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8
아내의 배에 애가 들어섰다.
벌써 두 달은 됐다고 했다.
그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건 아내의 배에 아무 티도 안 나서다.
생리 주기 같은 게 있긴 하지만 아내는 월경이 꽤 불규칙했다.
아내의 임신이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난처하긴 했다.
솔직히 매일 밤 아내에게 힘을 써놓고 애가 생겼다고 걱정하다니 모순이긴 했다.
그렇지만 어리고 예쁜 아내를 옆에 두고 그걸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놈이잖은가.
나는 그저 젊은 아내의 육체를 원하는 욕망에 졌을 뿐이었다.
물론 내 혈육에게 세습하길 포기한 시점부턴 아내를 상대하면서 나름대로 피임에 신경을 쓰긴 했다.
하지만 그걸 쓰지 않는 이상 완전한 피임은 불가능했다.
오늘 벌어진 일은 예정된 사고나 마찬가지였다.
‘둘째가 여자애가 아니면 좀 골치가 아파지는데.’
만에 하나 아내의 배 속에 든 아이가 남자애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강력한 권력자의 아들이 권력 투쟁의 전면에 등장하는 그림이 연출되니 말이다.
내 직계 혈육이라면 이성준 지지 세력으로부터 확고한 지지세를 받고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이름에 딸려올 지지 인맥 후광 그걸 손에 쥐면 어린 애송이라도 대권을 노릴 수 있었다.
나는 갑자기 불거진 후계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괜찮아요.”
반면 아내는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하던 아이를 얻은 그녀의 다갈색 눈은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를 가진 지금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뭘까.
나는 아내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나는 아내에게 오케스트라를 들으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총리님이 어쩐 일이세요? 이런 말씀도 다하시고. 평소에도 이렇게 낭만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제안에 아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다.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우리는 팔짱을 낀 채 대극장으로 향했다.
귀빈석에 앉아 간단한 음료를 시키고 남는 시간에 나는 살짝 그녀를 떠봤다.
“우리 애 말이야.”
“네.”
“만약 당신이 남자애를 낳으면 정치를 시켜야 할까.”
아내는 그 말에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더니 새초롬한 눈을 반달처럼 바꾸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내는 즉답을 피했다.
처음엔 어리숙한 모습이 있었지만 권력자의 배우자로 시간을 보내면서 아내도 많이 성장했다.
경쾌한 모차르트의 음악이 시작될 즈음 나는 슬쩍 귓속말을 건넸다.
“당신이 모르겠으면 내가 결정해도 될까?”
아내는 그 말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백하연은 백하연이었다.
속내를 감추기에 그녀는 여전히 순진했다.
“아직 애도 나오지 않았는데 너무 이르게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하지만 기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내 속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로 했다.
아내와 밀고 당기며 속을 떠보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난 우리 애가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어.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세습을 원하지 않아.”
내 단도직입적인 표현에 아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총리님. 아직 우리 애가 남자애인지도 정해지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말해두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더 실망하게 될 테니까.”
나는 아내에게 괜한 기대감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머뭇거리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총리님 앞으로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미리 선을 그으실 건 없잖아요.”
역시 그녀는 내가 남긴 것들을 혈육이 승계하길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지나친 욕심을 가졌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 생각 할 수 있었다.
세습이란 그처럼 달콤하고 유혹적인 이야기였다.
권력자라면 한 번은 세습의 유혹을 느끼게 마련이고 대부분은 그 덫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식에게 내 권좌를 물려줄 순 생각이 없었다.
국가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어서?
세습이 후대에 좋지 않은 교훈을 남겨서?
적나라한 내 속마음은 이랬다.
내가 키운 제국을 망치고 싶지 않다.
내가 평생을 쌓아 올린 위업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다.
내 아이에게 제국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게 다였다.
“사실 얼마 전까지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당신이 내 후계자를 낳아주면 어떨까 하는. 잠깐은 그럴까 생각도 했지.”
아내는 그 말에 담긴 부정적인 뉘앙스를 읽었는지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역시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어.”
