰아앙!
핵 합의를 깨트린 행동이었지만 소련도 대놓고 전면전 위기를 조장하는데 미국이라고 못할 건 없었다.
그리고 병력에 핵을 떨어트린 것도 아니어서 항의하기 애매한 부분도 있었다.
미국의 핵 투발에 모스크바도 살짝 얼어붙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겁을 먹긴커녕 핵을 날려 공갈을 치는 상황이요. 이거 상황이 제대로 돌아가는 게 맞소?”
“서기장 동지 우리 군에 핵 몇 발 정도는 별 위협이 못 됩니다. 설령 백 발쯤 투발한다 해도 우리 군의 전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건 미국인들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이탈리아에서 숱하게 검증된 사실이었다.
군부대가 표적이라면 핵은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공세를 위해 일부러 군대를 밀집시키지 않는 이상 핵 한 발로 날릴 수 있는 병력의 규모는 제한적이었다.
한 발로 대대 내외의 병력을 날리는 게 고작이었다.
문제는 표적이 도시가 될 경우였다.
“그게 연방의 도시로 날아오면 어떡할 거요?”
그 말에 장군들이 입을 다물었다.
“서기장 동지. 어차피 놈들은 우리에게 핵을 쓸 수 없습니다. 놈들의 핵에 움츠리는 모습을 보이기보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범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대범하게 행동하라?”
“핵을 떨어트린 곳에 우리 함정을 배치하는 겁니다.”
기세 싸움을 하란 거였다.
“효과가 있으면 좋겠군.”
소련은 즉시 아드리아해에 구축함을 띄워 미국에게 보란 듯이 도전적인 자세를 취했다.
미소 양측의 대치는 이내 심각한 전면전 위기로 치달았다.
하지만 물밑에선 전쟁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우발적인 전쟁으로 확전돼선 안 되오.”
“물론입니다 서기장 동지.”
소련은 겉으로는 강공을 취하고 있었지만 실은 전면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자신의 집무실에 혼자 있을 때면 브랜디를 마시며 두려움을 누그러트렸다.
독소전이 터졌을 때도 지금처럼 두렵진 않았다.
전 유럽을 장악한 나치라고 해봐야 잠깐 반짝한 훈족 같은 놈들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대서양 건너편의 거인은 진짜였다.
그들이 가진 그 압도적인 경제력.
스탈린은 미국이 대서양을 건너 보내주던 막대한 렌드리스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거인과 맞싸운다면 연방은 필패다.
그렇기에 서기장은 이번 전쟁에서 미국과 정면으로 싸울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서기장 동지 계십니까.”
“들어오게.”
스탈린은 나약한 표정을 술기운을 빌어 재빠르게 감췄다.
언제나처럼 강인한 강철 인간이 집무실 중앙을 차지했다.
“서기장 동지. 미국에서 들어온 첩보입니다.”
군사 정보국에서 올린 보고는 대부분 유용했지만 이번 것만큼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다.
“240발? 240발이라고?”
스탈린은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 숫자를 듣자마자 기겁할 뻔했다.
그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다.
미국의 핵 수량은 어렴풋이 짐작한 수량과 차이가 너무 났다.
“이것도 추정치입니다. 실제론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연방이 보유한 핵탄두는 사용한 걸 제외하면 이제 2발이 비축된 게 다였다.
이러니 미 제국주의자들이 그렇게 강하게 나온 거지.
스탈린은 이번 국면에서 물러서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핵 수량이 이 정도로 차이가 나면 솔직히 미국과 대등하다고 자부한 연방의 핵 무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린아이와 어른보다 차이가 심했다.
240발이면 연방의 대도시를 전부 지울 수 있는 수량이었으니까.
‘아직은 우리가 아메리카와 싸울 시기가 아니었다 이거군.’
“정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
스탈린은 마지막으로 확인을 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서기장은 한참 고민하던 끝에 전쟁장관 바실렙스키를 불러들였다.
“동무.”
“예 서기장 동지.”
“유럽 러시아에 하달한 부분 동원령은 현 시간부로 취소하시오.”
스탈린은 일단 후퇴를 결심했다.
소련의 동원령 취소는 유럽이 환호를 터트리게 했다.
“빨갱이들이 물러났다.”
워싱턴은 소련이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핵 공갈이 먹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빨갱이들이 확실히 핵전력이 달리는 게 확실합니다. 각하 이참에 북이탈리아에 핵을 30발 정도 꽂아버리면 소련은 감히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하고 후퇴할 겁니다.”
커티스 르메이는 강경한 태도로 핵 투발을 주장했다.
빨갱이들에게 핵 맛을 화끈하게 보여주면 이번 전쟁은 보나마나였다.
기승전핵.
르메이는 핵이 이 전쟁을 끝낼 유일한 해법임을 강조했다.
“핵으로 전선을 밀어 올린다.”
대통령도 사실 그 주장이 솔깃하긴 했다.
“그게 가능하겠소?”