나는 아내의 다갈색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의 남편이기 이전에 이 나라 대한의 지도자야. 대한제국의 수장으로서 내가 무얼 우선해야 할까. 백하연의 남편이자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란 위치일까 아니면 제국 총리 이성준의 입장일까. 당신은 내 답을 알고 있을 거야.”
아내는 내가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이성준이란 사내는 아버지 남편이란 입장보다 제국의 총리라는 입장을 우선할 사람이란 걸.
그녀는 내 곁에서 이 이성준이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오랫동안 지켜봤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내놓을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욕심에 잠깐 졌는지도 몰랐다.
내가 매번 그녀의 요염한 육체에 매혹됐듯이 말이다.
“그러니 괜한 미련은 갖지 말아.”
나는 아내에게 일말의 여지도 남겨 주지 않았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아내는 살짝 눈물을 보이더니 귀빈석을 비웠다.
화장실로 간 듯한데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울고 있는 걸까.
이렇게 아내를 울리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질 못했는데.
입맛이 조금 썼다.
아내는 연주가 끝날 때까지 귀빈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공연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어.”
그녀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평소처럼 활력이 넘치는 백하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모습이 조금 낯설긴 했다.
솔직히 아내가 이렇게 울어버릴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총리님이 그런 결정을 내리시란 걸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힘이 없었다.
“하지만 욕심이 생기는 걸 어떻게 해요. 손을 뻗으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데 어떻게 포기하겠어요.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줄 수 있는 걸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냐고요.”
그녀의 목소리엔 옅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나도 그랬어.”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의 아이를 후계로 올릴지를 놓고 수 없이 고뇌하고 번뇌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사람은 욕망에 흔들리기 쉬운 동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처럼 세습욕에 흔들리지 않은 건 김씨 삼부자라는 훌륭한 반면교사가 있어서였다.
그들이 내 머릿속에 있는 한 내가 세습이란 욕망에 질 일은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죠?”
사실 리콴유 부자나 장징궈 부자 현대의 정치 명문가들처럼 지위를 물려주고도 국가를 잘 이끌어가는 엘리트들이 없진 않다.
하지만 반대의 예시가 그 수십 수백 배는 존재했다.
“내가 세습을 생각하지 않는 건 이성준이란 이름이 가진 위험성 때문이야. 내 이름은 개인에게 물려주기에 너무 무거워졌어.”
내가 조지 워싱턴이 될 순 없어도 김일성이 되진 말아야 했다.
세습을 한다고 반드시 김 씨 조선을 재현하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세상에는 만에 하나란 게 있었다.
내 자식이 이성준이란 이름을 이용해 제 2의 김 씨 조선을 낳을 가능성.
나는 내 아들이 김정일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위험성만으로도 세습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이런 이야기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냉정하지만 내가 품은 진실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세습은 용인할 수 없어.”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없을까요?”
아내는 끝까지 대립각을 세우는 대신 한 발 물러섰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권력을 동경하면서도 그것을 손에 쥐기 위해 싸워야 한다면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었다.
그런 여자가 욕심을 가져봤다는 것부터가 내가 가진 막강한 권력을 증명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는데 그걸 탐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아내가 가졌던 욕심을 긍정했다.
단지 그녀의 욕망을 들어주지 않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야 당신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아내의 임신이 가져온 파장은 그녀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주변은 벌써부터 후계 이야기로 뒤숭숭했다.
“영식이 나오면 후계자가 될 거야. 이번에 영식이 안 나오더라도 영부인은 아직 젊잖아.”
남자애가 나오면 후계자로 바로 지정될 거란 말이 내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비교적 순종적인 아내도 아이를 가지자 생각이 많아진 상황인 걸 생각하면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첫 아이인 세은이를 가졌을 때도 주변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었다.
세습을 하느니 마느니.
우스운 착각들이었다.
나는 종신 총리로 군림할 생각은 있어도 혈통의 힘으로 제국을 영원히 지배할 마음은 없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그 금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왕 논란이 생긴 김에 세습 문제에 대해 완전히 못을 박기로 결심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성준에겐 김 씨 조선이 PTSD 같은 존재라 저렇게 세습에 학을 떼는 거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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