“가능합니다. 필요하면 10발 정도 오스트리아 유고 국경에 투발해 방사능 벨트를 형성하면 지원군도 완전 차단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핵을 그렇게 남발했다가 빨갱이들이 욱해서 전면전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피해를 감당할 수 없었다.
트루먼은 핵의 유혹을 간신히 억눌렀다.
“장군의 이야기는 알겠지만 그 건은 시기상조요. 가능하면 소련을 말로 물러나게 하는 선에서 그칩시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강한 법이었다.
이제 소련이 물러났으니 미국도 점잖은 신사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워싱턴은 미치광이 빨갱이들처럼 피에 굶주린 호전광이 아니었다.
“국무장관.”
“예 각하.”
“평양에 중재를 요청하시오. 이쯤 됐으면 빨갱이들도 대화를 원하겠지.”
트루먼은 이번 대치를 통해 소련이 아직 미국의 적수가 아님을 확신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충돌의 여지를 빨리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지긋지긋한 이탈리아 전쟁도.
트루먼은 평양이 중재를 잘해주길 기대했다.
*
미친놈들.
솔직히 이번에 미국과 소련은 선을 넘었다.
소련은 부분 동원령을 내려 전 세계를 세계대전의 위기에 빠트렸고 미국은 대놓고 핵을 투발해 합의를 무력화시켰다.
자칫 잘못했으면 전면전 위기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그래놓고 나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다.
협상이든 뭐든 부탁을 해야 내가 중재를 하든가 하지.
아무튼 양쪽 모두 실컷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려다 겁이 났는지 우리에게 중재를 요청해왔다.
그래 요청은 해온 건 좋다 이거야.
근데 조건 차가 너무 크잖아.
“우리는 이탈리아 인민 공화국의 원상회복을 원합니다.”
빨갱이들은 늘 그렇듯 되지도 않은 헛소리를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현 위치에서 휴전하면 그대로 휴전선을 그어야지요.”
소련과 미국은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이대로 휴전하면 남이탈리아가 유리하긴 했다.
뭐 그걸 유리하다고 표현해야 할진 모르겠다.
남이탈리아의 국토 상당 부분이 화학탄과 핵탄두로 오염돼 버렸으니까.
“자. 진정들 하시고 서로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로 가시죠. 이탈리아 인민 공화국의 원상회복은 제가 듣기에도 무리한 조건입니다.”
“그럼 총리께선 어떤 중재안을 주실 겁니까?”
소련 측에서 불퉁한 태도로 물었다.
“이렇게 합시다.”
나는 포강을 경계로 이북은 북이탈리아 남은 남이탈리아가 차지하는 제안을 내놨다.
북안과 남안에 양측의 영토가 각각 뒤섞여 있는 걸 생각하면 나름 합리적인 안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온 쪽은 당연히 소련이었다.
물론 말 몇 마디에 협상이 이뤄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제시한 중재안은 나름의 기준점이었다.
이 정도 조건을 가지고 서로 조율해보면 타협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그렇다고 휴전 협상 자체가 어그러지진 않았다.
양자 모두 이번 전쟁에 피로를 느껴서였다.
소련은 전쟁을 단시간에 끝낼 거로 생각한 채 싸움에 뛰어들었고 연합국은 자기들과 별 상관도 없는 비가맹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는 상황에 지쳐 있었다.
나는 협상을 조율하면서 양측의 태도를 관찰했다.
양쪽 다 입으로는 짖어대면서 다른 한편으론 누군가 말려주길 바라고 있었다.
서로 공갈만 치면서 상대가 굴복하길 원하는 협상이라니.
뭐 이따위 협상이 다 있단 말인가.
하지만 원역의 판문점 협상을 생각하면 이상하지도 않았다.
“각하. 이번 협상은 아주 길게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한쪽의 수장이 갈리기 전엔 이 협상이 진척될 일은 없어 보였다.
“한 2년쯤 가겠군.”
“예?”
스탈린이 죽으려면 딱 그 정도 남았다.
그 양반만 가면 모두가 편해질 텐데.
물론 나는 스탈린이 오래 살수록 유리했다.
스탈린만큼 서방과 대립각을 잘 세워주는 지도자가 소련에 또 없었으니까.
“별거 아니야. 임자도 이 일에 너무 신경쓰지 말아. 때가 되면 어련히 처리될 거야.”
핵전쟁도 세계대전도 아닌 전쟁이라면 그건 우리와 상관없는 유럽의 국지전이다.
그럼 뭐 어떻게 되든 우리 알 바는 아니지.
사실 그보다 시급한 현안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영부인께서 임신하셨습니다.”
아내가 임신해버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 그걸 하는 이상 언젠가 터질 문제였습니다.
P.S. 원역 1950년 기준 미국 핵 보유수가 대충 500발 언저리입니다. 동시기 소련은 33발.
작중에선 핵 개발이 둘 다 년 단위로 뒤로 밀려서 보유수가 낮은(?)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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